훑어보기의 재발견
"작은 땅의 야수들, 읽어봤어?"
아, 이 질문. 독서 모임이든, 회사든, 지인과의 대화든, 나오는 순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책이라면 괜시리… 뭔가 부끄러워진다. 읽었으면 마음이 편한데, 많은 책들이 그냥 '어디선가 들어봤다' 정도다. 제목만 알고, 표지 디자인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초반 10장만 읽어봤고(초반 추운 눈 속 풍경을 묘사한 내용은 여전히 생생하다), "누가 좋다던데…" 정도만 떠오른다.
이럴 때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
"안 읽었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하거나, "대충 봤어요"하고 좀 읽은 척.
나는 적어도 독서에 관해서는 후자가 낫다고 본다.
즉 '읽은 척'이 '안 읽은 것'보다 낫다.
오해하지 마시라. 여기서 말하는 '읽은 척'은 허세 부리는 거 아니다. 내가 말하는 건, 책을 끝까지 다 읽진 않았어도 최소한 말할 거리는 확보해두는 태도다. 뭐랄까, 책임감 있는 날림(?)이라고 할까.
읽은 척을 하려면 이 정도는 필요하다.
'읽은 척'은 생각보다 어렵다. 페이지를 넘기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말할 재료'를 확보하는 게 어렵다. 왜냐하면 읽은 척을 하려면 최소 3가지는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목을 정확히 알기
"그… 뭐더라… 갑자기 이름이 생각이 안 나네 …"
이 순간, 대화 끝. 내 머릿속에서도 책이 증발한다.
목차를 한 번은 보기
목차는 책의 지도다. 저자가 어떤 순서로 설득하려는지, 큰 덩어리가 어떻게 나뉘는지 다 보인다. 지도도 안 보고 "거기 가봤어요!"라고 말하긴 어렵지 않은가.
핵심 메시지 한 문장 붙잡기
"이 책이 결국 뭘 말하려고 했지?"
여기 답할 수 있으면, 읽은 척은 성공이다.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 그 다음엔 내 경험이 붙으면서 대화가 굴러간다. 책 전체를 외울 필요도 없다. 하지만 최소한 '이런 책이에요'라고 설명할 수 있는 기억은 있어야 한다.
안 읽으면, 그마저도 없다.
문제는 '아예 안 읽어본 것'이다. 안 읽어본 책은 말할 소재 자체가 없다. '읽은 척'은 그래도 발판은 있다. 제목, 목차, 핵심 메시지. 이 3가지만 있어도 그 위에 내 생각을 올릴 수 있다.
그런데 아예 안 읽으면?
-질문이 안 떠오른다. 질문은 정보에서 나온다. 목차 한 번만 봐도 "왜 이걸 먼저 말하지?" 같은 의문이 생긴다. 아무것도 모르면 질문도 없다.
-다른 관점으로 생각할 여지가 없다. 생각은 '대상'이 있어야 가능하다. 책의 주장을 조금이라도 알아야 "나는 반대로 생각하는데" 같은 전환이 일어난다.
-대화가 끊긴다. 독서가 꼭 지식 자랑용은 아니다. 하지만 책은 고상한 사람들(또는 고상한 척 하는 사람들)의 대화를 여는 재료인데, 재료가 없으면 요리는 시작도 못 한다. (경험상 자랑을 안 해도, 책을 많이 보면 사람들이 다른 눈으로 쳐다보긴 한다)
즉, 안 읽으면 '읽은 척'도 못 한다. 그리고 더 본질적으론 생각을 돌려 볼, 거리 자체가 안 생긴다.
그래서 나는 '훑어보기'를 권한다. 게다가 우리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세상엔 좋은 책이 많다. 정말 너무 많다. 그러니 전략이 필요하다. 정독해야 하는 책, 핵심만 뽑아도 충분한 책, 훑어보기만 해도 되는 책 등등 내 상황에 맞게.
훑어보기는 어정쩡한 독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현실적인 첫 단계다. 제목 확인하고, 목차 보고, 서문이나 결론 읽고, 중간에 눈에 걸리는 챕터 하나 읽는다. 이 정도만 해도 책은 '내 머릿속에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그 책이 나를 따라온다. 어디 가서 비슷한 얘기를 들으면 떠오르고, 내 일에서 연결점이 보이고, 누가 질문하면 말이 나온다.
안 읽어본 책은 내 안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훑어본 책은 적어도 질문 하나는 남긴다.
때로는 그 질문 하나가 책 한 권보다 오래 간다.
그래서 전자책 구독을 하나 하고 있다. (결국 깔때기는 전자책으로)
PS. 부작용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도 훑어보기를 즐겨하게 된다. 최근엔 ‘자백의 대가’를 건너뛰기로 쭈욱 훑어봤다. 대충 어떤 스토리인지 파악하고 끝. 무미건조해지기 쉽다.
<글쓰기 관련 참고자료 모음>
https://www.jakkawa.com/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