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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키바 문정엽 Feb 20. 2020

#008 나의 삶에서 자유롭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호모애스쿠스_질문하는사람_여덟번째

"저, 질문 있어요!"거의 모든 사람이 어린 시절에는 이 말을 자주 했습니다. 하늘이 왜 푸른지, 밤하늘의 별은 왜 밝게 빛나는지가 궁금했으니까요.
질문은 호기심을 가진, 생각하며 살아가는, 성장을 원하는 인간에게 내재된 삶의 태도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 삶, 그리고 세계를 질문합니다. 질문을 통해 인간은 이해하고 방향을 정하고 선택하며, 행위하고 경험합니다. 즉, 인간은 질문하는 인간입니다. 호모 애스 쿠스(Homo Askus)!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사람은 질문을 잃어버립니다. 가장 큰 이유는 실용적 필요가 모든 것에 앞서기 때문이죠.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어디에 살까? 더 많이 얻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또한 삶의 영역이 정해지면서 변화보다는 안락함을 추구하는 탓이기도 합니다. 실용성을 넘어서는 질문은 점차 삶의 도구함에서 사라집니다. 삶의 경이로움과 가능성, 미래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필요가 아니라 확실한 앎을 얻기 위해,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을 해결하는 발견을 위해, 삶의 의미와 나를 넘어서는 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은 질문을 합니다.   
저는 가능한 한 넓고 깊게 다양한 차원에서 삶을 경험하는 과정이 행복한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곧 충만한 삶 말이지요. 이를 위해 인간은 질문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왜 우주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일까?"를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은 우주가 작용하는 법칙에 대한 기존 설명을 뛰어넘는 가장 단순하고도 아름다운 법칙의 발견으로 이어졌습니다.
충만한 삶을 위해 인간으로서 물어야 하는 질문을 찾아봅니다. 질문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이끄는 힘이기 때문이죠.

호모 애스쿠스 질문하는 인간입니다.


 ""나의 삶에서 자유롭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


이 질문이 당신의 마음을 흔든다면 괜찮습니다. 중요한 질문은 때때로 무겁습니다.   

당신은 자유롭다고 느끼나요? 그렇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현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형식적으로는 자유롭습니다. 선택과 결정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가끔씩 자유롭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3백 년 전 사람들 이야기

사고 실험을 해 보죠.
3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당신이 태어났다면
당신의 삶은 왕, 귀족, 기사, 집사, 농민을 포함한 평민, 농노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타고난 신분이 삶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하던 시대였죠.
그러나, 당신은 현재 21세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당신의 삶은 그 시대와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런데 얼마나 다른가요?


질문의 의미


"나의 삶에서 자유롭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무엇에 관한 것일까요?

이 질문은 나에게 진정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묻습니다.

과거에는 신분, 계급, 권력이 사람들을 속박했습니다. 태어나 보니 모든 것이 정해져 있었고, 정해진 것이 운명처럼 사람들을 가둬버렸습니다. 귀족이라면 귀족의 삶을,  평민이라면 평민의 삶을, 노예라면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죠.

그러나 이런 삶은 인간 본성에 맞지 않는 삶입니다. 이성이 있고, 상상력이 있는 인간에게 속박과 정해진 운명이란 부자연스러운 것이니까요.

그래서 자유로운 삶을 향한 변화가 있어 왔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유를 인간에게 돌려주기 위해 진보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유가 완성된 것일까요?

권리로서의 자유는 거의 보장되었지만, 내용으로서의 자유, 실제로서의 자유는 어떠한가요?

그것을 채우는 일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을까요?


"나의 삶에서 자유롭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진정한 삶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은 내가 진심으로 살고 싶은 삶입니다.

즉, 내가 믿는 자유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속박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유입니다.

두 번째 자유는 무엇을 향한 자유입니다. 나의 가치와 이상대로 살아가고 싶은 무엇을 추구할 자유입니다.

이 자유가 진정으로 중요한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진지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 삶으로서 나는 자유로운가를 말입니다.

인생의 주인공은 각자입니다.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삶의 주인공은 오직 나입니다. 가족이 있고, 동료가 있고, 친구가 있지만 나의 자유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삶이란 내가 받아들이는 자유를 충만하게 실현하는 삶이니까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 를 이 질문은 묻습니다.

