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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져니 Feb 10. 2024

자잘스토리 8 - 006 - 설과 다이어리






1


다이어리 쓰는 걸 좋아한다.

예전에는 그해 날짜가 박힌 다이어리는 부담스러웠다.

적혀있는 해당 연도, 해당 월, 일의 페이지를 채우지 못하고 남기면

뭔가 꽉 채우는 데에 실패한 것 같아서 그 뒤의 페이지도 연달아

주욱 남겨버리게 된다. 기록하기 하루 실패에 대한 실망으로 자포자기를 한달까.

겨우 다이어리 적는 것에 실패와 자포자기라는 말이 나오는 게

좀 웃기기도 하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는 뭔가, 완벽주의 비슷한 게 있어서,

뭘 하나 하면 완벽하게 하거나, 그러지 못하면 아예 안 해버리거나 했다.

그런고로 날짜가 박힌 원년 다이어리는 부담이었다.




2


그런데 약간의 세월이 흘러 완벽주의도 약간 흐물흐물해지니 좀 편해졌다.

조금 변하기도 했다.

다이어리 한 페이지 못 채웠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게 아니며,

하루 이틀쯤 게을러서 못 썼다 해도 오늘은 열심히 쓰면 되니까,

오늘의 페이지를 쓰는 데에 열중하자고 마음먹게 된 것이다.

물론 어제, 그제의 일이 복기가 되면 해당 페이지에도 대략 적어놓고 말이다.




3


이렇게 되기까지, 원년 다이어리를 쓰다가 만년 다이어리를 썼다가 

다시 원년 다이어리로 넘어왔다.


중간의 만년 다이어리 쓰는 것도 실패했었다.

괜스레 1월 1일 첫날부터 완벽하게 기록하는 게 부담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래서 마음이 내킬 때 시작해 보자고 마음먹고 그냥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다.

분명 1월이 아닌 몇 월인가에 기록을 시작했는데 

그 다음 해 그 달까지도 1권의 기록을 채우지 못했었다.


이건 날짜가 박혔냐 아니냐, 혹은 1월에 시작했냐 

그 이외의 달에 시작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상스럽고 별스러운 데에 완벽주의를 적용하는, 

희한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벽이 문제였다.




4


아버지와 오빠가 구해다 주는 다이어리는 관공서나 

기업에서 나온 다이어리라서 원년 다이어리가 거의 대부분이다.

날짜가 떡 하고 박혀있으니 당연히 해당 월일에 계획이나 메모를 적어왔다.

다이어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그 이후 적기가 더 수월해졌고, 

외려 빼먹는 날 없이 더 많이 쓰게 되었다.




5


아버지와 오빠가 가져다 준 다이어리는 두 종류이다.

월간 계획지와 일간 계획지로 구성된 다이어리 1권과,

월간 계획지와 노트로 구성된 다이어리 4권이었다.

두 분이 올해는 그렇게 총 5권을 가져다 주셨다.

이러다 죽을 것 같다.

신나서 죽겠다.




6


가져다 주신 다이어리만 얌전히 쓰는 데에 만족하다가,

올해는 먼슬리 다이어리를 한 권 주문했다.


생각하기에 '먼슬리만 있는 다이어리니까 

종이도 몇 장 안 들어갈테고 저렴하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눈독 들인 다이어리는 8,800원이었다.

몇 장 안되는 먼슬리인데? 얼추 9천 원이라고? 비싼 거 아냐?


근데 그 숫자들에 선이 주욱 그어져있고 아래에 5,350원이라고 적혀있다.

할인 39%의 가격이었다.

이번엔 의문이 들었다. 노트 형식에 문제가 있어서 떨이로 파나?


그러나... 벌써 2월이다. 

그 다이어리는 원년 다이어리라서 올해 날짜가 떡 하니 박혀있고,

12월과 1월에 구입할 만한 사람들은 다 구입했을 것이고,

나처럼 '문득 써볼까?', '필요한 것 같은데...'하고 의지를 가진 

뒤늦은 소비자를 위해 할인을 하는 모양이다.

물론 업체 측에서도 달이 갈수록 효용이 떨어지는 물품의 재고를 줄여야 했을 테고 말이다.




7


도착한 먼슬리 다이어리는 멀쩡하고 깔끔했다.

다이어리 내지에 이것저것 적어야 하는 칸이 있었는데,

나는 볼펜을 들고 일부러 글씨를 휘갈겨 썼다.

다이어리가 정갈하고 종이 질도 좋아서 소중히 하고 싶은 마음에 

또박또박 정자를 쓰고 싶었다.


마음은 그러했지만, 아끼는 마음이 커지면 곤란해서 경계했다.

아끼다 'ㄸ옹' 된다고 하지 않던가.

편하게 스스럼없이 마구 쓰는 게 정답.




8


총 6개의 다이어리 중 2개는 기록을 시작했다.

나머지 4권의 소용도 곧 정해질 것 같다.

모두 애정 가는 주제들로 쓸 기록들이지만 

기왕 높은 애정도의 기록은 예쁜 다이어리에 쓰고 싶다.

다이어리 녀석들의 미모 품평을 하느라 쉽사리 각각의 과목을 적지 못하고 있다.

이러다 죽을 것 같다.

신나서 죽겠다.




9


아... 이제 구정설. 민족의 설, 새해가 시작된다.

신나서 죽는 건... 창창한 12개월이 시작되는 마당에

신나서 죽는 건.... 아니지 싶다.

그냥 좋아서 죽....치고 앉아서 다이어리 적어야징!




10


세상의 만복을 골고루 받으시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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