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져니 Nov 19. 2022

자잘스토리 7 - 051 - 버금 효







1


아침에 일어나 전기밥통을 보니 세 사람의 한 끼 분량의 밥이 있었다.

전날 저녁에 어머니가 지어놓으신 밥으로,

부모님이 아침 일찍 운동하러 가시다 보니, 

아침에 밥을 새로 할 경황이 없어서 부러 전날 저녁 밥을 할 때 아침까지

밥이 남아있도록 넉넉하게 지어놓으시는 요즘이다.

좀 편리하시긴 하겠지만, 갓 지은 밥이 더 맛있다는 건 자명한 사실.


아버지 생신날, 그 아침에 생일상 차려드리려 일어났는데

밥통에 전날 지은 밥이 많이 남아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쌀을 고무장갑 끼고서는 절대 못 씻는다.

날이 추워서 수돗물은 차디 찼고,

맨손으로 쌀을 씻어야 했는데 그러려니 상상만으로도 고역이었다.


그래서 생신날에도 그냥 살짝 누레진 남은 밥을 

상에 올려 그냥 해치워버렸으면 했다.


그러나, 우리 집의 기둥 두 분에게, 

매일도 아니고 생일날 그 하루 아침만이라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주걱으로 풀어헤쳐,

그분들의 밥그릇에 사뿐히 올려 담아 식탁에 내어 놓는 일이

그렇게도 귀찮고 고역인 일일까?




2


어머니의 생신이 도래할 때 며칠 뒤 아버지의 생신도 도래한다.

오빠 언니는 두 분의 생신 축하를 한 번에 하기 때문인지

식사 대접과 함께 두둑한 봉투, 케이크로 부모님의 생신을 곱절로 축하드렸다.

나는 이전까지는 그냥 미역국 한 냄비 끓이고 입을 씻었는데

오빠 언니가 부모님께 너무 잘 하니까, 왠지 나도 지고 싶지 않았다.

근데 나는 두둑한 현금자산이 없으니

자잘한 선물과 소박한 생일상... 정도로..




3


이런 상황에, 아침에 찬물로 쌀 씻는 건 대수롭지 않아야만 했다.

찬물로 쌀을 씻으면서, 내가 쌀을 씻는 것인지 철사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쏭달쏭하게, 손을 팍 넣었다가 비비고 재빨리 빼내었다가를 반복했다.




4


부모님 모두 내가 차린 생신 상을 좋아해 주셨다.

어머니는 일단 아침상을 내가 차린다고 하니, 좀 더 주무실 수 있어서 좋아하신 것 같다.

아버지는 배우자가 아닌 딸자식이 끓인 미역국은 처음이라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5


그렇게 미역국을 끓어드린 두 분의 각각의 생신날,

나는 유난히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을 받았다.

식탁 의자에서 늘어지게 앉은 자세로 가래떡을 먹어도,

소파에 앉아서 거북목 자세로 TV를 봐도,

심지어 컵에 물을 따라 마시고 있는 평범한 순간에도,

나를 바라보는 두 분의 안광에서 하트 모양 빛이 새어 나왔다. 




6


오빠 언니가 부모님 챙겨 모신 것은 멋진 으뜸 효.

내가 미역국 끓여 상 차린 것도 나름 버금 효.


뭐, 나는 선방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잘스토리 7 - 050 - 모기가 원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