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에서
은퇴 후,
서른 해 동안 잠들어 있던 샘물이 갑자기 솟구쳤다.
손가락이 타닥이는 소리에 잠이 깨면,
창밖에는 아직 달이 걸려 있는데 키보드엔
이미 밤새 쏟아진 단어들이 굳어 있었다.
의사 선생의 말이 귓전을 스친다.
"시야가 흐릿한 것은 백내장도 있고, 안구건조증도 심하고..."
높은 도수 안경 너머로 보이는 화면 속 문자들이 물결치듯 흐릿해질 때면,
나도 모르게 손목을 잡는다.
이 흐트러진 초점이 과연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일까,
아니면 생의 마지막 필름이 서서히 감겨가는 신호일까.
어릴 적 시골 마을에서 본 장마철 개천을 떠올린다.
오랜 가뭄 끝에 터진 하늘은 길었던 갈증을 한꺼번에 푸는 듯했고,
메마른 땅은 홍수를 삼키지 못해 허우적거렸다.
지금 내 머릿속은 그때의 개천과 닮았다.
삼십 년간 눌러왔던 문장들이 갑작스레 제방을 무너뜨리니,
10개의 손가락 개수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양이다.
새벽 두 시에 번개처럼 스치는 문장을 놓칠세라
침대맡에 수첩을 놓았더니,
아내가 약을 먹듯 하루에 열두 번씩 펜 뚜껑을
여닫는 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병원 복도에서 안과 검진표를 접으며 깨달았다.
이제 내 눈물은 종이 위에 잉크 대신 소금기만 남긴다는 사실을.
젊은 의사가 컴퓨터로 안구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글자보다 푸른 하늘을 더 많이 보셔야 합니다."
돌아 가는 길에 참새 소리가 컴퓨터 자판 소리처럼 들렸다.
문득 궁금해졌다.
새들은 왜 노래를 멈추지 않을까?
목이 터져 출혈할지라도 계속 지저귀는 건지.
서재 책장에 꽂힌 미완성 원고들이 날 바라보는 눈빛이 익숙하다.
스무 살 때 버렸던 시집 초고의 표정이다.
그날 나는 강물에 시를 띄워 보냈고,
강은 종이배를 삼키며 웃었다.
"때가 되면 돌아올 걸세."
반세기 만에 그 예언이 현실이 되었다.
이제는 내가 종이 배가 되어 강물에 휩쓸리는 입장이 되었으니,
인생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지난주 모임에서 한 선배가 속삭였다.
"독서와 글쓰기는 눈에는 죽음이야."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새벽 서재에서 심장이 두근거릴 때마다,
나는 죽음의 강을 건너는 뗏목을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의사의 경고가 또다시 찾아온다.
"그 뗏목이 당신의 마지막 호흡을 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등산을 했다.
산정에 서니 구름이 한 줄기 시(詩)처럼 흘러갔다.
발아래로 펼쳐진 도시의 네모난 창문들이 마치 원고지 같았다.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문장을 써 내려가고 있겠지.
나무 의자에 앉아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려다 멈춘 손가락이,
잠시 바람을 쥐고 있었다.
이 순간을 글로 옮기지 않아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어리석은 생각이 들 때서야 비로소,
나는 휴식이라는 것을 맛보는구나 싶었다.
서가에 꽂힌 그 책이 마치 오래된 묘비처럼 보였다.
젊은 날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같기도 했다.
"쓰라. 하지만 살아라."
이제 사계절이 바뀌는 소리를 들어야 할 때다.
봄의 싹이 여름의 열매로,
가을의 낙엽이 겨울의 휴면으로 이어지는 그 자연스러운 리듬을.
키보드 위에 놓인 손가락이 저절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한다.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이 손이 붓이 될지,
아니면 단순히 바람을 만지는 도구가 될지.
다만 알겠다.
비록 내가 절필을 선언한다 한들,
강물은 계속 흐르리라는 것을.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된다.
창가에 앉아 퇴고를 하던 어느 날,
화면 위에 맺힌 안개를 발견했다.
건조증으로 인한 눈물 대신 스크린에 맺힌 수증기.
그것이 나의 새 문체일까?
의사 선생의 말을 거스르며 계속 글을 쓴다면,
언젠간 이 안갯속에서 새로운 별이 탄생하리라.
아니면 그전에 안개가 나를 삼켜버릴지도.
그 불확실성의 아름다움을,
나는 아직 버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