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에는 참 다양한 병이 있는데,
그중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은 참 안쓰러운 병이다.
그냥 바람이나 옷깃, 물건에 닿기만 해도 닿은 부분이
잘리거나 찔리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유발된다고 한다.
방송에서 누군가가 그런 병으로 힘겨워한다는 모습을 보고,
세상에 정말 별놈의 병이 다 있고,
저 사람은 어쩌다가 대체 저런 난감한 병을 앓게 된 것인지
참 짠하게 느껴졌다.
입고 있는 옷깃이 손에 닿아도 잘리는 느낌이라는데,
그럼 정말 옷을 입고 벗고 하는 것도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사소하게 물건 집어올리고 내려놓고, 하는 짧은 과정에도
통증이 엄청나게 온다고 하니... 정말 몹쓸 병이라고 생각된다.
2
한때 나는 너무 심약했다.
소심하기도 했고, 착하기도 했고,
현명하게 착하기 보다, 순해서 그냥 착한 성향이었다.
그러다 보니 쉽게 보일 때가 있었는지
자꾸 장난을 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 반응이 재미있어서 부러 장난을 걸기도 했고,
같은 장난을 치는데도 의도와 성향이 고약한 사람은
마음에 상처 주는 못된 장난질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3
나름 열심히 대응은 했으나 상처를 아예 안 받은 건 아니고,
또 별개로 삶도 고달프기도 해서 일기에 늘 신에게 기도 글을 썼다.
내가 뭐, 노벨 평화상 받을 것도 아닌데,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서 악과 불의가 사라지게 해주소서...-
...라고 썼겠는가?
몸이 편했다면 그런 멋들어진 폼 나는 기도 글을 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한없이 작디작은... 실제 몸도 작다...여리디 여린...
작으면 여려 보이기도 하더라... 그래서 그 점을 활용,
한없이 기복적인, 내 한 몸을 위한 기도 글을 적었다.
-신이여... 절 제발... 살살 다뤄주세요...-
....쩝... 그러나... 신이 날 버렸다.
굉장히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졌다.
급작스레 맞이한 상황들은 나를 극단까지 밀어붙였고
나는 맞닥뜨리고 울고 다치고 마음 상하고...
그 파란만장한 나날들을 살펴보면,
내가 신에게 버림받은 게 백퍼 확실한데,
진짜 괴로웠단 말이다,
그런데 또 지금 나의 상황이나 성품이
안정적이고 온화한 걸 보면
신이 날 버리지 않으신 것 같기도 하고....
과연 내가 겪은 일들은 어떤 득실이었을까?
4
살아오면서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 단 1명은 아니다.
의외로 나쁜 사람이 아니면서도 이상하게도 상처를 준 사람도 꽤 있다.
나는 그들을 '용서하고, 하지 않고'를 결론 내리지 않기로 했다.
만약 그들 중에 하나가 혼자 물에 빠져
죽을 둥 살 둥 허우적거리고 있으면, 튜브는 던져 주겠다.
그러나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내가 굳이 던져주지는 않겠다.
만약 내가 튜브를 던져줘서 그가 겨우겨우 다가오며 손을 뻗으면
나는 손을 잡아주지 않겠다.
그들은 사람의 얼굴을 한 금수라서
잡아주면 끌어당겨서 빠뜨리려고 할 것이다.
'그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지 않느냐?'라고 묻는다면,
하고는 싶은데, 나쁜 짓 하면 벌받는걸, 권선징악의 결말을 믿기에
굳이 살벌한 복수를 하려고 하지는 않겠다.
다만 그들을 각각 지나가다 스쳤다면,
그들 성질 어디 가겠는가, 문제를 일으킬 소질이 다분하니
그들이 물의를 일으켜서 분쟁이 일어난다면,
맞붙은 사람이 기세등등하게 그들을 몰아치면...
나는 당연히 모른척할 거다.
맞붙은 사람이 망나니라서 그를 치려고 하면...
모른 척할 거다.
만약 칼을 들고 있으면... 도의상 119에 신고는 해야겠지.
근데 칼을 들고 있는데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나는...
모른 척할 거다, 굳이 내가 왜 전화를?
나는 착한 사람이지만, 너무 착하고 싶지 않아서 진심으로 말하는데,
그들이 맞붙은 사람이 기세등등하고 체력과 체격이 우월한 사람이길 바라며,
기왕이면 폭력 전과가 있었으면 좋겠고,
전과 이력은 구체적으로, 피해자 10명이 모두 안면 골절로 고소,
폭력 전과 10범!
그리고 주변엔 필히 모여든 사람이 많기를 바란다.
당연히 그 폭력 전과자의 폭력 행사를 기원해 마지않는다.
그러는 동안 나? 119에 전화 절대 안 함, 모른 척할 거다.
5
크게 상처흉이 남았는데 잊는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문동은'과도 같은 피해자가 있을 것이다.
상처 입은 자들에게 '문동은'과도 같이 복수를 하라고 부추기고 싶지는 않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문동은'의 행동에 후련함을 느꼈는지
드라마의 인기가 말해준다.
폭력을 쓰고도 일반인으로 살아가고
사람을 핍박하고도 법망을 피해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좋은 직책에 올라가 사는 사람이 있다.
법이 해결해 주지 못해서 마음 상한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그 부조리의 울분과 화를 스스로 풀어내는 '문동은'은,
비약적으로 과장한다면 훌륭한 사람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크고 작게 억압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을뿐더러
사회적인 분노 게이지가 전반적으로 높아서
복수극 소재의 드라마가 성행하는 거 아니겠나 싶다.
6
CRPS는 몸이 통증에 민감한 것이지만...
마음이 민감해서 스치는 말과 이는 감정에 상처를 자꾸 받는다면...
그 마음의 통증도 CRPS의 통증 못지않을까 싶다.
나는 얼마 전까지 마음적인 CRPS였다면...
아파서 죽도록 몸서리만 쳤다면... 이제는...
그래도 좀 살 것 같다.
심리적인 고통이라 마음먹기에 따라, 쉽진 않지만,
아픔의 경중이 약간 달라지기도 한다.
패여진 상처로 인식하면 눈물만 나올 뿐,
어떤 성품적인 씨앗을 심을 공간으로 여기면, 숨이 쉬어진다.
나는 다시 기복 신앙처럼 기도를 한다.
-신이여, '문동은' 만들 거 아니시면, 살살... 지금처럼만 요.-
득실? 그건 사람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그냥 '이것저것그것요것' 다 쌓이고 있다고 본다.
쌓인 걸, 살면서 언제 어디엔가 재료 삼아, 활용할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그 고통의 원흉들은?
용서할지, 안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잊지 않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