진지하고 솔직하게 당신의 내면과 대화해야 합니다.

두 번째 의미는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지금 추구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만일 현재 내가 있는 이 곳이 내가 가려고 했던 곳이 아니라면, 혹은 다른 곳에 대한 바렘이 뜨겁게 있다면 어떡해야 할까요?

삶은 주어져 있지만, 자유로운 삶을 만드는 것은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책임이기도 합니다.

나에 대한 책임, 나의 삶에 대한 책임 말입니다.

나는 나에게 책임을 다했는가? 내가 이곳에 오기까지 내가 내린 선택은 나에게 정직한 것이었나?

혹 다른 사람을 위해 내린 선택은 아니었나? 또는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정 그런 것이었나?

중요한 것은 내면의 나침반입니다. 삶의 북극성이 어디를 가리키는 가를 정직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세 번째 의미는 스스로 속박에서 벗어나는 용기를 묻습니다.

때때로 인간은 자신을 속박합니다. 만일, 당신이 자유롭지 않다고 느낀다면 가슴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속박은 여러 가지 형태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 권력, 명예를 얘기 안 할 수가 없네요.  

이들 자체가 속박은 아닙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얻기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한다면 당신은 이들에 묶인 것입니다. 부를 얻기 위해, 혹은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희생을 용인하는 경우, 정직이나 배려 같은 인간 사이의 예의를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경우. 당신이 아니라 이들이 당신의 주인입니다.

성공을 위해 가족을 희생하고 워커홀릭으로 일했던 어느 경영자는 결국 이혼하고 홀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때로는 사회적 관계가 당신을 속박하기도 합니다. 직장인으로 일하면서 내 소신과 가치를 말할 수 없다면, 혹은 말하는데 장애를 느낀다면 이는 속박입니다.

공정함과 배려라는 인간존중의 가치를 지키지 않거나, 조직의 가치와 나의 가치와 모순될 때, 이 모순을 용인하는 것이 속박입니다.

2003년 미국의 거대기업이었던 엔론은 회계자료를 부정하게 만들고, 고객과 투자자를 기만했습니다. 이를 고발한 임원은 단 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침묵했습니다.

속박은 때때로 장미의 향기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속박을 강제하는 이유가 속박당하는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말로 전해질 때, 이런 상황이 생깁니다. 돈 버는 데는 별로 쓸모가 없는 전공을 선택하려는 자녀에게  대부분의 부모는 경영학이나 법학, 의학 등 고소득 직업으로 이어지는 전공을 추천합니다. 부모의 마음을 비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진정으로 원하는 마음이 없는데도 부모의 애정을 지켜주기 위해 이를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속박입니다.

저는 자유지상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홀로 살면서, 또한 함께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간 사이에는 예의와 책임이 있습니다. 문제는 책임에 속하는 삶의 영역과 자유에 속하는 삶의 영역에 대한 생각입니다. 가치를 실현하는 영역, 경력과 일을 선택하는 영역은 매우 중요한 자유의 영역입니다.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이 부모나 스승의 뜻을 거스를 스도 있지만, 그것은 그분들에게 잘못하는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그 선택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유로운 삶은 때때로 사지선다형 정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 서로 정답을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상황에서의 선택이기도 합니다. 용기가 필요한 것이지요. 자신의 가치에 대한 전적인 믿음, 선택에 따른 삶을 받아들인다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나의 삶에서 자유롭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묻습니다.  

당신이 진정 원하는 삶을 발견하고, 그것을 찾는 삶을 살아가는 길을 생각해 보라고 묻습니다.


질문을 받고 나서


저도 진지하게 물어봤습니다.

자유는 진정한 내 의지에 따른 선택, 내 가치대로 사는 삶이라는 기준에서 나는 자유로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는 자유로운 선택을 했는가?

삶을 돌아봤습니다.

20세 전까지는 중요한 선택이 없었네요. 나름 고민이 들어간 선택은 그 뒤에 있었습니다.

대학교, 전공, 졸업 후 진로선택, 결혼, 가장으로, 시민으로......

