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
대학 친구 주희에게 전화가 왔다.
자주 통화하는 사이도 아닌데 이 시간에 전화가 왔다는 것은..
불안감이 스멀스멀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 잘 지내지? "
- 응
" 애들이랑 선배도 건강하고?'
-그렇지. 영수씨 건강은 어때?
-뭐!
숨이 턱 막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런 소식일 줄은 몰랐다.
-이게 무슨 소리야? 어쩌다. 왜?
짧은 숨을 끊어 쉬며 나는 물었다.
"많이 놀랐지? 간이식하고 계속 후유증이 있는데도 병원에 안가고 버티다가..."
-그래서 그때 정신과적 문제인거 같으니까 병원 가보라고 했는데, 안갔어?
"알잖아. 병원 자체를 불신하는 사람이니. 말 안듣더라. 계속 복수가 차올라서 통증이 심해지는데도.. 그 고집 어머님 아버님도 못꺾었어. 그렇게 아프다면서도 끝내 병원엘 안갔어. 의사들 다 돌팔이라고. 근데 있잖아. 죽던 당일날 밤에 영수씨가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며 나보고 사달라고 하는거야. 통증때문에 밥도 잘 안먹었는데 오랜만에 뭐가 먹고 싶다고 하니 어찌나 반갑던지 그 밤에 편의점으로 달려갔지. 10분? 15분도 안됐던거 같아. 아이스크림 사들고 집에 왔는데 그 사람이 피를 토한채 그르렁거리며 누워있는거야. 놀라서 119에 전화했더니 심폐소생술하라고 해서 그 사람 배위에 앉아서 심장을 마구 눌러댔어. 구급대원이 도착했는데 이미 사망한 거 같다하더라. 그렇게 됐다."
담담한 상황 설명에 나는 이미 그 현장속에 있는 듯 했다.
그때 주희는 혼자였다고 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취업이 되어서 몇 달 전 타지로 떠났다했다.
-다행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 그렇게 가시는거 봤으면 얼마나 충격이었겠니..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엄마가 되고나니 이런 상황에서 자식들 생각이 먼저 앞선다.
최대한 자식에겐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게 부모마음이다.
하지만 주희가 그 모든 참혹한 광경을 다 겪었다고 생각하니 너무너무 가슴이 아팠다.
눈 앞에 주희가 있었다면 그저 꽉 끌어안아주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미간이 잔뜩 찌그러지며 눈물이 북받쳐올랐다.
그 상황을 외롭게 혼자 맞닥들였을 주희가 너무 안스러웠다.
-혼자서 그걸... 세상에....흐흐흐흑......어쩌다가....흐흐흑...니가 왜.....
몇년전 아빠를 보내고 서럽게 울었던 것처럼 그렇게 나는 휴대전화를 그러쥔채 엉엉 울었다.
우는 소리가 큰 나머지 방에 있던 큰 딸이 나왔다.
손으로 괜찮다는 사인을 한 뒤 안방으로 들어왔다.
-영수씨, 너무 나쁘다. 어떻게 그렇게 가냐. 너한테 그렇게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고 어떻게 그렇게 떠날 수 있어... 너한테 진짜 그러면 안되는데. 너무 나빠.. 너 혼자 어떻게 살라고. 너무하다. 진짜..
나는 꺼이꺼이 울면서 머릿속에서 뒤엉켜 맴도는 말을 마구 쏟아냈다.
-나는 니 친구니까 너가 더 소중해. 그렇게 가면 안되지. 넌 남편 욕 할 수 없겠지만 난 니 친구니까 정말 영수씨가 원망스러워. 너무한다. 너무해.
21세기 의료기술이 놀랄만큼 발전했고 병원이 엎어지면 코닿을 곳에 있는데. 형편도 나쁘지 않은 사람이 의사 치료를 거부하고 그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세상을 뜬다는게 말이 돼?
가족들 생각하면 그렇게 가면 안되는거 아냐? 어떻게든 살았어야지.
대학 졸업장도 포기하고 부모와 의절한채 결혼식도 못올리고 살았는데,
돌
결혼하고 내내 아프다면서 변변한 직업없이 시부모님한테 생활비 받아 지내게 만들어놓고
혼자 그렇게 떠나 주희만 덩그러니 남겨놓다니 ...
원망과 안타까움, 미움과 슬픔이 동시에 교차했다.
-아이고 주희야......
아이 어떡해...?
남편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담담히 꺼내고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전하기 전 우리 가족의 안부부터 차분히 물었던 주희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진짜 나쁘지....흐흐흑..."
주희와 나는 전화기를 얼굴에 댄 채 또다시 흐느꼈다.
순간 어머니 영정사진 앞에서 구슬프게 울던 고모님의 곡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이고,아이고,아이고.........아이고, 아이고,아이고.......'
떠난 사람을 위해 슬피 울어주는게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수화기 너머로 나의 울음이 주희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많이 놀랬지? 그렇게 됐다. 간이식하고 나서 계속 안좋았는데 병원 안가고 그렇게 버티다가 ."
-장례식때 부르지 왜 안불렀어?
