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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람이 Apr 06. 2021

커피 향의 유혹


어떤 말이 나에게 꽂히거나 스며들 때가 있다.

그럴 때 내 발걸음은 일단 커피로 향한다.

네 마음은?

네 생각은?

커피는 나에게 꽂힌 말에 대해 물어준다. 그리고 내 대답을 기다려준다.


 문을 열면 당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나기로 한 그곳 계단을 내려가면서, 또는 올라가면서 나는 커피 향을 먼저 느꼈다. 애틋하고 정겨운 눈빛이 커피 향 뒤에서 빛나고 있을 모습을 떠올리며 설렌 마음으로 문을 열곤 했다. 얘기를 하면서 점점 시간에, 커피에 빠져들고 어느새 헤어지기 싫은 시간과 마주했을 때,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끔 술이 취해 얼큰해질 때,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커피, 음악, 웃음, 날씨들의 기억이 나를 뭉클하게 했다. 그래서 술자리가 끝나고 나면 꼭 커피로 마무리를 하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그 뭉클함에 물들어갔다. 드라마에서처럼 추억을 반복 재생하며, 그 추억을 미화시켜가며 우리는 7년의 긴 연애에 물들어 갔다. 그리고 결혼을 했다.




말하지 못한 침묵을,

내놓지 못한 마음을

들을 줄 아는 귀를 갖고 싶었다.


도시 한가운데서 쓸쓸하고 먹먹한 기분이 들 때, 커피잔을 만지작만지작하며 보고 싶은 사람을 떠올렸. 커피로 마음을 온화하게 데우고, 하고 싶은 말을 떠올렸다. 커피 향에 그리운 얼굴이 어렸다. 그 커피는 이야기의 배경이면서 소품이었다. 그러면 먹먹했던 기분은 익숙한 기분으로 바뀌었다. 그 익숙해진 기분으로 문자나, 통화를 하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잘 되었다. 그렇게 얘기를 끝내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졌다. 


꾸역꾸역 해야 하는 일을 마치고 하루치 고단함을 녹이고 싶을 때도 커피를 찾았다. 물론 술을 찾을 때도 많았지만, 사실 심한 당뇨를 앓고 있어서 술을 마시고 새벽에 저혈당 쇼크로 응급실에 실려갔던 일이 생겼다. 이후로 술은 한 잔 정도그쳤다. 그래서 씁쓸하고 서글픈 일이 생기면 술보다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밤의 깊숙한 시간 속으로, 포근하고 아늑한  불빛 아래서 나를 지켜보아 주기도 했다. 사실 지켜보아 준 것은 커피 컵이었다. 커피는 혼자인 것 같아 렁한 빈자리를 데워주거나, 시원하게 나를 비워주었다.

 모닥불가에서, 강에서, 산에서, 해변가에서 어딘들 커피가 어울리지 않는 곳은 없었다. 꾸역꾸역 하기 싫은 말을 할 때도 커피는 필요했다.





내가 희미해질 때,

불안함과 우울함에 위로가 필요할 때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은 답답함이 있거나,

아무하고도 말하고 싶지 않은 침묵의 여유가 필요할 때도 커피는 한몫했다.

바닥의 순간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뼈마디 틈새로 커피를 뭉개 넣었던 때가 있었다. 순둥순둥 한 남편이 사업실패로 내리막 길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양가 어른들께는 대충 분위기를 전달할 뿐, 제대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내 성격상 내색을 못하였다가 맞겠다.




일단 내 신용으로 대출을 해 이사할 아파트 보증금을 냈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를 학원으로 개조했다. 거실은 학원 학습실, 다른 방은 원장실, 도서관, 웨이팅 룸으로 사용했다. 마지막 방 한 곳에 살림을 욱여넣고 생활을 했다. 중학생이 된 딸의 방은 없었다. 베란다 창고에 앨범들, 액자들, 남은 물건들을 쑤셔 넣었다. 집이 직장이었다. 눈떠서 잠들 때까지 일을 놓지 못했다. 가족들은 내 수업이 끝나는 밤 10시까지 살림방에 있어야 다. 그래서 가능하면 아파트 독서실에 늦게까지 있다가 집에 왔다. 죄인 같다던 남편은 너무나 가족에게 헌신적인 착한 남편이었다. 그렇게 성실함에도 보상이 뒤따르지 않는 현실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처음 3개월은 수업이 끝난 10시 이후로 모자를 푹 쓰고 아파트 술래를 했다. 남편과 나는 초기 학원 학생들을 모으기 위해 현수막과 전단지를 돌렸다.  일단 학생들을 기본이라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알바를 쓸 수 있는 일이었지만 한 푼이 아쉬운 였다. 현수막을 수시로 거둬가서 얼마나 걸려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3개월 동안 꾸준히 우리는 그 일을 했다. 마치 '쇼생크 탈출'을 위해 벽에 망치질하는 듯한 비장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없이, 헐레벌떡 뛰고 나서 일이 끝나면 편의점에 들어갔다. 당시의 수입은 빚 갚기, 학비, 생활비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온전한 소비가 뚝 끊어졌다. 식료품을 제외하고는 모든 소비를 끊었다.

