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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서희 Sep 09. 2023

ESTP 공무원의 의전 적응기


문을 잡아주던 선배 장학사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는 게 스치듯 보였다.

찰나와 같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지금이라도 내 뒤에 오고 있는 상사가 먼저 문을 나서도록 옆으로 비켜서야 하는 걸까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난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문을 나갔다. 뒷통수가 따갑긴 했으나, 그렇다고 일부러 가던 길을 멈추고 옆으로 비켜서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식당 문을 나서는 것뿐인데, 이미 내가 앞에서 가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상사가 먼저 나가도록 옆으로 비켜서기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선배 장학사의 미세하게 굳어진 표정에 잠시 멈칫하긴 했으나, 모르는 척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두고 싶었다.


오래 전, MBTI가 지금처럼 국민 심리검사가 되기 전에 MBTI 강사 자격증을 취득해놓았기에 학교나 교육청 등을 비롯하여 기타 이런저런 모임에서 MBTI 워크숍을 진행할 기회가 종종 있다.

그중에서도 교육청 등의 공무원 조직에서는 유독 ESTP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오히려 비율이 높지 않은, 연예인 기질 ENFP는 있어도 ESTP는 드문 유형 중 하나였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을 원하는 때에 할 수 있는 자유가 가장 중요하고, 충분히 자유로운 상황에서 능력을 가장 잘 발휘하며, 선입견 없이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동료 관계를 선호하는 ESTP가 연공서열과 의전이 중요한 공무원 조직에서 경직성을 깨고 그 속에서 잘 적응하고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정해진 틀을 그대로 따르는 걸 답답해 하고, 국민의례 같은 형식적 절차를 유독 불편해 하며 권위적인 사람에게 비위 맞추는 것에 영 소질이 없는 ESTP에게 공무원은 분명 어울리는 직업이 아니었다.  


같은 교육 공무원이라고 해도 비교적 수평적인 조직인 학교에서는 그나마 괜찮았다.

일단 학교는 의전이랄 게 거의 없고, 교실에서는 내가 원하는 색깔로 아이들과 자유롭게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학교에 부장 교사가 있긴 하지만, 명확한 상하 개념이기보다는 그저 인간적인 존중을 담은 '선배' 정도의 관계 형성이면 충분했다. 교감, 교장 선생님께도 예의를 갖추되 딱히 의전을 갖추어야 할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교육청은 달랐다. 일단 회의가 있을 때는 반드시 '자켓을 포함한' 포멀한 오피스룩을 갖춰 입어야 했다. 상사에게 결재를 받으러 갈 때 사무실용 슬리퍼를 신고 가면 안 되고 반드시 구두를 바꿔 신어야 하고, 차를 탈 때나 식당 테이블에 앉을 때도 상사와 아랫 사람이 앉는 자리가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문을 나서거나 엘베를 탈 때도 상사다 앞서는 건 예의없는 행동이었다. 차로 이동 시에는 현관 바로 앞에 차를 대기시켜놓고 이왕이면 차 문도 열어드려야 예의를 아는 사람이었다. 이외에도 때와 장소마다 지켜야 할 의전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아예 지켜야 할 의전을 모아놓은 '의전 매뉴얼' 책자가 있을 정도이니 이쯤 되면 정기적으로 의전 스터디라도 해야 할 판이다. 론 부서별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의전 깍듯하게 지키는 사람이 칭찬받는 건 어느 부서나 동일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처음에는 이런 의전을 접할 때마다 마음 속에서 수도 없이 '왜?'를 외쳤더랬다.

무슨 이런 구시대적이고 쓸데없는 걸 강요하나 혼자 발끈하곤 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꼰대력 장착한 의전 매뉴얼의 99%는 선뜻 납득되지 않는다. 그나마 지금은 어느 정도 포기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문득 '내가 어쩌다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을까' 싶기도 하다.


덕분에 의전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나도 모르게 촉수를 바짝 세우고 긴장하게 된다. 상대방을 깍듯하게 모시는 데도 영 소질이 없고 누군가가 나를 깍듯하게 대하는 것도 불편한, 300% ESTP로서 몸에 밴 타고난 의전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으니 이 세계에서 개념 없다 지적받지 않으려면 남들 하는 의전을 흉내내며 중간이라도 따라가는 수밖에.


의전 같은 건 없는, 모두가 스스럼없이 편하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공무원 조직이란 과연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의전 매뉴얼 따위는 몰라도 얼마든지 괜찮은 날은 결코 오지 않을까.

물론 어느 조직이나 고유의 문화나 분위기가 있는 법이니 의전의 옳고 그름을 논할 수는 없으며 그럴 일도 아닐 것이다. 또한 모든 공무원이 다 의전을 중요시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ESTP로서는 여간해서 잘 해내기 어려운 분야일 뿐.

사람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면서 자유롭게 유영하고 싶은 ESTP에게 의전은 영원히 풀 수 없는 난이도 최강의 수학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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