현재 내가 하는 일과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을 자유라는 관점에서 돌이켜 보았습니다.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는 기로에서 저는 언론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경영학을 선택했지요.  기업에서 경영자로 일하고 싶다는 희망이 있었고, 좀 더 안정적인 미래에 대한 생각이 컸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조언도 있었지요. 한편으로 의무감을 느꼈고,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의무감에 따른 선택이 자유에 반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유와 상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선택, 사회인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 저는 직장인을 선택했고, 그 뒤로 세월을 이어갔지요.

다양한 조직에서 전문가로, 경영자로 살아왔습니다. 저와도 잘 맞았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지금 저는 중년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나름 자유롭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시민으로서 나는 진정 자유로운가? 바로 이 고민입니다.

좋은 세상에 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 학생운동에 참여한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졸업할 때가 되어 생활인으로서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경제적 안정이 필요했고, 우리 사회가 좋은 사회로 가고 있다는 안심도 했습니다. 또 한 가지, 내가 직접 사회를 바꾸는 일을 하는 데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왜 마음이 불편한 걸까? 계속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정과 직장만이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시민으로서 공적인 삶도 삶의 부분입니다. 물론, 직업의 세계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시민으로서 참여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업인이 좋은 상품을 만들고, 예술가가 창작물로 인간성을 고양하는 것은 사회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편합니다.

저는 특별히 정치의식이 높지는 않지만, 사회 속에 있는 작지 않은 문제 앞에서 불편함을 느낍니다.

지나친 경쟁, 돈에 의한 차별과 배제가 아직도 적지 않다는 현실을 봅니다. 학력차별, 지역차별, 성차별이 아직도 굳건합니다. 비정규직, 기초생활수급자, 성소수자, 장애인, 이민자들이 있습니다.

살아온 세월이 얼굴에 드러나듯이,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감과 소외감이 우리 사회의 지배가치를 말해 줍니다.

차별과 배제는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합니다. 돈이 없어서 그렇지 우리에게 가오가 없냐"라는 영화 대사는 사실, 우리 사회에서 비현실적입니다. 돈이 없다면 스스로 체면을 부여하기가 힘듭니다. 승리는 많이 갖는 것, 많이 갖게 되면 과정의 공정함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정치는 점점 더 해결 능력을 잃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예 무책임한 공직자와 정치인들도 많고요.  

저는 이런 현실에 분노를 느낍니다. 제가 바라는 행복한 사회는 모든 사람이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으며 자신의 꿈을 펼치는 사회입니다. 누군가가 소외당하고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는 제게도 올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제 영역을 벗어나 직접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제 영역을 지키면서 안전지대에 머물렀습니다.  

생활인으로서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핑계, 내가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고요.

내가 바라는 사회를 사는 것은 중요한 가치입니다.  

이 가치는 시민으로서 참여한다는 것, 공적인 책임을 요구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시민에게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갈 책임이 없다면, 다른 누가 그런 사회를 만들어 주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나 저는 그다지 넓게 참여하지 않는 안전한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투표로서 제 의사를 표현하지만, 이것은 최소한의 참여일 뿐입니다.

시민으로서 저의 삶에 대한 선택은 누가 시킨 것일까요? 결코 외부 현실이 강제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스스로 자신을 속박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시민으로서 자유로운 삶은 참여의 책임을 제기합니다.


진실로 충만하고 때로는 탁월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바버라 매클린톡 이야기(Barbara McClintock, 1902~1992)

