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내는 사유의 공간이다
비행기를 타면 이상하게 책이 잘 읽히지 않는다.
나는 병렬 독서를 하는 편이라 어떤 책이 읽고 싶어질지 몰라 여행 초반에는 최소 3-4권의 책을 들고 다녔다. 하지만 나는 비행기에서 책을 5장 넘게 읽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마저도 무엇이라도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온 결과였다.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는데도 머릿속에 남지 않은 적도 있었다.
고요하게 혼자 있는 시간이 아까워서 최대한 활용하고 싶은 마음에 무엇이라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멍하니 있거나 기내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휴대폰도 잘 되지 않고, 방해받지 않으며, 집중하기에 꽤 좋은 환경 같은데 이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멍하니 있는 동안 글감들이 많이 떠올랐다. 비행기 티켓에 생각들을 끄적여 오곤 했는데, 그 후로 나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수첩을 꼭 챙기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집중을 못하는 것은 나의 의지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비행기는 우리를 물리적으로 일상에서 떨어뜨려 놓는다. 통신도 끊겨 있고, 자리도 편하지 않다. 필요한 물자를 바로 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외부 과제에 집중하기 어려운, 멍하니 있는 듯한 이 이상한 상태에서는 뇌의 기본 모드 네트워크(DMN, Default Mode Network)가 활성화되기 쉽다. 이 네트워크는 자기참조적 사고, 자서전적 기억, 마음의 방황, 내적 서사와 관련된다는 점이 신경과학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비행기처럼 외부 개입이 제한되고 할 일이 줄어드는 상황 자체가 내적 성찰에 유리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은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감정 정리가 잘 된다고 단정지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지상에서의 우리의 환경이 내적 성찰에 유리하지 않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생각해보니, 비행기의 환경적 조건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객실 압력은 지상보다 낮아서 해발 약 1,800에서 2,400미터 정도 환경과 비슷하다고 한다. 이 정도만 되어도 사람은 집중력이 약간 떨어지고, 사고 속도가 느려지고, 피로를 조금 더 느끼게 된다. 우리의 뇌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산소와 기압이다. 폐쇄된 공간에서 오래 작업을 하다 보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경험을 누구나 해봤을 것이다. 게다가 기내는 습도가 10~20% 정도로 낮은 편이다. 그래서 눈이 쉽게 건조해지고, 작은 글씨를 읽거나 오랫동안 시선을 고정하는 일이 더 피곤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깊이 몰입해야 하는 독서나 복잡한 이론을 이해하는 작업은 잘 되지 않는다. 긴 서사를 따라가거나, 논리 구조를 정리하거나, 어려운 공부를 하기에는 좋은 환경이 아니다. 대신 생각은 조금 느려지고, 멀리 가고, 오래 머문다. 빠르게 이해하는 대신 천천히 바라보게 된다.
철학적 논증을 기반으로 하는 논리적 글쓰기는 전전두엽의 역할을 많이 필요로 한다.
전전두엽은 여러 정보를 동시에 머리에 유지하는 작업 기억(working memory), 주의 집중과 방해 자극 억제(cognitinve control), 계획 세우기(planning), 선택과 판단(decision making), 충동 억제(inhibition), 추상적 사고(abstract reasoning), 언어 구조 조직(language organization) 같은 기능을 담당한다. 전전두엽은 에너지 소비가 많은 영역이라 피곤하거나 산소나 수면이 부족하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성능이 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뇌가 집중 모드보다는 기본 모드로 들어가기 쉽다.
일기나 단상, 아이디어 메모 같은 글은 연상 네트워크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정교한 글을 쓰는 것은 어렵지만, 좋은 생각의 씨앗은 잘 떠오른다. 문제 해결을 위한 복잡한 고찰이나 시험 공부보다는 짧은 메모, 일기, 에세이 초안, 삶에 대한 성찰 같은 작업이 오히려 더 잘 맞는 환경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작가들이 이동 중에 글을 썼다.
니체는 기차 여행 중에 노트를 많이 썼고, 헤밍웨이도 이동 중에 아이디어를 자주 기록했다. 이동은 생각을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방향을 바꾼다. 집중해서 무언가를 이해하려는 생각이 아니라, 삶을 전체로 바라보는 생각으로 바뀐다.
비행기에서는 잘 되는 것과 잘 안 되는 것이 분명히 나뉜다. 그래서 비행기는 독서 시간이 아니라 사유하는 시간에 가깝다. 많은 작가들이 여행 중에는 긴 글을 완성하기보다 노트에 짧은 문장과 단상들을 기록했다고 한다. 완성된 글은 책상에서 쓰지만, 생각의 재료는 이동 중에 모은다.
우리는 대부분 삶 속에 너무 가까이 붙어 살아간다.
하루하루의 일, 관계, 감정, 선택 속에서 바로 반응하고 바로 판단하며 살아간다.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다. 감정도 크게 느껴지고, 문제도 더 복잡해 보이고, 선택도 더 어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조금 멀어지면 맥락이 보이기 시작한다.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일이 내 인생 전체에서 어떤 의미인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비행기는 우리를 물리적으로 이동시키는 공간이지만, 사실은 시선을 이동시키는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시간이 아니라, 삶에서 잠시 떨어져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래서 비행기에서는 책을 읽지 못했다고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그 시간은 책 한 권을 읽는 시간보다 더 중요한 시간일 수도 있다.
비행기에서는 책 대신 인생을 읽어야 한다.
그 몇 시간 동안 우리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독서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에 대한 독서, 지금까지의 선택에 대한 독서, 관계와 감정에 대한 독서. 그리고 그런 독서를 하고 나면, 비행기가 착륙할 때 우리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