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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인 May 21. 2023

인스타그램이 세상을 망치고 있어

언젠가부터 이자카야나 술집 핫플 메뉴판에 등장하기 시작한 고등어봉초밥에 강력한 불신을 갖고 있다. 화려해 보이는 비주얼만큼의 맛이 나지 않는 메뉴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인스타그래머블"하다. 멋진 접시에 세련된 플레이팅, 초밥 위에 자리 잡은 두툼한 고등어 회를 보면 반사적으로 사진을 찍게 된다. 하지만 정작 맛은 평범하거나 비리다는 것... 실망감에도 불구하고 비주얼은 멋지니까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린다. 이 사진을 보고 또다른 누군가는 ‘고등어봉초밥을 먹어봐야지'라고 생각하겠지. 

*아차차, 맛있게 하는 집의 고등어봉초밥은 정말 맛있다. 이 글에서 말하는 고등어봉초밥은 맛에 대한 노력 없이 그냥 유행의 편승에 올라탄 곳의 것으로 한정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 


세상이 있어 보이는 것으로 넘쳐난다. 인스타그램이 그런 세상을 만들고 있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취약함과 뒤틀림은 꼭꼭 숨겨두고 나의 안목, 취향, 재력을 뽐낸다. 인스타그램 피드 속 사람들은 다 잘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커리어도 빵빵하고, 비싼 식당도 턱턱 가고, 그런데 또 집 인테리어도 멋들어지고. 찬란한 사진들에 현혹되어 그 뒤에 있을 그들의 고민은 애써 들여다보지 않으며, 아무 고민 없이 저렇게 잘살고 있구나하는 열패감 섞인 착각을 하게 된다.


열패감에 빠지는 동시에 너도나도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드러나도록 공들여 찍은 사진과 짤막한 글을 올린다. 열패감으로 인스타그램을 떠나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있어 보이는 것을 꺼내 보이거나 있어 보이는 것을 찾아 바삐 다닌다. 올리고 나서는 들락날락하며 ‘좋아요' 수를 확인한다. 


사용자가 끊임없는 인정 욕구에 휩싸이게 만드는 ‘좋아요'는 페이스북의 개발자인 아담 씨가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돕기 위해 만든 기능이다. 하지만 상호작용이란 본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것 아닌가? 상대의 기분이 어떤지 관찰하며 언행을 조심스레 하고, 상대와의 관계 속도를 맞추기 위해 다가가는 속도를 조절한다. 하지만 게시글을 본지 0.0001초 만에 아무런 고민 없이 누르기 쉬운 하트 모양의 버튼은 이 상호작용의 의미를 완전히 간편한 것으로 바꿔버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좋아요'를 누르게 되는 게시글은 “우와” 소리가 나올 만한 것이 됐다. 좋아 보이는 것, 부러워할 만한 것, 축하할 만한 것, 자랑하고 싶은 것만 올리는 인스타그램의 분위기는 이 ‘좋아요' 버튼으로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인스타그램은 모두를 끊임없이 타인으로부터 관심받고 싶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렸고, 내가 뭘 먹고 입고 갈지 선택하는 것의 기준을 타인의 시선으로 대체해 버렸다. ‘팔로워들이 봤을 때 있어 보이는가?’를 생각하며, 예쁘고 멋진 것이 아니면 굳이 올리지는 않는다. 우리는 분명 다 같이 지옥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데, 인스타그램을 보면 나를 포함한 모두는 너무 그 지옥을 행복하게 살고 있다. 기묘하다. 비록 나는 어젯밤에 바닥으로 꺼지는 우울감에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었지만, 인스타그램엔 저녁에 마신 맥주 사진을 올린다. 


누구의 책임인가. ‘좋아요' 버튼을 만든 사람? 알고리즘 기능을 만든 사람? 서비스가 사용자들의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걸 알면서도 수익을 위해 모른 척한 경영진? 또는 이 서비스를 활발하게 쓰며 함께 거짓된 사회를 만드는 사용자? 판을 짠 그들의 잘못인지, 짜인 판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며 더 견고하게 만들고 있는 우리의 잘못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손쉽게 전자만 비판하고 싶지만, 나 역시 맛없는 고등어봉초밥 사진을 올리는 사용자로서 인스타그램이 세상을 망치는 데 일조하고 있는걸. 


그래서 해결책이 뭐냐고 묻는다면,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인스타그램이 사업을 종료하게 될 일도 없을 것이고, 피곤한 셀프 브랜딩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인스타그램을 떠날 일도 없다. 그럼 인스타그램에 내 우울한 면을 노출시키는 게 나름의 반항인 걸까? 그건 또 전혀 명쾌한 해결책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투덜대는 글을 쓰는 이유는 자각하기 위해서이다. 화려한 포장지로 싸인 피드가 현실이 아니고 각자가 취약한 면들을 의도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것뿐임을. 따라서 자기연민에 빠질 필요가 없음을. 그리고 하나의 서비스가 세상을 이렇게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짜인 판에서 개인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세상을 더 지옥으로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음을.


최근, 나는 매일 스토리 올리던 그림일기를 종료했다. 원래 ‘지금 내가 맞게 살고 있는 건가'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인스타그램을 멀리하는 편이었지만, 매일 업로드하기 위해 접속하며 볼 수밖에 없는 인스타그램 피드가 조금 숨막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 화려한 톤앤매너에 그림일기 내용을 맞추는 것도 그만하고싶었다. 그림 ‘일기'라고는 하지만,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보니, 무기력하거나 우울한 내용은 어느 정도 검열을 했기 때문. 음, 어쩌면 이 글은 그림일기를 종료하기 위해 타당한 이유를 정리해 보고자 쓴 것일지도 모르겠다. 

"힙합은 안 멋져"라고 노래하던 이찬혁 씨를 따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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