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으로
모처럼 만난 오랜 친구의 모습이 낯설게 반짝였다.
평소 소탈함을 자랑하던 그가 유난히 차려입었고,
옷깃까지 반듯하게 정돈한 모습에서
무언가 특별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곤 웃음. 눈가에 깊이 패인 주름살 위로,
오래간만에 본 진한 기쁨이 맺힌 이슬처럼 반짝였다.
궁금증이 가슴을 콕 찔렀다.
"야, 무슨 좋은 일 있어? 얼굴에 꽃이 피었네."
"아, 그냥… 요즘 연애 좀 해."
그의 대답은 가볍고도 당당했다.
그 ‘당당함’이 오히려 의외였다.
"에이, 그 나이에 무슨 연애야? 주책 떨지 마라."
어깨를 탁 치며 툭 내뱉은 내 말에는 친근한 놀림과 함께,
솔직히 말해 약간의 경계심도 스며 있었다.
우리 나이,
이 시기에 불쑥 찾아온 ‘연애’라는 단어가 도리어 불안하게 느껴졌다.
마치 익숙한 평온을 깨는 이질적인 소음처럼.
"뭐가 어때서? 나, 요즘 왠지 모르게 20대 감성이 살아나더라.
가슴이 두근두근해."
그는 도리어 의기양양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손가락으로 가슴을 탁탁 두드리는 제스처가 어색하면서도 진지했다.
‘20대 감성?’ 마음 한켠에서 차가운 냉소가 스쳤다.
젊음의 감성,
그 뜨거운 설렘이란 건 분명 젊은 피가 끓어오르는 몸에만 깃드는 법이다.
마른 고목에 꽃이 필 수는 있으나,
그 꽃은 여름 내내 화려한 수선화보다 훨씬 빨리 시들고 만다.
아무리 화려해도 그 향기는 어딘가 허전하고
덧없기 마련이란 게 나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문득 국어 시간에 달달 외웠던
민태원의 <청춘예찬>이 머릿속을 스쳤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큰 배의 기관같이 힘 있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 격정적이고 화려한 수사들은
마치 청춘을 생물학적 젊음에만 속박된,
일시적으로 타오르다 사라지는 순간적 광휘로 규정하는 듯했다.
나는 그 문장들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며,
청춘이란 곧 육체의 정점과 피의 끓음이며,
그것은 연륜이라는 이름의 장벽 앞에 필연적으로
굴복하고 만다고 굳게 믿어왔다.
그러나 그날, 친구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그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 깊숙이,
그 익숙한 눈가 주름 너머로,
의심의 여지없는 ‘설레임’이 고스란히 비쳐 나오고 있었다.
그건 마치 늦가을 숲속에서 만난 노란 은행잎 같았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줄기에서도,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반짝이는 새 잎들.
그 생명의 신호는 결코 가볍거나 덧없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추위와 바람을 온몸으로 겪어낸 나무가
내뿜는 강인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청춘예찬>의 격정적인 외피에만 매료되어
그 본질을 오해하고 있지 않았는지.
민태원이 진정 찬미한 것은 단순히 젊은 육체의 뜨거운 피가 아니라,
그 피가 상징하는 ‘생명에 대한 끝없는 열정과
충만한 감수성’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끓는 피’는 하나의 강렬한 비유였을 뿐,
진정한 청춘의 핵심은 ‘가슴이 뛰는 감정,
세상에 대한 호기심,
새로운 가능성 앞에서 느끼는 순수한 설렘’ 에 있다는 것을.
친구의 ‘20대 감성’ 발언은 허세나 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사랑이라는 빛을 만나,
오랜 잠에 들었던 감각들이 하나둘 깨어나고,
마치 오래된 악기에 생기가 돌아가듯 영혼에 전율이 흐르는 경험이었다.
나이 든 몸속에서 피가 예전처럼 용솟음치지 않을지 몰라도,
마음의 고동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힘차게 울릴 수 있다.
그 두근거림, 그 기대,
그 순간순간의 깨달음과 기쁨이야말로 ‘청춘’이라는
불멸의 불꽃을 지피는 근원이었다.
가을 공원의 그 고목나무를 유심히 보라.
거친 껍질과 울퉁불퉁한 몸통은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봄이 오면,
그 거친 틈새로부터 여전히 연한 새 잎들이 고개를 내민다.
그 잎들은 어린 나무의 화사함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수많은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난 생명력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다.
오히려 그 인고의 시간을 견뎌낸 강인함에서 우러나오는
새싹은 더욱 깊은 울림과 감동을 준다.
그것은 순간의 화려함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의 지속성을 증명하는 위대한 신호다.
나는 청춘의 정의를 다시 써본다.
청춘이란 결코 특정 연령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청춘이란,
나이 테두리 너머,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생생한 설레임’이다.
첫사랑의 가슴 뛰는 두근거림도,
중년에 맞닥뜨린 새로운 도전 앞의 짜릿한 긴장감도,
노년에 찾아온 뜻밖의 작은 기쁨에 대한 감사한 마음도,
모두 이 ‘설레임’이라는 거대한 강의 지류들이다.
그 설레임이 존재하는 한,
비록 피가 예전처럼 끓지 않을지라도,
심장은 여전히 젊음의 리듬으로 세계와 호흡하며,
세상은 끝없이 새롭고 신비롭게 다가온다.
친구의 반짝이는 눈빛을 마주하며,
나는 조용한 부끄러움에 사로잡혔다.
‘고목의 꽃은 덧없다’는 내 편견이 오히려 얼마나 편협하고 주책이었는지.
그 꽃이 단 하루,
단 한 순간만 핀다 해도,
그 순간 그가 느끼는 설렘과 기쁨이야말로 ‘살아 있음’
그 자체를 온전히 체험하는 가장 순수한 청춘의 순간임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그래, 우리는 나이를 먹을 뿐, 영원히 젊을 수도 있다. 설레임이 있는 한.’
떨어져가는 낙엽 사이로 스며드는 따스한 가을 햇살 아래,
친구의 얼굴은 고목에서 힘차게 뻗어난 새 가지처럼 푸르고 당당했다.
그 모습은 생명의 봄이 단지 계절의 전유물이 아니라,
마음속에 불씨를 지닌 이에게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음을,
고요히 그러나 확고하게 선언하고 있었다.
그 설레임이 지속하는 한, 모든 계절은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
청춘,
나는 지금 청춘일까.
https://youtu.be/LKj5UgIG_58?si=kR9fLkQqDBVYoYB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