며칠 전 저녁식사를 하고 아내와 제가 각자 소파에 앉아 저는 휴대폰으로 브런치에 올라와 있는 글을 읽고 아내는 아내대로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아내가 약간의 코 맹맹한 소리로 저를 부릅니다.
“자기야, 자기야, 이리로 와봐.”
필요하면 자기가 올 것이지 왜 나를 부르는 건지. 그리고 누가 들으면 저 멀리 떨어져 앉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리로 오라니.
휴대폰을 보던 제가 고개를 들어 아내를 쳐다보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왜? 무슨 일인데?”
아내가 가느다랗게 눈을 뜨며 재차 코 맹맹한 소리를 냅니다.
“보여줄 게 있어서 그래. 이리로 와봐, 얼른.”
아내의 표정과 목소리를 듣는데 제 머릿속 어딘가에서 경고음이 울리는 것이 들립니다.
‘조심해. 뭔가가 있다. 정신 바짝 차려.’
저는 더운 날씨에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내 쪽으로 이동을 합니다.
제 얼굴 표정에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저는 그때 미묘하게 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저런 표정과 말투일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대충 감이 왔다고 할까요?
제가 다가가자 아내가 휴대폰 화면을 제 쪽으로 보여주면서 생긋 웃으며 말합니다.
“있잖아. 아울렛에서 세일을 하는데 60%~70%를 하나 봐. 내가 딱히 관심이 있는 건 아닌데 이런 기회를 놓치는 건 너무 아깝잖아. 그래서 대충 훑어봤더니 3개가 눈에 띄어서 자기한테 보여주려고.”
역시나 제 예감이 맞았습니다. 뭔가 꿍꿍이가 있었습니다.
“일단 한번 보기만 해 봐. 내가 장바구니에 담아놨거든. 세 가지 중에 어떤 게 제일로 마음에 드는지 말해줘.”
그때 화면을 보지 말고 매몰차게 보일지라도 뒤돌아 제자리로 와야 했습니다.
뭐라고 구시렁거리든 그냥 무시했어야 했습니다.
화면을 보는 순간 저는 이미 낚시 줄에 코가 꾀인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아내가 장바구니에 담아놓은 세 가지 종류의 원피스를 차례로 보았습니다.
하나는 노란색 원피스로 발목까지 오는 긴 원피스였고 다른 하나는 검은색에 무슨 무늬가 들어간 역시 긴 원피스였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파란색이었나? 잘 기억이 나지를 않네요.
저는 아내가 보여준 원피스를 차례대로 보았습니다. 젊고 날씬한 외국인 모델이 입고 있어서 그런지 다 괜찮아 보였지요. 옆에서 아내가 저에게 재촉을 합니다.
“어떤 게 나아? 응? 어떤 게 나한테 어울릴 것 같아?”
이때까지도 기회가 있었습니다. 묵묵부답을 하거나 다 별로라고 어디서 이런 팔리지도 않는 옷을 골랐냐고 툴툴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내의 말에 무심코 대답을 합니다.
세 가지 중에 노란색 원피스가 디자인 면에서 가장 괜찮은 거 같아, 노란색 원피스가 제일 낫네, 하고 말합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아내가 목소리 톤을 한 옥타브 올려 말합니다.
“그렇지? 노란색이 제일 낫지? 사실 나도 노란색이 제일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역시 자기는 보는 눈이 있어. 이게 색깔도 색깔이지만 디자인이 괜찮게 나왔더라고. 마침 사이즈도 있고.”
아내의 눈이 반짝반짝합니다. 제가 선풍기 바람을 가리고 서 있는데도 덥지도 않은지 싱글싱글 웃으며 저를 바라봅니다.
“내가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는 있는데 발목까지 오는 긴 원피스는 없잖아. 내가 은근히 긴 원피스가 잘 어울리거든. 근데 세일을 이렇게나 많이 해. 거의 반값도 안 해.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올지 몰라.”
“원피스 사게? 옷 많지 않아?”
제 말에 아내가 콧김을 내뿜는 듯 콧구멍을 크게 벌리며 열변을 토해냅니다.
“내가 옷이 많긴 뭐가 많아? 맨날 입는 옷만 입는데. 그리고 요즘 살이 쪄서 기존에 옷이 잘 맞지도 않아서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받는 줄 알아? 말이 나와서 말이지 자기 내가 옷을 산 적이 언제인지나 알아? 모르지? 다른 애들에 비해 나는 옷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왜 이러셔.”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해맑은 얼굴로 말합니다.
