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5-073
1
나, 텀블러, 물통(보틀)을 좋아한다.
웹 쇼핑할 때 물통 보느라 시간을 꽤 빼앗기는데 지대한 관심에 비해 소유한 물통은 4개밖에 되지 않는다. 더 사고 싶지만 어머니께 등짝 스매싱을 당하고 싶지는 않아서 참고 있다.
그러다가 어제 큰 맘먹고 텀블러 하나를 구입했다.
이제부터 카페에서 음료 주문할 때 종이컵 대신 텀블러에 받을 것이다.
그럴 요량으로 용량도 큰 거, 무려 900ml 짜리를 구입했다.
다 환경을 생각해서, 큰 안목으로 구입한 것이에요,라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콧방귀를 뀌시며 말씀하신다.
"너 집에서 드립 해 먹느라 카페 안 가잖아?"
맞는 말씀.
근데 내가 얼마 전에 어느 업체 모바일 설문조사에 참여했더니 별다방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 기프트 쿠폰을 보내줘서 받았다.
".. 그래서, 그거 받으러 가서 텀블러에 담아 올 거예요...."
내가 하는 말인데도 목소리가 자신 없게 들렸다.
"그거 한 번 받자고 물통을 사냐?"
옳은 말씀.
근데.. 나는 살 수밖에 없었다. 왜?
나, 텀블러 좋아한다.
2
웹 쇼핑 하는 김에 사고 싶은 것들을 샀다.
이러저러한 미술 용품을 몇 가지 구입했는데, 그중 바바라 수채 붓이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다.
바바라 붓은 탄력도 좋고 수분을 머금고 있는 정도도 아주 적절하다. 수채화 그릴 때 바바라 붓은 그냥 환상적이다. 그림이 너무 잘 그려진다.
어릴 적 그림을 스케치까지는 잘 하는데 수채화 채색을 하면 똥이 되어버리는 통에 풀이 죽곤 했다. 근데 미술학원 다닌다는 여자아이는 스케치북을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 애는 낱장으로 따로 준비해온 종이를 썼는데 남다르게 두꺼운 그 종이는 이상하게도 붓질에도 울지 않았다.
그때는 미술학원에서 잘 배워서 종이가 울지 않게 잘 그리나 보다고 추측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종이 그램 수가 높은, 전문 수채화 용지가 아니었겠나 싶다.
그런가 하면 붓도 내 마음대로 그어지지 않았다. 그때 문방구의 붓은 채색을 할때 좀 이상했다. 아니 사실 이상한지 어쩐지도 모르고 잘 안 그려지기만 했다.
성인이 되어 수채화 수업을 받았었는데, 그때 선생님이 추천한 붓을 구입했었다. 그게 바바라 수채화 붓이었다. 붓의 가격이 높아서 뭐가 다르긴 다르나, 하는 의문 반, 기대 반으로 사용해봤는데.....
잘 그려졌다. 붓질이 가볍고 의도한 대로 물감이 조절되어 나왔다. 부드럽고 섬세하게 움직이며 적절하게 물감이 그어졌다. 나는 신이 났다.
아르쉬지에 바바라 붓을 사용하니 그림이 아주 그냥 끝내주게 잘 그려졌다.
그때 느꼈다.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는다지만, 현대미술에서는 붓을 탓할 수도 있겠구나.
내가 실력이 없어서 붓질이 다 똑같이 나오고 종이가 우는 건가 봐, 하고 정말 붓 탓은 하지 않았었다. 근데 붓 탓이었다.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는다는 말은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똑같은 수준의 명필 두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작업물 차이는 붓과 종이의 수준 차이에서 결정날 것이리라.
그때에는 그들도 '니가 비싼 붓 썼잖아!' '비싸면 얼마나 비싸다고 그래? 붓이 다 거기서 거기지!" 요래가며 복작복작 언쟁이 날 지도.
3
능력의 수준과 현격하게 차이나는 엄청 비싼 도구가 아니라면, 조금 적절하게 비싼 정도의 도구는 구입해도 된다고 본다. 그건 '투자'라고 해도 된다.
4
어제 텀블러 사고 바바라 붓 사고, 스케치북 사고, 책 사고, 빵, 과자 사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샀다.
그야말로 강림, 지름신!
5
지름신님!
텀블러는 도착했는데 다른 게 아직 안 왔어요.
저희 동네 교통정리 좀 하고 오세요.
네? 그런 걸 왜 시키냐고요?
빨리 도착해야 쇼핑하는 즐거움이 커지니깐요.
그래야 또 지름신을 영접할 여지가 생기잖아요.
어서 교통정리, 어서!
어잇! 영접 안 하는 수가 있어요!
어서, 어서!
6
신도 부려먹는 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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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속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하여
난초가 향기롭지 않은 것이 아니다.
-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