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 에어컨

시즌5-002

by 배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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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날이 덥다. 땀을 잘 흘리지 않는 체질인데도 어제는 너무 습하고 더워서 나도 어쩔 수 없더라.

집에 돌아와서는 입었던 옷들을 고스란히 몽땅 다 빨래통에 집어넣었다.

샤워를 하고도 더웠다. 습도가 워낙 높아서 피부 표면이 뽀송하게 마르질 않았다.

더운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 신기할 건 없지만 심하게 더워서 뇌가 경악할 지경이다. 땀이, 땀이 아닌 몸이 녹아내려서 나오는 액체가 아닐까 하는 결론을 내리니 말이다.







2


에어컨을 켰다.

어머니와 대립했다.

어머니도 더운 건 인정하며 에어컨을 켜는 데에는 동의하셨다.

단지 어머니는 마른 체형으로 더위도 잘 타지 않으시고 에어컨 바람을 싫어하신다.

에어컨의 희망온도를 높이자는 게 어머니의 의견이셨고, 나는 에어컨 켜는 의미가 있으려면 좀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간에서 아버지는 "둘이 합의를 봐"라고 하신다.


어머니 왈 "에어컨은 덥지 않으려고 켜는 것" 고로 "30도면 된다"라는 논리.

나는 "에어컨은 시원하려고 켜는 것" 고로 "적어도 28도는 되어야 한다"라는 쪽.


아버지는 알아서 하라고 하시더니 저녁 약속이 있으시다고 홀랑 외출해버리셨다.


집안에서 어머니와 나의 위상을 비교하면 단연코 어머니가 저만치 위에 자리하고 계시다.

아버지도 안 계신 이 마당, 어머니 앞에서의 나는 기세를 못 펴고 속으로만 꿍얼거리며 리모컨을 들어 30도로 조절했다.


그러나 잠시 후 내가 득세하게 되니 그 이유인즉, 어머니가 운동하러 외출하셨다네~~~ 랄랄라~~

27도로 해놔야지~~~


그러나 소심한 새가슴으로 뒷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28도로 맞춰놨다.


아.... 딴 데는 25도, 26도 막 그렇게 낮춰놓던데 나는 겨우 28도로 해놓는 데에도 어무니랑 기싸움을 하고 눈치를 봐야 한다니.....

흑, 슬프다.









3


에어컨 바람을 만끽하며 유유자적하고 있다가 지인의 전화를 받았다.

지인의 삶의 태도를 듣고 있다 보면 괜히 기분이 별로이게 된다.

예전에는 사람 싫어하는 게 드물었는데 이제는 사람 좋아하게 되는 게 드물다.

물색없이 사람을 좋아했던 시절을 거치면 그다음부터는 사람의 단점이 보이게 되는 것일까?


예전 같았으면 이 지인을 좋아하면 좋아했지 싫어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지인으로서는 흉금을 털어놓고 있는데, 나름 나를 편히 여기고 믿고 있어서 그런 것일 텐데, 이야기를 들으며 이 지인의 사고방식과 행동 패턴을 분석하고 그것이 긍정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그러고 있는 나는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여하튼 무난히 훈훈하게 이야기를 끝냈고 다음을 기약하며 기분 좋게 인사를 나누었지만 혼자 남은 나는 뭔가 더워졌다.

에어컨 바람은 그래서 더욱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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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은 마치 생각의 완성 같다.



-월레스 스티븐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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