“작년에 사지 않았어?”
아내가 고개를 홱 돌리며 서운하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집니다. 마치 제가 사고 싶은 옷을 못 사게 아내를 뜯어말리고 있는 것처럼 분위기가 바뀝니다.
할 수 없이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에서 말을 꺼냅니다.
“마음에 들면 자기 돈으로 사.”
제 말에 아내가 “정말?”하며 좋아합니다.
“자기 돈으로 사는데 누가 뭐래? 좋을 대로 해.”
아내가 반색하는 얼굴로 저를 쳐다보았을 때 저는 아내의 마음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이번에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이거 수량이 두 개 밖에 안 남았대. 빨리 주문 안 하면 품절될 것 같아.”
“사이즈 확인했어?”
“어, 스몰 사이즈.”
“스몰? 자기한테 작지 않을까? 미디엄 사야 하는 거 아냐?”
아내가 도끼눈을 뜨고는 저를 바라봅니다.
“무슨 미디엄이야. 나는 스몰이면 딱 맞는다고.”
“그러다가 작으면 어쩌려고. 작을 거 같은데...”
“내가 다 알아서 사니깐 그 입 좀 닫아. 스몰이면 돼.”
잠시 후 마치 자기 돈으로 살 것처럼 말하던 아내가 갑자기 본심을 드러냅니다.
“이거 그냥 자기가 나 사줘. 선물로.”
“뭐? 내가 왜? 뭔 날도 아닌데.”
“뭐가 왜야? 와이프한테 그냥 선물로 사줄 수도 있지. 뭘 그리 화들짝 놀라, 놀라긴.”
진즉 경고음이 울렸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단호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나 돈 없어.”
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내가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빙긋 웃습니다.
“돈 없다고? 금방 들킬 거짓말을 왜 하고 그래?”
저는 아내의 눈을 피하면서 얼른 대답합니다.
“거짓말 아니야. 나 돈 없어.”
“그러면 뒤져서 나오면 다 내 거다.”
어렸을 때 힘깨나 쓰던 애들한테 듣던 말을 아내에게서 들을 줄이야...
아내가 불쑥 오른 주먹을 내밉니다. 나에게 주먹에 맞대라는 겁니다. 그래야 거래가 성립이 된다고. 어디에서 본 건 많아가지고.
저는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왜 제가 그래야 하는 거죠? 분명 아내의 코맹맹이 소리를 들었을 때,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을 때 그냥 무시했어야 했는데 마음이 약해서 받아주다 보니 상황이 꼬이게 되었습니다.
그 후의 일은 여차 저차 해서 결국 제가 사주는 걸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단 옷을 입었을 때 아내에게 잘 어울려야 된다는 조건을 달고서요.
어차피 이렇게 되게끔 결말이 짜여져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뒤늦게 합니다.
마치 취소라도 할까 봐 부리나케 원피스를 보냈는지 이틀 만에 원피스가 도착했습니다. 무지하게 큰 박스에 담겨져서요.
아내가 룰루랄라를 외치면서 박스에서 원피스를 꺼내고는 만족한 웃음을 짓습니다.
그리고 바로 노란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나와 제 앞에서 여러 포즈를 취합니다.
“어때? 너무 잘 어울리지? 나한테 딱 맞게 나온 거 같지? 내가 이런 긴 원피스도 잘 어울린다니깐.”
“조금 꽉 끼는 거 같지 않아?”
제 말에 아내가 주먹을 쥐어 보입니다.
아내는 원피스를 입고서 거울에 비춰보고 거실을 이리저리 걸어보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면서 소녀처럼 팔랑팔랑 제 눈앞에서 손을 흔듭니다.
“너무 예쁜 거 같아. 잘 어울리지? 그치?”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줍니다. 이것이 제가 해야 할 마지막 일인 것을 아니까요.
“그러게 잘 어울리네. 예쁘네.”
아내가 만족한 듯 밝은 미소를 지으며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가면서 낮게 읊조립니다.
“1~2kg만 빼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저는 만족해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제 주머니가 털린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를 했다, 그리 생각하자고 제 머릿속에 주입을 합니다.
제 주머니는 비록 가벼워졌지만 뭐 아내가 좋아하니 그걸로 된 거지요.
그나저나 비상금 놔두는 데를 다른 곳으로 바꿔야겠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데에다가 감쪽같이 숨기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