탓하고 싶은

by 배져니
20160521-라인드로잉 아몬드와 병 사본.jpg




어머니와 지하철을 탔다.


노약자석엔 노인분들이 듬성 앉아계셨다.

어머니를 그 자리에 앉게 해 드리고 서있었는데 어느 역에선가 남자 고등학생 무리가 한꺼번에 탑승했다.

사복을 입고 있었고 또래끼리 이야기를 하느라 시끌벅적했다.

그러나 그 시끌벅적함이 그다지 거슬리지는 않았는데 지하철 운행 소음이 워낙 커서 상대적으로 수다 소음이 상쇄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옆쪽에 계신 할아버지 한 분이 갑자기 고등학생 한 명에게 뭐라고 지적하시기 시작했다.


그 남학생은 청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멋지게 찢어짐이 들어간 바지였다.

할아버지는 그게 마음에 안 드셨나 보다. 손가락으로 그 바지 찢어진 부분을 가리키며 지적을 하셨다.

보고 있는 사람들이 좀 어리둥절했다. 그 남학생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할아버지의 의도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지하철의 소음이 워낙 심했는데 그 할아버지의 성대 근력이 좋지 않으셨는지 음성이 그 소음을 뚫지 못했다.

당연히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할아버지가 마임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사자 남학생은 영문을 모르겠지만 여튼 할아버지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해서인지 자리를 피했다. 그렇게 상황이 종결되는 듯했다.


지하철 소음은 심했고 수십여 명의 남학생의 수다가 지하철 소음과 비등하게 들려왔다. 할아버지 남학생들 쪽을 한참 보고 계시더니 일어서서 남학생들 중 아까 그 남학생을 찾아가 또 호통을 치신다.

분명 행동은 호통인데.... 마임으로 보였다. 영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할아버지라고는 해도 80세쯤 되셨을 뿐이고 정정해 보이시는 데 목소리의 근력은 그 정정함에 미치지 못하시는 듯했다.


남학생 무리는 숨죽이여 할아버지를 지켜보았고 노약자석 쪽에 계시던 모든 분들도 그쪽을 쳐다봤다. 할아버지는 한참 소리 없는 호통을 치시더니 자리로 돌아와 앉으셨다.

그냥 보기엔 할아버지가 정신성 병을 앓고 계신 게 아닐까 의심될 지경이었다.

눈빛은 맑으신 것 같은데 대체 왜 그러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들은 어머니 말씀으로는 할아버지가 "너네가 깡패야?"라고 하시더란다.

찢어진 청바지에 '깡패'라는 정의가 그닥 적당하지는 않지만 옛시대를 사신 분이면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겠다.


내 생각으로는 할아버지가 청바지가 마음에 안 들어 지적을 했는데 남학생은 무슨 소리인지 안 들려서 그냥 자리를 피했던 것이고 그 행동이 할아버지에겐 '무시'로 느껴진 게 아닌가 싶다.

자존심 상하신 할아버지가 가셔서 호령호령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남자 고등학생이라고 하면 한창 혈기왕성하다 보니 싫은 소리 한마디에 욱 할 것만 같았는데 그래도 학생들이 착하더라. 할아버지의 호령을 바라보며 싫은 내색이나 험한 말, 험한 행동을 전혀 안 했다. 그들은 그저 물끄러미 할아버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노약자석으로 돌아와 착석하셔서 분을 삭이시는 듯 심호흡을 했다.

누구랄 것 없이 모두 할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칠까 봐, 의식하면서도 외면했다.


한 5분쯤 지나자 남학생들은 다시 수다를 떨었고 전철 운행 소음은 여전히 계속 쩌렁쩌렁했다.


지하철 방송은 사당이 마지막 정차역이라고 했다.

사당에 도착하자 모두 나가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나도 일어나서 전철을 벗어났다.


남학생들은 착해서 예뻤고... 할아버지는 목소리 기력이 없어서 안타까웠고.... 그리고 지하철 소음은 탓하고 싶다. 너무 요란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유난한 수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