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으로
은퇴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아침,
책상 위 핸드폰이 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유리창을 스치는 빗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손바닥만 한 기계는 여전히 화면을 밝히고 있었지만,
그 안엔 새 메시지 알림 하나 없이 시계만이
냉정하게 숫자를 세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이 작은 장치는 울지 않는 '캔디폰'이 되어 있었다.
과거를 증명하듯 구석에 쌓인 명함첩처럼.
1,000개의 숫자, 1,000개의 삶
한때 내 전화번호부는 영업사원의 그것을 뛰어넘는
1,000여 개의 번호로 가득했다.
새벽 회의실에서 주고받은 명함,
술자리에서 허우적대며 저장한 번호,
못하는 외국어를 하며 주고 받던 명함들...
잠깐의 인연마저 아쉬움에 담아두었던 습관.
각각의 숫자엔 그때의 온도가 스민다.
출근길 메트로놈처럼 규칙적으로 울리던 아침 인사,
프로젝트가 틀어질 때마다 조언을 구하던 목소리,
밤샘 작업 시 건네던 배달 연락처...
그 소란스러운 숫자들은
내가 열심히 살아낸 시간들의 초침 소리였다.
하지만 세월이 숫자 위에 먼지를 앉히기 시작했다.
몇 해가 지나도 울리지 않는 번호들,
생일 축하 문자조차 사라진 이름들.
처음엔 아련한 추억으로 여겼던 공백이
어느덧 무거운 부담이 되어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어느 날, 특별한 이유 없이 전화번호들을 삭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지금까지 그토록 열심히 살아왔던 나는
왜 이 번호들을 계속 품고 있어야 할까?
연락도 없고,
하지도 않는 전화번호를 갖고 있을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방치된, 쓰이지 않는 숫자들을 계속 간직하는 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나는 굳게 마음을 먹고
그들을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 결심을 실천하기까지는
몇 날 며칠이 걸렸다.
이 번호를 지워도 되는지,
저 번호를 지워도 되는지…
기준을 정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처음에는 감정에 휘둘려서 하나하나를 살펴보며,
'이 사람은 나에게 중요한 사람일까?' 하고 고민했다.
하지만 그 기준을 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친구, 동료, 친척, 지인들…
그 모든 사람들이 나의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에 대해
나는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었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자연스럽게
내 삶에 들어와 있었고,
지금도 그 자리에 존재하는 듯한 사람들.
죽음으로 삶을 가르다
"지우는 기준“
업무 관계? 친밀도? 빈도수? 차단할 명분을 찾는 것이
오히려 잔인하게 느껴졌다.
며칠을 두고 고민하던 어느 날,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분은 생전에 유서 대신 부고장 받을 명단을 정리하셨다.
죽음의 문턱에서야 비로소 삶의 본질이 보인다는 것을.
나는 반대편에서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내가 죽으면 이 사람에게 부고장을 보낼 것인가?“
그 순간 숫자들의 무게가 확 달라졌다.
업무적 호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진한 술자리 웃음도 기억 너머로 희미해졌다.
오직 아픔을 함께 나눌 용기,
침묵으로 편안히 걸을 수 있는 신뢰,
내 장례식에서 그래도 눈물 한방물이라도 흘려줄 얼굴들만이 남았다.
숫자 너머의 인간들
삭제 버튼을 누를 때마다
과거의 내가 조각처럼 흩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진짜 현재가 선명해졌다.
1,000개가 37개로 줄어든 오늘,
나는 묘한 자유를 느꼈다.
남은 숫자들 각각이 이제는 사람 그 자체로 다가왔다.
전화기를 들면 들려오는 "오랜만이네"보다
먼저 흐르는 말없는 호흡,
간절히 기다리던 목소리가 아닌 예측 가능한 안부.
캔디폰은 여전히 조용하다.
하지만 가끔 울리는 진동 소리는
이제 내 심장 박동과 맞닿아 있다.
죽음을 기준으로 삼았지만,
오히려 남은 인연들이 더 생생하게 살아나는 아이러니.
숫자 정리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관계의 무게가 아니라 깊이였다.
남은 37개의 이름 옆엔 이제 전화번호 대신
'그 사람'을 기록하려 한다.
번호표가 아닌 마음의 주소지를 찾아가는 여정.
캔디폰의 침묵 속에서야 비로소 들리는 진짜 목소리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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