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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서희 Feb 25. 2022

저절로 건강염려증

웰 다잉에 대해 진지해지는 나이


"나 유방암이래."


울 듯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두려움과 절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물론 당사자의 두려움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나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 중에 암 환자는 친한 언니였던 그가 처음이었다. 그녀가 항암치료, 수술, 방사선 치료 등 일련의 치료 과정을 거친 뒤 회복해가는 과정, 그리고 서서히 일상으로 복귀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비로소 '건강'이 우리 삶에 미치는 압도적인 영향력에 대해 절감하게 되었다. 나보다 고작 서너 살 많은 언니였고 암 진단 이전에는 더없이 건강했지만, 암 투병을 거치면서 체력은 급격히 저하되었고 그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관점, 자신감, 적극성 등의 크기도 달라졌다.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는 뻔한 얘기가 결코 뻔한 얘기가 아니라는 걸 50세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땐 어르신들이 모이기만 하면 건강 얘기를 하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맨날 나더러 "그 나이가 제일 좋을 때다" 도돌이표처럼 말씀하시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 역시 친구들과 만나면 깔때기처럼 건강 얘기를 하고 있었다. 요즘 무릎이 아프진 않은지, 지난번에 진료받은 건 어떻게 되었는지, 요즘 무슨 영양제를 먹는지, 어느 병원이 좋은지, 건강 얘기만 시작하면 다들 할 말도 많고 궁금한 것도 끝없이 이어진다. 직장에서 20~30대 후배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역시 젊음이 좋다, 참 좋을 때다"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렇게나 이해되지 않았던 어르신들의 행동과 생각을 고스란히 따라가고 있는 셈이다.


지금껏 살면서 대단한 건강 체질까진 아니어도 크게 아픈 적 없었고 입원도, 전신 마취 수술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죽음이란 내 소관이 아니라는 사실은 충분히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게 실제 내 얘기처럼 현실감 있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런데 나이의 앞자리가 5로 바뀌면서 이제는 웰 다잉을 준비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게 실감 나기 시작했다. 유방암 투병을 하는 친구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든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언제부터인가 내 몸이 주는 신호를 예민하게 알아차리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몸이 알려주는 신호는 냉정하리만큼 정확했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건강검진을 받으면 별다른 이상이랄 게 없었는데, 작년부터 하나둘씩 경고 메시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약간의 척추 협착이 시작되었으므로 앞으로 요통이 생길 수 있다는 경고, 뇌혈관이 약간 위축되었으니 내년에 한 번 더 추적검사를 받는 게 좋겠다는 경고, 갱년기가 곧 시작될 테니 골다공증이 생기지 않도록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는 경고, 산부인과 검진은 반드시 1년에 한 번씩 받으라는 경고 등, 심각하진 않으나 이제 하강을 준비하라는 메시지가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이러다가 어느 날 문득 어떤 형태의 '선고'를 받는다고 해도 그저 '올 게 왔구나' 싶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예전보다 내 몸의 변화에 한층 더 촉을 세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건 아마도 죽음 자체가 두려워서라기보다는 병이 주는 고통이, 그로 인해 일상의 균형이 무너지는 상황이 두려워서일 것이다. 행여 병에 걸릴까 봐 안 먹던 영양제도 꼼꼼하게 챙겨서 먹게 되었고 그토록 싫어하던 운동도 열심히 하게 되었으며 삶의 안온함을 유지하고 싶어서 내 몸의 미세한 신호에도 반응하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인터넷에서도 건강과 관련된 뉴스를 눈여겨 읽고 있다. 어디 그뿐일까. 업무가 많아 연달아 늦게까지 야근을 하게 되면 혹시 대상포진이나 몸살감기에 걸리진 않을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틈날 때마다 휴식 시간을 확보하고자 애를 쓴다. 예전에는 도통 이해되지 않았던 건강염려증이 저절로 찾아온 셈이다. 

나도 어느새 건강하지 않으면 세상만사 다 소용없다고 잔소리하는 어르신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비행기를 타면 착륙하기 30분쯤 전부터 "이제 이 비행기는 하강을 시작합니다. 자리로 돌아가 안전벨트를 확인해 주십시오.”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100세 인생이라고 치면 이제 막 하강을 시작한 나이가 되었다. 안전벨트를 제대로 했는지 꼼꼼하게 확인하고 착륙을 준비해야 한다. 내 삶의 비행이 연착륙하기 위해서 이제부터는 서서히 웰 다잉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몸은 예전 같지 않아도 여전히 마음은 20대인지라 아직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에너지도 넘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 삶의 연착륙을 위해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잘 지켜내야 할 일이다. 어느 날 문득 거짓말처럼 선고를 받는 그 날이 예고 없이 찾아올지 모르니 말이다.


삶의 수레바퀴가 어쩜 이토록 신비로울 만큼 정확한 건지, 내 인생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낯선 마음이 매일 매 순간 나를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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