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5-056
1
집을 나설 때는 비가 안 왔는데 지하철에서 나오니 비가 오고 있었다.
4천 원이면 적당할 것 같은 우산을 6천 원을 주고 샀다.
무늬도 없고 색도 촌스러운 우산들 중에 핑크색을 골랐다.
개중에는 제일 나았으나, 불만족스러움에 마음이 심통스러웠다.
2
다이소에서 고무나무 트레이 하나를 구입했다.
정확한 용도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수저를 놓아두는 트레이 같았다.
구입해서 책상 위에 떡 하니 올려놓고 널려져있던 펜, 샤프, 홀더펜, 사인펜 등을 모아서 트레이에 담아봤다.
딱! 이었다.
같은 크기의 나무 수납상자도 있었지만 쟁반 같은 이게 더 좋았다. 쟁반형이라 보기에도 날렵하고 답답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펜 10개를 늘어놓으니 꽉 찼지만 위로 더 쌓아도 안될 것 없는 터여서, 미관상으로도 용도 상으로도 정말 딱! 이었다.
3천 원으로 이렇게 만족스러움을 느끼다니.
예전에 '만 원의 행복'이라는 방송도 있었지만, 오늘 나의 경우에는 만족감이 너무 커서 '3천 원의 행복'이라는 방송을 만들어도 분량 나올 만큼 트레이 광고를 해 줄 수도 있을 것만 같다.
3
그런가 하면 다이소에서 허니버터칩도 샀다. 3년 전에 없어서 못 사던 이 과자가 이렇게 대량으로 다이소에서 발견되니 신기했다. 2봉지를 사도 2천 원. 싸다, 싸.
안주 삼아 맥주와 먹어야지, 하고 작정했는데 냉장고를 열어보니 그 많던 맥주 캔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마신 건 아닌데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버지를 살짝 째려보다가 맥주 없이 그냥 과자를 먹었다.
그래도 과자가 맛있어서 맥주가 없다는 게 좀 덜 섭섭했다.
아까는 아버지를 살짝 째려봤는데 과자를 한 입 베어 물며 그냥 살짝 흘겨봤다.
째려보는 것과 흘겨보는 것, 같은 말이지만... 차이점을 말하라면.. 째려보는 건 째리는 거라 살짝 세고, 흘기는 건 살짝 긁는 것처럼 약한 거 아닌가 싶다.
여하튼, 허니 버터칩의 힘이 그렇다. 째리는 것을 흘기는 걸로 완화시키는 맛.
캬아. 맛있다. 맥주가 있었으면 진짜 좋았을 것을....
어? 아버지를 다시 째려보게 되네.
내 시선을 느끼신 듯, 아버지께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셨다. 나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랑 눈은 안 마주쳤다. 다행이었다.
4
우산 때문에 심통스러웠던 마음이 트레이로 흡족했다가, 맥주가 없어서 실망스럽다가 다시 과자 맛에 만족스러워하는 등.
비가 오다가 그치는 것처럼, 내 마음도 비가 오다가 개었다가 했다.
어휴, 이 희비 엇갈리는 감정이라니.
겉보기엔 평온한 내 안에 죽을 끓인다는 변덕이 살고 있다.
죽 끓이는 옆에다가 엿기름 끓여서 맥주도 좀 만들지...
아.. 맥주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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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은 단지 어떻게 시간을 소비할까 생각하지만,
지성인은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까 노력한다.
-쇼펜하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