그때 우리의 유일한 사치는 편의점 1000원의 커피였다. 학원 전단지, 현수막을 돌리고 나서 아무 말없이 커피를 사서 편의점 바깥 의자에 앉았다. 1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세상의 모든 논리적인 말에 반박을 하고 싶은 울분의 시간이었다. 번들거리는 명언이나 문자에 중독된 책 의 말들을 거부하고 있던 날들이었다. 가스통에 불이라도 내고 싶은 욕지거리 충동을 참아내고 있는 서로의 눈빛을 외면하기 일쑤였다.

 남편 선배의 배신으로 시작된 사업의 부도는 다시 프로그래머라는 본업으로 돌아서게 했다. 싸울 듯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대신에 학원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의 비수 같은 말, 따박따박 바른 소리를 해대던 30대는 지나왔다. 서로의 속마음을 알지만 어처구니없는 말로 상처주기가 십상이어서 아무 말 없이 커피만 마셨다. 그럴 때의 커피는 어두운 바깥 풍경을 노려보게 했다. 코끝에 맺히는 눈물의 홀짝거리는 소리를 커피 마시는 소리로 뭉갰다. 그 밤의 1000원의 커피는 지금 매일 마시는 카페의 커피는 흉내 낼 수 없는 '달인 음식의 비밀 레시피'의 맛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야성을 길들여 주던 커피는, 밤 10까지의 수업을 홀로 버티게 해주는 에너지 드링크였다. 가끔씩 그렇게 고생하는 것이 다 남편 탓인 듯싶다가도,

너 없으면~

당신만이~

의 남편의 간절하고도 달콤했던 힘으로 난 점점 의연하게 학원을 발전시켜 나갔다.





커피는 아편이었다

세상의 모든 논리적인 말에 욕을 내뱉고 싶은 감정의 맥박이 쿵쿵댈 때,

구겨진 종이 같은 마음이, 번들거리는 명언을 발기발기 찢어 버리고 싶을 만큼 울컥 댈 때,

커피는 갉아먹은 자신에게 뱉은 상처의 말들을 토닥였다. 커피가 땡겼다. 저절로.

혼자 어깨를 들썩이며 울다가도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찬물이라도 마시고 나면 꼭 뜨거운 커피로 나를 달랬다. 컵이라도 깨 먹을 듯이 커피를 들이켜다 내려놓으면,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조용한 침묵이 나를 진정시켰다. 쓰디쓴 커피 맛은 분명 기분 탓이었다. 그랬다. 커피는 기분에 따라 쓰디쓴 맛이기도 달콤한 맛이기도 했다.

마음을 후려치고, 할퀴고, 숨통을 조이는 일이 생기면 일단 스스로에게 냉정하게 생각하기를 강요하게 된다. 그럴 때 나는 냉커피를 큰 맥주잔에 넘칠 정도로 탔다. 커피의 골짜기, 커피의 바닥에 아픈 감정은 담아 두었다. 그리고 차갑게 머리로 결정을 내리려고 애를 썼다. 굶주린 영혼처럼 엄청난 양의 커피를 흡수했다. 그러고 나서 차근차근 나와의 대화를 했다. 생각 읽기, 마음 읽기를 했다. 그러면 나는 새롭게 다시 일을 시작하곤 했다. 마싸(나의 기준에 따라 사는 마이 싸이더 줄임말)의 길로...


 학원은 점점 발전하였다. 딸아이의 대학 유학을 뒷받침할 만큼 넉넉해졌다. 물론 딸이 4년 장학금을 받았고, 알바(번역 알바)도 하는 덕에 우리가 들였던 돈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덕분에 남편 회사도 자리를 잡아 프로그램이 넉넉한 수입이 되었다. 나는 코로나로 학원을 그만두었다. 대신에 남편 회사에 투자한 돈이 잘 굴러가도록 이름뿐인 CEO가 되었다. 

 힘든 삶에서 내가 그 사람의 고통을, 그 사람이 나의 삶의 고통을 함께한 유일한 증인이라는 연대감은 컸다. 세상에서 내 편 한 명으로도 넉넉함을 안겨주는 부부라는 연대는, 힘겨운 삶을  토닥토닥, 쓰담쓰담하며 살 수 있게 했다. 내게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이 세상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지라도, 이 만큼 살아냈으면 됬다는 삶의 기억을 선물했다.


학원을 할 때도, 가족들이 뭔가 큰 성과가 났을 때도, 기쁨을 나누는 나의 특유의 제스처가 있었다. 서로의 엉덩이 옆부분을 퉁퉁 튕기면서 리듬 있게,

You did it! You did it! 빰빰빰빰빰빰빰빰빰(박자 맞춰 엉덩이 5회 튕기게 됨)~~~ 앗싸(하이 파이브)

커피는 현재를 즐기는 카르페디엠의 순간을 극대화시켜 주었다. 유학 다니던 딸이 집에 오는 날은, 딸 친구들이 사준 각 나라의 커피들을 선물로 안겨주곤 했다. 

서로의 꿈을 지켜주기 위해 끙끙 애태웠던 땀 내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커피. 

내 삶의 쓴 맛을 호기롭게 넘기게 해 주었던 커피.

이제는, 삼키고 참았던 지난 얘기를 커피의 웃음으로 건네는 여유가 생겼다.

나는 오늘도 커피 한 잔으로 느린 아침, 여유 한 잔의 시간을 보냈다.


(사진:자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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