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처럼 아내와 공원 산책을 나갔다.
대부분 걸으러 나온 사람들 사이로 간간이 러닝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스쳐 앞으로 달려간다.
헉헉 숨소리를 내며 뛰면서 나를 앞질러 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질주 본능이 어느덧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아직 때가 아니야, 시기가 적절치 않아.
나는 나의 질주 본능을 가라앉히려 시선을 돌린다.
언제까지 나의 질주 본능을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참는데 까지는 참아야 한다.
예전에 휴양지로 놀러 갈 때면 매일 한 시간씩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운동을 했다.
운동이라고 해봤자 러닝머신 위에서 한 시간씩 걷는 게 고작이었지만 별다른 움직임이 없이 삼시 세 끼를 잘 챙겨 먹고 뒹굴뒹굴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일말의 죄책감이 슬슬 올라오면서 피트니스 센터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거의 텅텅 비어 있는 피트니스 센터는 나와 아내가 차지할 때가 많다. 가끔 더러 운동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물놀이와 개인 시간을 보내느라 피트니스 센터를 이용하지 않는다.
나와 아내는 러닝머신을 하나씩 차지하고는 걷기 시작한다. 러닝머신 위의 스크린을 통해 뉴스나 영화를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창밖 풍경을 보며 걷는다. 1시간을 걷고 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그런데 가끔은 우리 옆으로 탄탄한 몸을 가진 투숙객이 가볍게 몸을 푼 후 귀에다가 이어폰을 꽂은 채 마치 너희들은 관심이 없다는 듯 러닝머신 위에서 뛰기 시작한다.
지치는 기색 없이 쿵쿵쿵 뛰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또다시 내 안의 질주 본능이 꿈틀거린다.
어느 순간 내 손가락이 스피드 버튼에 올라가 있고 속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아내가 하지 마, 무리하지 마,라고 하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린 채 나도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기 시작한다.
옆 사람이 흘끗 쳐다보는 시선이 나를 더욱 자극한다.
매일 러닝이 생활화된 사람인지 호흡이 거의 흐트러지지 않는다. 뛰는 자세 또한 균형이 잡힌 채 여유롭다.
반면 나는 뛰기 시작한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호흡이 거칠어지고 자꾸 시간에 눈길을 보낸다.
질주 본능이 어느덧 경쟁심으로 바뀌면서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문다.
10분이 넘어서자 슬슬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진다. 뛰는 자세가 잘못됐는지 허리도 아파온다.
이마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지고 옆 사람이 이제 그만 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를 흘끗 본다.
무슨 러닝 로봇도 아니고 지치지도 않는 체력을 가진 사람처럼 그는 계속 뛴다. 그래서 나도 계속 뛴다.
그와 다른 것이 있다면 나는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뛰는 자세도 무너진 지 오래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에 다다른 나는 어쩔 수 없이 손가락을 뻗어 스피드 버튼을 급하게 누르며 속도를 낮춘다.
러닝머신 위에서 걷는데 순간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다리에 힘이 풀린다.
나는 러닝머신에서 뒤로 미끄러지며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는다.
이어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자기야, 괜찮아? 다치지 않았어?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그냥 가만히 걷기나 하지 뛰기는 왜 뛰어?
러닝 로봇은 개의치 않고 계속 뛴다.
그의 뛰는 뒷모습은 한 점 흐트러짐이 없이 아름답다.
나는 아내에게 잔소리를 들으며 피스니스 센터를 나와 객실로 향한다.
그날 저녁 알이 배긴 나는 또 한 번 아내에게 혼이 나고 비상시에 쓰려고 가져온 파스를 붙인다.
나도 저 사람 나이 때는 엄청 잘 달렸어.
딱 봐도 삼십 대 초반 같더구먼. 내가 나이가 조금만 젊었어도...
내가 어릴 때 다른 건 몰라도 달리기 하나는 정말 끝내주게 잘했거든.
아내가 듣지도 않는데 나는 혼자 주저리주저리 어렸을 때 얘기를 한다.
동네에서 달리기를 잘했다고. 거의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날아다녔다고.
운동회 날 달리기를 할 때면 등수 안에 들지도 못했으면서.
공원 산책길에 러닝을 하는 사람이 지나갈 때면 내 안에 숨겨진 질주 본능이 꿈틀대면서 나를 자극한다.
너도 달릴 수 있어. 바람을 느끼며 달려봐. 저 사람을 추월해서 달려보라고.
가끔은 질주 본능에 나도 모르게 속도를 낸다. 한 발 한 발 뛰기 시작한다.
아내가 뒤에서 괜히 무리하지 말고 걸으라고 하는 소리가 들린다.
뛰는 자세가 뒤뚱거린다고, 쿵쿵쿵 소리를 내며 뛴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아내의 말에 슬쩍 뒤를 돌아보고는 피식 웃으며 앞으로 내달린다.
그렇게 몇 미터나 뛰었을까?
무릎의 통증이 나를 멈추어 세운다.
무릎이 예전 같지가 않다.
내가 멈추어 서서 무릎을 만지자 어느새 다가온 아내가 하여튼 말을 안 들어, 조심조심 걸으라니깐, 많이 안 좋아? 이따 집에 가서 케토톱 붙여.
몇 달 전에 앞으로 고꾸라져서 무릎을 다치지만 않았어도...
무릎만 받쳐 주었어도...
바람을 가르며 달렸을 텐데...
저 앞에서 뛰는 사람을 가볍게 제치며 앞으로 쭉쭉 달려 나갔을 텐데...
그나저나 집에 사다 놓은 케토톱이 남은 게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