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심

by 배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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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번에 기분 좋은 일이 있었을 땐 정신을 팔아버려서 발목을 삐끗하더니, 기분 좋은 일이 있었던 오늘은, 환승하여 마을버스를 타야 하는데 정신 팔아서 그냥 걷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돌아가는 것보다 다음 정거장으로 가는 게 더 빨랐다. 이 더위에 한 정거장을 걸어가다니... 땀이 쫙쫙 났다.

뭐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내 수명은 오늘도 늘어났다.

칭찬을 받았기에. ( 칭찬과 수명의 관계 참고 )









2


총 4강 예정의 시나리오 수업을 받고 있다. 글 쓰는 것이면 뭐든 관심 두고 있는 시기라 다소 짧은 4강 강좌라 할지라도 뭔가 배우는 게 있겠지 싶어서 신청했다.

저번 시간에 수강생들은 1페이지 분량의 짧은 시나리오를 써서 제출했었다.

오늘 빔프로젝터 스크린에 띄어진 자신들의 시나리오를 수강생들은 각각 낭독했고, 강사님은 그 각각의 시나리오에 대한 장단점과 어떤 식으로 촬영하면 좋을지에 대해 성실히 조언해 주셨다.


내가 낭독할 차례가 되었다. 긴장감 때문인지 스크린 안의 글씨가 뿌옇게 흐렸다. 쌍심지 켜듯 눈에 힘을 팍 주고 읽기 시작했다. 절반쯤 읽었을 때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웃길 바라며 쓴 그 대목에서 사람들이 웃기 시작하니 나는 기분이 좋으면서도 긴장이 되어서 말을 좀 더듬거렸다. 내가 말을 더듬거려도 사람들은 계속 웃었다.

버벅거리느라 읽는 진도를 못 나가고 있을 때 사람들은 스크린의 시나리오를 나보다 앞서 읽어가며 웃기 시작하는 것이다.

' 저기요, 여러분들. 제 속도에 맞춰주세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웃어주고 있는데 그게 어디냐. 내 시나리오에 웃어주고 있으시단 말이다. 아주 수준 있고 교양 넘치시는 지적인 분들이심이 분명하다. 그런 분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고 얼른 제대로 속도 내어 읽자.'


다시 한번 눈에 힘을 '빡' 주고 목소리를 또렷하게 내며 재빨리 읽어내려갔다. 길지 않은 분량이라 금세 다 읽었고 수강생들은 잔잔히 웃고 있었다. 아니, 아니다.

선생님 분들은 잔잔히 입가에 황금 미소를 뿌리고 계셨다.

왜? 져니 시나리오가 재미있어서!

지적인 분들이시라 미소도 어찌나 우아하시던지... 황금미소....

왜? 져니 시나리오가... 짱이라서....황금미소... 뭐 꼭 내 시나리오에 웃어주셔서가 아니라.... 교양 있으신 분들이라... 내 시나리오를 읽는데... 웃으시더라.... 재미있었나 봐, 헤헷. 교양 짱, 내 시나리오 짱.. 짱... 헷...짱.. 짱..우후훗..짱...짱...카하핫....짱짜라짱짱 짱짱. 짜라짜라짱짱 짱짱..크흐흣

직접적으로 잘 썼다는 칭찬을 받은 건 아니지만, "어떤가요?"라는 강사님의 질문에 수강생들의 몇몇 분이 "재미있어요."라고 말씀해주시니 그게 칭찬이나 진배없다고 생각한다. 시나리오로서는 형식적인 부족함과 여러 결함이 있었지만 적어도 내용은 좀 재미있었나 보다.


올해 상반기에만 자작글을 6번 발표하여 5번 칭찬을 받았다.

타율이 좋지 아니한가.

나, 이번 주 일요일까지만 자만하려고 한다. 주말 동안만 거들먹 거리며 한껏 잘난 척을 할 거다. 으쓱으쓱~


그럼 다음 주 토요일, 자만심 내던지고 다시 돌아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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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만심이 없었다면 이 세상에서 도무지 즐거움이란 있을 수 없다.


-로슈 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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