"너도 어머니 보낸지 얼마 안됐잖아. 내가 그때 갔어야했는데 영수씨 상황이 안좋아서.. 그래서 부르기가 뭐하더라. 근데 진짜 부를 사람이 별로 없어서.. 간소하게 지냈어. 우리 둘다 직장을 다닌 것도 아니고, 친정도 의절하고 시부모님도 이혼하지 오래 되신터라 일가 친척들이 오기도 좀 뭐했고 ... 어머님 아버님은 아들 장례니 안오는거 이해하겠는데, 영수씨 죽은거 주변에 쉬쉬하는 거는 좀 속상하긴 하더라. 그나마 내가 다니던 교회 사람들이 좀 와서 그나마 다행이었어."
부모님 연세가 팔십 가까이 되었는데, 부모님 친구분들이 아들 장례식에 올 리없고 거동이 불편한 노부모가 아들 빈소를 찾지 않는 일도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그래도 고인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이 적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긴 하다. 나도 그랬으니까.
몇 해 전 아버님이 숙환으로 돌아가셨다.
아버님은 남편이 중학생때 어머님과 재혼한 사이로 아버님 슬하에 친자식은 없었다.
배를 타시던 분이라 결혼하고 나서 시댁에 가더라도 얼굴을 뵌 날이 그리 많지 않았고 생각해보니 아버님까지 함께 모시고 어디 식사하러 간 적도 없는 거 같다.
아버님은 조용한 분이셨고 손녀들 재롱을 그저 흐뭇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버님은 그저 시아버님이라는 '존재'로만 존재하셨던 분이었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 컨디션이 급속도로 나빠지면서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고 마지막은 중환자실에서 돌아가셨다.
그 때 나는 내 인생의 관혼상제 중 첫번째 '상'이었고 남편에게는 형제가 없었으므로 우리가 장례를 알아서 치뤄야했다. 장례식장을 계약하고 장례지도사와 도우미들을 만나 일정 진행 상황을 듣고 어떤 유골함을 할지 정하고 식사로 제공할 음식들의 종류를 정하고 모자라는 음식이 있으면 추가 주문에 사인을 하고 중간중간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지인들을 맞이하고 남편 직장에서 온 조문객들을 정중히 대접하고 중간 중간 어머님 챙기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3일이 훌쩍 지나 화장장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 차안이었다.
장례식에는 남편과 나의 지인, 그리고 어머님의 지인과 친척들이 찾아왔지만 연락할만한 아버님의 지인은 없었다.처음엔 그게 어떤 의민지 잘 몰랐다. 사실 아버님의 장례식은 내 인생의 관혼상제 중 첫 아버님은 어머니와 재혼한 사이로 배를 타시던 분이라 시댁에 가더라도 자주 뵙지 못했다. 결혼하고 십오년 넘게 아버님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아버님은 그저 '존재'로서 존재한 것일뿐 되새김할 수 있는 추억은 나에게 많지 않았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 당시는 어리기도 어려서 '장례'라는 경험이 그저 3일 내내 검은 상복을 차려입고 처음보는 조문객들에게 인사하기 바쁜 행사장 정도의 느낌이었을 것이다.
아침 출근 시간대와 겹치는 바람에 화장장 가는 도로가 꽉 막혔다.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지금 이 세상에서 아버님의 죽음을 슬퍼해주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 장례식에 창아혼 아버님 지인이나 친척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슬퍼할 사람이 열 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슬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3일 내내 아버님의 죽음을 제대로 슬퍼했는가 하는 지점에 이르자 뭔가 가책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떤 생각을 하고 사셨을까, 어떤 마음이셨을까, 어떤 낙으로 사셨던걸까 궁금해졌다.
아버님은 살아생전 행복하셨을까?
배에서 내려온 이후로는 줄곧 특별한 일없이 집에만 계셨다. 어머님 눈치에 낮이면 지하철을 타고 부둣가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다 오신다는 말을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배 일빼고는 특별한 취미도 없으셨던 분이다. 손녀들의 재롱에도 껄껄 웃으며 안아주는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셨다.
아버님은 성실하게 조용히 사시다가 소리없이 떠나셨다.
아버님의 생애를 그렇게 반추하다보니 그냥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화장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소리죽여 울었다.
그렇게 떠나보내고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아버님 떠나실때 제대로 애도해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
한 달쯤 지났을까?
꿈속에서 아버님을 뵈었다.
영정사진 속 정정하신 모습 그대로였다.
'아버님 기분이 좋아보이세요-했더니 그렇다며 환하게 웃으신다. 다시 배를 타게 됐다며 이번엔 보수도 좋은 곳이란다.
목소리에 힘이 느껴졌다. 정말로 좋은 곳으로 가시나보다.
그렇게 꿈에서 깼다. 문득문득 아버님이 생각날때마다 마음 한켠이 무거웠는데 꿈속에서 아버님을 뵙고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좋은데 가셨나보다. 아버님 잊지 않을게요. 편히 쉬세요.
매년 기일이 되면 나는 제사상을 준비한다.
아이들과 남편과 제를 올리며 아버님을 기억한다. 조용하셨던 아버님의 모습을, 아이들과 남편과 함께 기억한다. 일년에 한번 기일만이라도 아버님이 우리의 가족이었음을, 그리고 여전히 아버님을 기억하고 기억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애도하는 사람의 수가 중요한게 아니라 언제까지 죽은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When there's no one left in the living world who remembers you, you disappear from this world. We call it the Final Death."
너를 기억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면 넌 저승에서도 사라져. 우리는 그걸 최후의 죽음이라고 부르지.
-영화 '코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