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잼인 Oct 09. 2021

"남자 같은" 이름

남자가 아니라 실망한 모두에게

“정재민~”

학교에서 선생님이 출석을 부를 때마다 남자애들 쪽을 보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지겹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었고, 선생님은 “아, 이름 보고 남자인 줄 알았네.”라고 했다. 학년마다, 첫 수업시간마다 같은 상황이 연출됐다. 


“이름을 왜 이렇게 남자같이 지었어?”

어릴 때 엄마에게 투덜대며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는 처음엔 할머니가 작명소에 가서 받아온 이름이라고 답했다. 기가 세서 이름은 뜻이 없어야 한다더라고(내 이름의 한자를 풀어보면 “옥돌이 있다.”라는 뜻밖에 없다). 의문은 풀렸으나, 기가 센 게 도대체 왜 안 좋은 건지 이해할 수는 없었고, 이름을 그렇게 지어서 내가 이렇게 소극적이고 온순한 거 아니냐며 탓했다.


머리가 크고 나서, 엄마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 이름이 남자 같은 건 사실 할머니가 아들을 바라는 마음도 좀 있었기 때문이라고. 아하! 커오면서 “남자 같은” 이름의 여성들은 대부분 그런 비하인드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한 사람의 이름에 다음 사람의 성별을 바라는 염원이 들어간다는 건 기분이 나빴다. 할머니는 손자가 아닌 손녀를 얻게 되어 느낀 실망감을 내 이름에 고스란히 녹여냈으니까. 나와 마찬가지로 딸로 태어난 많은 여성의 이름엔 누군가의 실망이 담겨있다. 


출석부를 체크하는 시기가 지나면 이름 때문에 짜증 날 일은 없겠지 싶었으나, 성인이 되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첫 출근을 하던 날, 선임 팀원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름만 보고 남자인 줄 알았는데...” 순간 그의 표정과 말을 흐리는 것에서 실망감을 읽었다. 밑에 남자 신입직원이 들어올 거고, 힘쓰는 일을 시킬 수 있다는 근거 없는 기대감에 부풀어있던 그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에 맥이 탁 풀린 듯했다. 그의 무례한 반응에 불쾌했지만, 동시에 그런 그를 실망하게 했다는 쾌감도 있었다. 


오프라인 독서 모임에 갔을 때도 매번 이런 일이 있었다. 여성 비율이 높았던 모임이어서 남성 참여자들이 내 이름을 보고 ‘동지가 있구나’하는 안도감을 안고 참석했더랬다. 하지만 와 보니 정재민이라는 사람은 여자였고, 내가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그들의 동공은 흔들렸다.  내 소개가 끝나면 그들은 본인 말고도 남자가 있어서 맘 편하게 왔다며 이 반전에 아쉬움을 표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의 실망감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씩 웃었다.    


제멋대로 나의 성별을 기대하고, 실망하고, 그리고 실망감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에게 화가 나지는 않는다. 다만, 편협한 상상력과 조심성 없는 사회성이 안타까울 뿐... 덕분에 나는 그들에게 메롱 하는 기분을 즐길 수 있지만 말이다. 할머니의 실망에서 탄생한 나의 이름은 누군가에게는 실망감을 주는 이름이 되었고, 그 이름의 주인인 나는 그 실망감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참, 내 뒤로는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내 이름에 담았던 기대는 이뤄지지 않은 거다. 


끝으로, 아들이 태어나지 않아 실망한 할머니와 남자가 아니라 실망한 모든 분들께 고합니다. 메롱!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마동석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