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피라미드는 고대의 외침이다.
척박한 대지가 낳은 기하학적 절규.
독일 미학자 보링거의 말처럼,
자연이 주는 공포에 떨던 이집트인들은
텅 빈 공간에 거대한 점을 찍어 두려움을 가둬버렸다.
이 **‘추상 충동’은 인간이 불안을 정복하기 위해
붓 대신 자를 들게 만드는 비밀스러운 본능이다.
그로부터 5천 년, 서양 미술사는
마네의 사실주의를 거쳐 인상파의 빛의 향연을 지나
마침내 칸딘스키의 물감 폭발을 맞이한다.
1912년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에서 그는 선언했다.
“추상은 정신의 순수한 언어다.”
그의 캔버스는 악보처럼 해체된 색채의 교향곡이었다.
무의식이 스스로 노래하는 오토메이션 스킬처럼.
그러나 이상하다.
역사 속 추상미술의 꽃핀 시기를 따라가면,
어김없이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칸딘스키의 환상적 선율이 터져 나온 1910년대는
1차 대전의 포성이 메아리치던 시대다.
전쟁이 자연과 문명을 파괴하자,
화가들은 붓을 돌려 내면의 지진을 기록했다.
마치 상처 입은 영혼이 거울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해부하는 외과 수술처럼.
더 깊은 상흔 위에서 피어난 추상표현주의는 더욱 뚜렷했다.
1940년대 말, 2차 대전의 재 속에서 잭슨 폴록(1912~1956)은
마루에 펼친 캔버스 위로 물감을 내리쏟았다.
그의 드리핑은 포탄 낙하의 추적이었을까?
마크 로스코의 울혈 같은 색면은 전우의 피를 닮았을까.
그들은 거대한 화면을 피란처 삼아 치유를 꿈꿨다.
하지만 폴록은 차량 전복으로,
로스코는 손목을 그어 생을 마감했다.
캔버스가 삼키지 못한 고통이었다.
철학은 이미 예고했다.
쇼펜하우어가 “모든 예술은 음악을 동경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재현을 초월한 순수 정신의 영역을 가리켰다.
헤겔의 ‘절대정신’, 니체가 ‘물 자체(物自体)’라 부른 것.
추상미술은 형태를 분해해 이데아에 다가가려는 몸부림이었다.
전쟁이 그 몸부림에 박자를 더했다.
총칼이 산산이 부순 현실의 파편 속에서
예술가들은 붓을 들고 유토피아를 그렸다.
그러나 그 유토피아는 환상이 아니라 비명이었다.
로스코의 어두운 적색은 상처의 응고였고,
바넷 뉴먼(1905~1970)의 그림은 고독한 심연을 가르는 빛줄기였다.
미니멀리즘은 달랐다.
“당신이 보는 것이 전부”라고 선언한 프랭크 스텔라는
물감이 발라진 평면 그 이상을 부정했다.
도널드 저드의 반짝이는 금속 상자는
차가운 기하학의 승리를 외쳤다.
그런데 저드와 동료 댄 플래빈은 한국전쟁 참전 용사였다.
스텔라의 단순함 속에 전우의 넋이 스민 걸까?
형광등으로 차갑게 빛나는 플래빈의 작품이
참호의 망막을 스치는 섬광을 재현한 건 아닐까.
미니멀리즘이 표방한 무표정(無表情)은,
트라우마를 냉동시키려는 의식적 침묵처럼 느껴진다.
그들이 ‘아무것도 아님’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그 ‘아무것도’가 가리키는 공허의 무게는 더욱 짙어진다.
추상미술은 인류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찾아오는 주문(呪文)이다.
첫 번째 주문은 사막의 공포를 피라미드로 봉인했고,
두 번째 주문은 전쟁의 포성을 칸딘스키의 색채 음악으로 변환했으며,
세 번째 주문은 핵의 그림자 아래서 폴록이 물감 폭죽으로 맞섰다.
그리고 미니멀리즘은 모든 의미를 소독해
백색의 무구(無垢)로 돌아가라 속삭였다.
피라미드의 돌무더기에서 저드의 금속 상자까지,
추상은 항상 재앙과 함께 호흡해왔다.
마치 지구가 깊은 상처를 입을 때마다
내부에서 피어나는 결정체처럼.
그것은 인간이 혼돈에 질서를,
공포에 기하학을,
고통에 색채를 부여하는 본능적 의식이다.
추상미술이 가장 찬란할 때,
그 뒤엔 언제나 문명의 어둠이 깔려 있었다.
캔버스의 무지개는 인류 정신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두려움을 형상으로 승화시키는, 가장 인간적인 저항의 몸짓.
** 추상충동: 보링거는 미술을 닮고 싶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설명하는데,
닮고 싶은 것을 감정 이입 충동이라고 하고 그렇지 것을 추상 충동이라고 했다.
이 두 가지를 예술 의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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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등 세계적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가 광주에서 열린다고 하네요.
오는 7월 18일부터 10월 9일까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창조원 복합 6관에서
'뉴욕의 거장들: 잭슨 폴록과 마크 로스코의 친구들' 특별전을 개최.
https://youtu.be/6MajoqYO0o0?si=pjjaq28dXMIStY-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