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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져니 Jun 18. 2022

자잘스토리 7 - 029 - 우천 단상







1


비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어릴 적 어른들은 이맘때의 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땐 하수도 시설이 좋지 않아서 비가 조금 많이 온다 싶으면 배수구가 막혀서 물바다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지대가 좀 높은 편이었지만 빗물이 초등학교 운동장의 모래를 몰고 와서 침범했기에 약간의 피해를 받았었다. 앞집에 세 들어 사는 지하방 사람들은 더 말이 아니었다. 지하방이었기 때문에 물과 모래가 한꺼번에 방, 주방에 고여서 어항처럼 되어 버린 탓이다. 듣기로는 그 집 아주머니가 '학교 모래가 쓸려왔으니 학교가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라고 민원을 넣었다고 한다. 그 뒤 상황은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그 집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집을 치우고 대문 앞의 턱을 좀 높이는 방책을 실행했을 뿐이었다.




2


아마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그 물난리 이후 대대적인 배수로 공사가 있었고 정말 신기하게 그 이후부터는 장마철이 되어도 십수 년 동안 하수구 물이 역행한다거나 범람한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3


이렇게 옛일을 회상할 때마다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싶다.

사촌 오빠 중에 나와 15살 차이가 나는 오빠가 있다.

그 오빠는 내가 중학생일 때 나를 붙잡고 놀아주기도 하고 공부도 가르쳐주기도 했는데 가끔 오빠가 말해주는 옛날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예전엔 이 일대가 허허벌판, 다 밭이고 논이고 그랬어. 그러던 것이 한집 두 집 생기더니 이렇게 빽빽이 집이 들어섰다. 저쪽은 산이었는데 깎아내서 지대가 낮아졌어."


그런 말을 하는 오빠는 뭔가 감개무량해 하는듯한, 묘한 느낌의 추억을 되살려, 내가 보지 못한 15년의 세월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렸고 옛날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즐겁게 들었다.

하지만 오빠의 이야기엔 주변의 풍광만 있을 뿐 오빠의 모습이 없었다. 그것으로 보아선 그 풍광 전후가 어떻게 좋다, 나쁘다의 판단이 들어있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자연으로 둘러싼 풍광이 점차 주택가로 변한 것에 대한 어떤 느낌이 자리하는 모양이었다.




4


사촌 오빠가 변하는 환경을 인지하고 있을 때, 나는 그 당시에도 집순이어서 동네 변화 같은 거에 관심이 없었다.

그냥 하릴없이 가만히 있는 게 내 일상이었다. 좀 심심했던 어린 시절에 나를 조금은 예민하게 만들던 것은 우천이었다.

비가 오면 마당에 떨어지는 빗방울과 바닥에 골이진 곳을 지나 배수구로 흘러가는 빗물 같은 걸 보는 게 내 쏠쏠한 재미였다.

빗방울이 낮게 고인 물에 떨어져 파장을 그릴 때면 컴퍼스로 그 파장의 반지름을 재어 종이에 그려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딱히 그게 재미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때에는 쓸데없는 일에 쓸데없이 관심을 기울이던 어린이라 그랬다.




5


태어나서 계속 이곳에 살았다. 강산이 변한 것도 여러 차례, 이제 사촌 오빠의 감정을 조금 알 것 같다.

그전의 건물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신축물이 들어섰다. 여기저기서 맨들 거리는 외장재를 붙여 건물들이 완성되어 갔다.

문득 그제 옥상에서 번화가 쪽을 바라보니 높은 건물들이 빽빽한 게 생각난다.

예전에는 서울 어디서 건 63빌딩이 보였는데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안 보이게 되었고 더불어 남산도 안 보이게 되었다.

저쪽엔 풍년 쌀집이 있었는데 쌀집이 없어진 건 진작에 없어졌고 만화책방도 다 사라졌고,

여기 토박이에다 자가 건물이 있는 사람들만 장사를 하면서 이 동네에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냥 변화하는 게 신기하다.

나는 나름 살아가느라 집에 박혀서 이런저런 일했고 하루가 지나서 잠을 자야하고, 그렇게 계속 한 달, 6개월, 1년을 차례로 보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변한 게 없는데 살아있는 나보다 무생물인 건축물들이 더 변화무쌍하게 진화하고 있다.

다른 뜻은 없다. 그냥 가늠도 못하게 확 변해가는 게 낯설 뿐이다.




6


비가 그쳤다. 오후 3시인데 점심을 먹지 않았다. 이젠 배가 고프다.

나는 배가 고파서 밥을 먹으러 갈 뿐인데 이 순간 어디선가는 새 건물이 지어지면서 또 거리의 모습을 바꾸겠지?

거리의 모습이 다이내믹하게 변해갈 때 나도, 나도 '쫌' 변해갔으면 좋겠다.

"쫌!" 그렇게... 그리고 나이를 먹어도 "쫌" 되자.


"쫌" 이면 의사소통이 다 된다는데 맞는 말이겠지? 음.. 조금 "거시기"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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