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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스토리 8 - 066 - 농담 유전자

by 배져니






1


개인적인 일로 만나야 할 분이 계셨는데,

원체 바쁘신 분이라, 나는 약간의 브리핑만 전달하고

번거롭지 않게 해드리려고 재빨리 나오곤 한다.


근데 이번엔 좀 말할 내용이 많은데,

그동안 브리핑해온 습관을 볼 때,

나는 결코 많은 내용을 전달할 수 없을 것 같더라.


그래서 만나러 가기 전에 미리 글로 주욱 썼다.

그리고 만났을 때, 시간 절약을 위해 다짜고짜 내밀었다.




2


워낙 서적이나 서류를 많이 읽으셨을 분이라,

좀 길게 썼지만 2분 정도에 다 읽으시더라.

브리핑을 하도 들으셔서 귀의 피로도가 높으신 분이시라 그런지,

문서 브리핑은 신선하셨나 보다.


읽으시고, 전에 절대 들어볼 수 없었던 농담을 건네시더라.

문제는, 나는 브리핑만 해봤지 그분의 농담을 처음 듣는 터라,

어버버... 네.. 네.. 농담을 받아넘기지는 못하고

정직하게 정답변하며 내내 낯가리다가 나왔다.




3


내가 애정하는 연예인들이 있는데,

영상에서 그들의 낯선 모습을 보면, 내가 다 안절부절못한다.

그들이 어려운 질문을 받거나, 그들이 예민할 수 있는 말을 하거나,

그런 모습이 너무 아슬아슬해서 내 마음이 떨리는 나머지

그들의 유튜브 영상을 잘 못 보겠다.

너무 애정해서 감정이입이 너무 들어가 그런 모양이다.




4


근데 문제는....

내가 막상, 난처한 상황도 아니고, 드문 상황이나 낯선 상황에 놓이면

너무 어버버 한다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연예인 영상을 외면하듯 할 수 없는 것이니까,

내게 닥친 상황을 채널 돌려버리듯

외면할 수 없으니까 어렵기 그지없다.




5


육체를 돌고 있는 핏속에는 농담 유전자가 떠돌고,

글로는 제법 재미있고 재치 있게 그 유전인자를 발휘할 수 있는데,

실생활에서는 말 한마디 하기가 어려운, 멀뚱히 서있는 마네킹 같달까.

마네킹 중에서도 머리 없는 마네킹... 인가? 그래서 말을 못 하나?




6


아무튼, 요즘은 문제가 더 심각해졌는데,

사람들이 있는 데서 말을 잘 못한다는 거다.


이날 세 군데에 볼 일이 있었는데,

브리핑 읽어주신 분을 포함하여

나는 세 분에게 비슷한 실수를 반복했다.

해야 할 말을 못 한 것이다.

그것도 되도록이면 생략해서는 안 되는 감사의 말을 생략해버린 것이다.




7


핏속에 농담 유전자가 떠돌고, 재치 적혈구나,

유머 혈장 세포가 돌아다니면 뭐 하나?

기본 예의와 감사를 알고 있다면

표현해야 할 줄 알아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예의와 감사를 표현하는 데에는

농담 유전자보다는 도덕성 RNA와 함께

표현의 습관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너무 오래 집순이로 있었나 보다.

집순이로 지내며 유지되는 평온이 있는가 하면

홈순이로 지내며 잃는 것이 느껴져서 마음이 불편하다.


한두 시간이라도 카페에 가서 앉아있어 봐야겠다.

사람도 구경하고 사람과 함께 있는 긴장감도 익숙해지고 싶다.

또한... 떠나봐야 집이 좋다는 걸 다시 알게 될 테니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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