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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서희 Feb 03. 2022

나이듦이 중요한 나이

앞자리가 5가 되었다.


"선생님, 몇 살이요? 결혼하셨어요?"

매년 교실에서 새로운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예외없이 듣는 질문이었다. 내가 선뜻 대답해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더욱 집요하게 물었다.

"선생님 학력고사 봤어요, 아님 수능 봤어요? 선생님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가수가 누구예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파고드는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나 역시도 왜인지는 몰라도 지금껏 내 나이를 아이들에게 말해준 적이 없었다. 물론 어쩌다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내 입으로 나이를 '실토'해본 적은 없었다. 어쩌면 회사를 다니다가 뒤늦게 임용고시를 보고 서른 두 살에 처음 학교에 온 늦깎이 교사의 쓸데없는 소심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결혼도 하지 않았으니 더더욱 나이를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던 것도 같다.

다행히 아이들은 어른의 나이를 잘 알아차리지 못했고(어쩌면 알면서도 모른 체 해주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덕분에 나는 '결혼은 안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젊지는 않은 듯한, 그래도 요즘 트렌드를 꽤나 잘 알고 있는' 선생님으로 20년 가까이 포지셔닝을 해올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 나이가 싫은 건 아니었다. 30대에는 내가 30대여서 너무 좋다고 노래를 불렀고, 40대에는 30대보다 오히려 40대가 더 좋다고, 나이가 들어야 보이는 게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며 감격했다. 지금의 내 나이가 좋았지만,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나이를 밝히고 싶진 않은, 설명하기 힘든 참 이상한 심리였다.  


나이를 굳이 까보이고(?) 싶지 않은 건 SNS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애써 숨긴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블로그나 페북에 굳이 내 나이를 밝힐 생각도 없었다. 특히 최근에는 많이 달라졌지만, 블로그가 한동안 중년들이나 하는 한물 간 SNS 취급을 받아온 터라 나는 그런 '트렌드에 뒤쳐진 중년' 블로거처럼 여겨지는 게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블로그는 '트렌드를 읽는 감각'이 핵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결국 그 '트렌드'가 문제였다.

중년 아줌마는 트렌드 잘 모르고 늘 '라떼는 말이야'만 시전할 거라는 선입견의 대상이 될까봐 학교나 온라인상에서만큼은 굳이 나이를 밝히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막상 이렇게 문장으로 쓰고 보니 참 쓸데없는 이유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난 트렌드에 민감하고, 트렌드를 쫓진 않아도 트렌드를 잘 알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300% ESTP 유형의 인간이니 말이다.  




그러다 드디어 나이의 앞자리가 4에서 5로 바뀌었다. 그것도 만 나이로 5.

나에겐 정말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갱년기가 코앞에 닥쳤고 친구들과 만나면 깔때기처럼 건강 얘기만 하다가 헤어지기 일쑤였다. 1년이 일주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얼굴에서, 눈매에서, 걸음걸이에서, 말투에서, 글에서 나이가 보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듦의 변화를 몸으로 마음으로 시시각각 체감하게 되었다.

고작 나이의 앞자리가 4에서 5로 바뀌었을 뿐인데, 내가 느껴지는 몸과 마음의 변화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비로소 나이듦이 중요한 나이가 된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 달이면 교사에서 장학사로 전직을 하게 되었다. 즉, 더이상 "선생님 몇 살이예요? 결혼하셨어요?"라는 집요한 질문을 받지 않게 되었다. 드디어 나이와 결혼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해방된 셈이다.


그리하여 이제 난 비로소 내 나이를 민낯으로 인정하고, 본격적으로 나의 나이듦을 관찰해보려 한다.

언제일지 알 수 없으나, 어느 날 문득 거짓말처럼 다가올 몸과 마음의 휘청임에 당황하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오늘의 성찰과 감사와 감격을 잘 저축해서 휘청이고 넘어지날이 왔을 때 보험처럼 용하게 잘 사용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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