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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서희 Oct 19. 2023

간절하지 않기


요즘처럼 이렇게 본캐에만 충실하게 사는 일상이 얼마 만인가 싶다.

돌이켜 보면 난 거의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본캐와 여러 개의 부캐로 살아왔다. 교사라는 본캐 외에 여행책도 계속 썼고 상담심리를 공부하는 학생이기도 했으며, 틈날 때마다 여행 강의도 했고 또 꽤 열심히 활동하는 블로거이기도 했다. 오로지 교사이기만 했던 시간은 지금껏 거의 없었다. 누군가는 교사로서의 사명감이 없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사명감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해왔다. 오직 자녀를 위해 인생을 걸고 올인하는 엄마가 반드시 좋은 엄마인 건 아니듯이 말이다. 워킹맘도 얼마든지 좋은 엄마일 수 있는 것처럼 교사로서도 내가 맡은 업무와 나에게 맡겨진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태도와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러다가 몇 년 전, 박사 논문을 끝내면서 제일 먼저 '학생'이라는 부캐에게 시원섭섭한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19라는 쓰나미를 만나 하늘길이 막히면서 나의 가장 큰 부캐였던 여행책 쓰는 일마저도 잠정 휴업하게 되었다. 서점에서는 아예 해외여행 매대가 사라졌고 여행이 멈추면서 여행 블로거로서 블로그를 하는 재미도 훅 떨어졌다.

결국 모든 부캐가 완료 또는 중단되었고 현재는 본캐 하나만 남았다. 10년이 넘도록 늘 퇴근하고 나면 개정판 원고를 쓰거나 새 책 원고를 쓰거나 논문을 쓰거나 블로그 포스팅을 하느라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달려왔는데, 갑자기 이 모든 게 딱 멈춘 셈이다.

때마침 이 시기에 교사에서 장학사로 전직을 하게 되는 바람에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업무만 아주 열심히 하고 있다. 덕분에 일상이 몹시 단순해졌지만,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문득 허전해지곤 한다. 정신없이 달려온 일상과 오랫동안 함께 해온 부캐들이 그립다.


사실 가치관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지만, 난 살면서 어떤 일이든 그 일에만 올인하고 싶진 않다.

만약 어떤 일에 올인하게 되면 실망할 일도 생기기 마련이고 또 언젠가는 소진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본캐와 부캐가 서로에게 에너지를 주면서 실패에도 실망하지 않도록, 과한 몰입에 소진되지 않도록 서로 팽팽한 균형을 이루며 사는 게 나의 꿈이다.

만약 교사로서의 삶에만 올인하면 내 맘 같지 않은 학생들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아이들의 피드백에도 과도하게 예민해질 것 같았다. 그러다 나이 들어 퇴직하여 문득 인생이 허무해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책 쓰는 일에만 올인하면 책이 잘 팔리지 않거나 독자들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실망하고 좌절할 거 같았고, 블로그에만 올인하면 방문자 수와 덧글에 일희일비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에도 올인하지 않고 본캐에 60%, 나머지 부캐들에 40% 정도의 에너지를 주면서 살고 싶은 게 나의 꿈이다. 굳이 그 부캐가 돈을 벌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물론 돈까지 벌어준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내 삶의 균형을 만들어주는 역할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어떤 일에도 올인하지 않기 위해서, 실패에도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과한 몰입에 소진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에너지 넘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부캐는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 내가 내려놓아야 할 부분도 적지 않다.

그중 하나는 바로 최고가 되려는 욕심. 최선을 다하지 않고 최고가 되고 싶다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니까.

어떤 분야이든 그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과의 오랜 싸움을 거쳐 비로소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한 가지 일에 올인하지 않고 어떤 일이든 90% 정도의 에너지만 쏟음으로써 늘 피할 길을 만들어놓고 싶은 나로서는 최고가 되고 싶은 욕심은 내려놓아야 할 일이다.

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끝내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삶, 여러 분야에서 적당히 최선을 다하면서 스트레스 덜 받고 즐겁게 사는 삶. 둘 중 어떤 삶이 더 가치 있느냐를 따질 순 없다. 그저 타고난 성향대로, 자신의 가치관대로 선택할 뿐, 삶은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다고 믿는다.


무엇이든 간절하지 않기.

이게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욕심내지 않기.

거창한 꿈을 갖기보다는 그만두었을 상황을 고려한 인생 포트폴리오를 만들어두기.

이러한 마음가짐과 준비만 되어 있다면 현재의 스트레스는 충분히 견딜 만해질 것이다.

단, 이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려면 제일 먼저 건강이 담보되어야 할 텐데, 그건 내 의지의 소관이 아니니 이에 대한 마음 면역력도 키워두어야 할 일이다. 설령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예기치 못한 선고를 듣게 되어도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저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단단하게 잡아둘 것.

인생 후반기를 앞둔 나의 소소한 다짐이다.


어느새 “건강검진 받았어?”“요즘 무슨 영양제 먹니?”로 오가는 대화에 익숙해지는 나이가 된 지금, 여전히 20대처럼 또 다른 부캐를 꿈꾸고 있는 내가 가끔은 철없다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게 나인걸.

한 번뿐인 인생, 오늘 하루가 아까워서 매일 새로운 꿈을 꾸는, 못 말리는 나를 내가 아껴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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