“이 여자는 천재거나 아니면 미친 거야.” 이 말은 1950년대, 명망 있는 분자생물학자인 조슈아 레더버그가 바버라 매클린톡의 실험실을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한 말입니다. 매클린톡은 유전학자로 일생의 대부분을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혼자 보낸 여성 과학자입니다.
노예보다도 늦게 선거권을 부여받은 존재가 여성입니다. 매클린톡은 여성학자로서, 평생 여자에게 부여된 한계에 저항한 사람입니다. 중성적으로 옷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잘랐으며 10대에도 성인이 되어서도 연애, 결혼에 무관심했지요. 또래 여자들이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유전학에 평생을 바친 인물입니다. 학문적 열망을 가로막는 모든 것, 객관적인 관찰을 방해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기를 원했고 자신의 열정에 몰입한 것이지요.
매클린톡은 일반적인 경력이나 직업적 야망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그냥 한 사람입니다. “나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하게 될 재미난 일에 마음이 설레 잠을 이루지 못했다.”(어린 시절의 몰입에 대한 바버라의 회상)
학계에서 따돌림을 받고, 동료 과학자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으나, 유전학에 대한 그녀의 몰입은 옥수수 염색체의 정체를 확인한 업적을 낳았고, 이를 통해 세포유전학의 선두주자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82세가 되어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습니다.
20세기 초 대부분의 가정에서 여성들은 대학에 잘 보내지 않았습니다. 매클린톡은 아버지를 설득해 코넬대학의 농과대학에 입학했고, 박사학위를 얻었지만 학위를 따고 나서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과 코넬대학, 미주리대학 등을 옮겨 다녔습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했던 것이죠. 그녀를 지도한 에머슨 교수 밑에서 옥수수를 함께 연구한 이들 중 정식 교수가 되지 못한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다고 합니다. 결국 40세가 되어서야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의 정식 연구원이 되어 옥수수를 더욱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차별과 배제는 매클린톡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튀는 유전자 이론(1950년)을 주장했는데요. 과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과학자들은 유전자가 한 곳에 새겨진 표식처럼 늘 제자리를 지키며 정보를 바꾸는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유전자가 갑자기 대열을 이탈해 다른 염색체 사이로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는 매클린톡의 주장은 이단적인 가설로 취급받기에 충분했지요. 더구나 매클린톡은 유전자의 기능과 구조가 세포 및 세포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유기체와의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유전자는 옥수수라는 유기체와의 교감을 통해 결정된다는 의미였고, 이것은 기존의 과학적 가치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었던 것이죠. 그녀는 무시당했습니다.
그런데요, 분자유전학의 발전으로 그녀의 튀는 유전자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196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박테리아의 게놈에서 처음 입증되었고, 1970년대 들어서는 동물과 식물에서도 튀는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황당한 가설로 취급받던 튀는 유전자 이론이 확실한 이론으로 정립되면서 그녀는 비로소 인정을 받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983년 노벨 생리의학상의 단독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아래 자료를 발췌해서 정리함: 테레자 보이어라인, 샤이 투발리 저, 천재들의 생각법, (새로운 현재, 2016). https://www.sciencetimes.co.kr/?news=30년-만에-인정받은-옥수수-과학자)


조언


당신도 이 질문을 해보세요. 쉽게 답을 찾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 방법을 조언합니다.

첫째, 당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무엇을 깊게 생각해 봅니다.

자유에 대한 희망은 인간에게 고유한 본성입니다. 불편하다면 무엇인가 나를 묶어 놓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의 정체를 자신에 대한 연민 없이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생계에 대한 두려움, 타인에 대한 의무감, 성공에 대한 불확실함,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던져진 그림자.....

당신이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바꾸고 싶은 내면의 목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새로운 선택을 하는 것은 오직 당신 자신입니다. 불편함은 자유를 얻는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둘째, 자유로운 삶을 위한 교제입니다.

자유는 로빈손 크루소의 삶처럼 타인과 분리된 단독의 삶이 아닙니다. 당신이 인생에서 추구하는 의미는 함께 사는 삶 속에서의 가치이고, 자신의 존재입니다.

피카소는 대단히 독창적인 인물이고, 대중의 인식을 뛰어넘는 창조성을 실현했지만, 그가 추구한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마 자유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제하고, 교류하고, 대화하는 삶은 자유로운 삶에 필수요소입니다.

수평선 너머로 나가보지 못한 사람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수평선을 탐험하고 다른 땅을 경험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진실을 알았고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나와는 다른 타인의 생각은 나를 진실하게 발견하는 필수 경로입니다.

만나고 교제하고, 더불어 낯선 사람과 대화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생각을 발견해 보세요.

나를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 행위를 제약하는 타자를 의식하고 도덕적으로 대하는 것은 나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행위에 대한 책임을 내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짊어지면서 성숙한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내 맘대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 삶은 본능일 뿐이지, 자유는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홀로 자유로운 삶과 타인과 함께 하는 자유로운 삶을 생각해 보기를 조언합니다.


"나의 삶에서 자유롭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당신이 진실한 삶의 주인으로 살아 가는가를 묻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어 보세요.

당신 자신을 새롭게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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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애스 쿠스 #009

나는 안전지대에서 벗어난 일을 시도해 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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