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5-091
1
내 일상은 대부분 평화롭고 안온하게 지나가고 있다.
2
예전에는 이 평온을 권태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인상 깊은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탄한 생활이 너무 지루했고 답답했다.
그러다가 정말 파란만장하게 사는 사람을 보고 나니 이 생활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3
그녀는 사채 빚을 져서 늘 사채업자들의 전화와 방문을 받아야 했다.
업자들이 아침 9시가 되면 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한다고 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그때만 해도 들려오는 언사가 되게 거칠고 욕도 하고 막 그랬나 보더라. 어찌나 거칠던지 8시 50분 정도만 되면 가슴이 두근두근 벌렁벌렁하기 시작한다고 했었다.
그녀는 카드 돌려 막기를 하다가 사채 빚을 지다가 다시 사채 빚을 돌려 막기 하다가 말로가 꼬였다. 그녀 자신은 빚을 갚기 위해서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었지만 그 과정이나 결과를 살펴보면 명백히 사기행각을 저지른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구속되었다.
4
그녀가 파국을 맞기 전, 빚을 지고 갚기를 되풀이하며 사채업자들의 전화와 방문을 피하느라 피폐해져 갈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단한 게 부럽지 않아. 나는 최고급 호텔에서 음식 먹고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일요일 오후 여자친구들이랑 길에서 아이스크림 들고 수다 떨다가 영화 보러 가는 거, 그런 게 부러워. 일요일에도 마음 편히 지내본 적이 없어. 정말 그냥 일반 여자애들이 부러워."
5
세상에는 60억 인구가 있다.
그 60억 명이 모두 좋은 가정에서 태어날 수는 없다.
운명의 제비뽑기,라는 말도 있듯이 어떤 이는 갑부집 장남으로 태어나서 자라지만, 어떤 이는 가난한 집 막내딸로 자라나기도 한다.
유리하게 태어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삶은 처음부터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6
하지만 누군가가 그랬다. 그녀처럼 힘든 상황을 맞이하더라도 다 그녀와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고.
그 말에 동의하는 바이다.
사기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7
그녀의 삶을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그녀는 나의 반면 교사라는 것을 느낀다.
최선의 선택은 어떤 기준으로 결정할지에 대한 단상을.
그녀가 일요일 오후의 평화로움을 갈구할 때, 나는 삶의 권태를 어찌 다루어야 할지 몰라서 괴로웠다는 것을, 그 둘의 극단의 상황에서 내가 좀더 행복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운명의 제비뽑기에서 나는 제법 유리한 패를 뽑았다는 자각을.
그러한 것들을 느끼며 나는 그 당시를 생각해보았다.
8
그때까지 내게 주어진 것들이 복된 것임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나는 네가 부러워."
그때 번득, 누군가는 재촉하고 욕하는 전화에 시달리며 미친 듯이 열심히 움직여도 피가 마르는 심적 고통을 느끼는데, 그러면서 나의 안온함을 부러워하는데, 내가 일상의 지루함을 짜증 난다고 여겨도 되나?,하는 생각에 가닿았다.
9
10년이 지났다.
그때 그녀의 사기행각으로 나도 고초를 겪었다.
다행히 손실은 없었지만 얻은 바는 컸다.
경찰서에서 진술서도 써보고, 법원 출입도 처음 해봤고 재판 구경도 처음 해봤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얻은 것은, 일상을 대하는 태도이다.
나의 권태는 그녀가 그토록 갈구하던 안온이다,라고 생각하면 삶을, 권태를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 당시, 일상을 겨우 살아낸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그녀 덕분에 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잘 살고 싶은 마음과 발전하고 싶은 마음을 당연히 갖고 있었고 거기에 나는 운 좋은 사람,이라는 자각이 합해지자 뭐랄까, 정말 열심히 살고 싶어졌다.
10
좀 더 열심히 살게 된 것 같다.
이제는 지루함이 느껴지면 초조하다.
이렇게 지루할 정도로 게으르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에서이다.
과도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조금씩 변화한 것 같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하면 죽는다고 했다.
나는 충분히 확 변할 수 있는데 죽기 싫어서 서서히 변한 거다. 훗.
그녀는 아마 형을 마치고 출소했을 것이다.
그녀가 되도록 건강하고 성실하게 법을 준수하면서 잘 살길 바란다.
하지만 다시 만날 일은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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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다. -옐리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