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5-012
1
할 줄 아는 요리가 몇 없다.
조리는 잘 하는 편인데 밑반찬 요리는 거의 할 줄 모른다.
그래서 요리책을 샀다.
백종원 씨의 집밥 메뉴 52,라는 책이 그것이다.
2
어느 날 어머니께서 그 책을 유심히 보고 계셨다.
책 안의 레시피는 간단한 반찬 요리로, 나에겐 유용하지만 어머니께는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 반찬 레시피였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유심히, 평소 눈이 어두우셔서 책을 잘 보시지 않으시는데, 돋보기까지 착용하고 열심히 들여다보시는 것이었다.
막상 나는 요리를 하겠다고 사놓곤 잘 보지 않아서 방치해 놓은 책을 어머니는 내방에 오셔서 간간이 보고 가시고는 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관심 있게 책을 보시는 것은 드물어서 나는 기억해놨다.
그리고 다시 백종원 씨의 집밥 메뉴 54,라는 또 다른 책을 구입했다.
그리고 집으로 가자마자 산 책을 어머니께 보여드렸다.
3
"오징어 국을 할 때 나는 물에 무를 넣어서 익히고 그다음에 오징어를 넣었어. 맛있으라고 육수를 넣고 말이야. 근데 티브이에서 이이가(백종원 씨) 요리하는 걸 봤는데 무랑 오징어랑 액젓을 넣고 졸이는 거라. 그렇게 하면 무에 오징어 맛이랑 액젓의 간이 배어들어서 맛있어지고, 그런 후에 물을 넣어끓이면서 간만 맞추면 되는 거야. 그래서 그렇게 해봤지. 육수를 안 썼는데도 맛있더라고.
아는 사람도 오징어 국 끓일 때 무부터 물에 익힌다고 하길래 그이에게도 이 방법을 말해줬지."
라고 하시며, 어머니는 내가 사온 새 책을 들여다보시기 시작했다.
백종원 씨가 방송에 나와서 알려주신 요리 노하우의 효과를 느끼시고 그분의 요리법에 신뢰를 가지시는 모양이셨다. 책을 보시고 나선, 그 유명한 만능 간장을 만드시겠다며 주방으로 가셨다.
얼마 후에 간장을 끓여서 나는 짠 내가 온 집안에 진동했다.
그렇게 당장에 실행을 하실 줄이야.....
4
어머니께서 그렇게 요리에 관심이 많으신 줄 몰랐다. 요리 솜씨는 훌륭하시지만 수십 년을 주방에서 요리하셨는데 딱히 흥미가 있으시겠나, 싶었는데 요리책을 보자마자 그 즉시 펼쳐보시는 적극성에 내가 다 놀랐다.
그리고 그렇게 더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있으시다는 게 가슴 뭉클했다.
5
예전에 누군가가 어머니를 보고 그리 말씀하셨단다.
"여유가 있으면 멋지게 살 사람인데...."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내 기분이 씁쓸했다. 살림이 바쁘셔서 멋지게 못 사시는가, 나 때문에 번거로우신가.....
못 사는 집은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바쁘게 살다 보니 여유를 따질 여유마저 없으셨다.
요즘 상황이 좋아서 시간적 여유가 생기신 어머니는 수영강습도 다니시고, 노래교실도 다니시고, 옷도 손수 만드시고.... 그리고 새로운 요리에 도전하시고.....
어머니의 관심사와 행동반경이 점차 넓어지시는 것이 보기에 좋았다. 죄송스럽던 마음이 걷혀갔다.
6
갖다 붙이기 나름이지만, 어머니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하시겠지만, 내가 어머니의 여가생활에 영향을 쬐끔 드렸다고 자부한다.
내가 옷 만들기를 배우면서 어머니께서도 손수 옷을 만드시는 취미가 재점화했고, 내가 배우려고 산 요리책이 어머니의 취향을 저격하여 지적 호기심을 발동하게끔 한 것 같다.
요리책 사놓고 실습을 안 해서 다른 요리책을 사기가 저어되었음에도 급하게 요리책을 산 것은 어머님의 책 보시는 모습이 아름다워서였다.
포인트 할인받아서 싸게 샀다고, 잘 샀지 않느냐, 고 자랑하는 척 꺼내든 책을 어머니가 자발적으로 받아들고 펼치실 때, 그리고 책에 몰두하실 때... 나는 내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것처럼 기분이 좋더라. 어머니를 위한 나만의 '몰래 선물'이 훌륭하게 성공한 것 같아서 말이다.
7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잘 살면 행복해하신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나도 내가 어서 잘되고 잘 나가야 그게 부모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식의 행불행은 그들 자신에게 달려있지만 부모님의 행불행은 자식들의 안위에서 비롯된다고 말이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완전히 맞지도 않다. 부모님들도 당신들의 흥미가 만족되어야 즐거우시다. 사람이면 대부분 흥미가 있는 것을 할 때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이다. 이제는 개인으로서의 아버지, 어머니를 고려해서 그분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는데 도움드리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숙제로 느껴진다.
8
사온 책을 어머니가 열심히 보셔서 나는 볼 새가 없었다.
자고 일어나서 잠깐 짬을 내어 요리책을 보려고 했는데... 책이 사라졌다.
전날, "보실 거면 (안방으로) 가져가셔서 편하게 보시던지요."라고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머님이 범인이시렸다!
요리책은 두 권이 되었고, 한 권은 안방으로 대출 중.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우연찮게 구입한 요리책이 어머니의 흉중에 든 것은 정말로 행운이다.
어머니의 관심사를 자극했고 어머니는 즐거워 보이셨다.
앞으로 어머니의 새로운 반찬 메뉴가 등장할 것 같다. 그래서 가족들의 입도 즐거워질 것 같다.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어머니 좋고 가족 좋고, 좋고 좋고 좋고~~ .
갑자기 백종원 씨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든다.
백 선생님~ 고마워유~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어머니가 열심히 요리를 하시니, 나는 더 요리를 안할 것 같다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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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요리의 발견이
새로운 별의 발견보다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든다.
-앙텔므 브리야 샤바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