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로 남기다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1.jpg



금속이 마주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고요한 아침을 가른다.

그는 갑옷의 끈을 꽉 매고, 어깨받이를 고정한다.

각진 금속판들이 하나씩 그의 몸을 감싸며,

평범한 남편은 사라지고 전장으로 향할 기사가 드러난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새벽빛이 갑옷의 차가운 표면을 스치며 반짝인다.


그 곁에 서 있는 그녀.

손에는 연필 한 자루,

무릎 위에는 스케치북 한 권.

그녀는 그를 마주 보지 않는다.

대신, 창문에 비껴 비친 그의 그림자를 따라가듯 부드럽게 연필을 움직인다.

부슬비가 창유리를 타고 흐르듯,

선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의 윤곽을 그려낸다.

어깨의 날카로운 각도, 투구의 곡선,

허리에 찬 검의 길쭉한 실루엣.

그 그림자는 그이되, 그가 아니다.



1.jpg The Shadow, 그림자, 1909



왜 하필 그림자일까?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번 길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마주 보고 그의 얼굴을 그려내는 일은,

그 생생함이 영원한 이별의 증거가 될 것 같아 차마 할 수 없었다.


그 선명한 눈빛, 익숙한 주름살,

미소의 각도 하나하나를 캔버스에 새기는 것은,

그가 돌아오지 못할 때마다 영원히 되새겨야 할 상처를 각인하는 것 같았다.

그릴 용기가 없었다.

그 생생한 현실이 주는 고통이 두려웠다.



2.jpg



그림자는 완벽한 해답이었다.

그의 모습을 담으면서도,

언제든 빛이 바뀌면 사라질 수 있는 덧없음.

희미하고, 불완전하고, 실체가 아닌 어떤 것.

그것은 그녀의 마음과 꼭 맞았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가 가져올 막연한 공포와 그리움을,

가장 은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매개체.

너무 선명한 것은 더 아프니까.

그림자 속에 남편의 형상을 담으면,

그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 덧없음이 애도(哀悼)의 문턱을

넘어설 만큼 견딜 수 없게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잃음에 대비하는 그녀의 지혜였다.


에드먼드 블레어 레이튼(1852~1922)의 붓은 이 침묵의 드라마를 포착했다.

낭만주의 화가답게 그는 전쟁의 포화 속이 아니라,

전장으로 떠나기 직전의 고요한 내밀한 순간에 사랑의 본질을 담았다.

갑옷의 차가운 금속과 부드러운 스케치의 대비,

마주보지 못하는 두 사람의 시선,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운 창문 너머의 그림자.

이 모든 것이 애절함을 외치지 않고 속삭이게 한다.

사랑하는 이가 떠나야 할 때,

남겨진 이의 마음은 이토록 조용히,

이토록 깊게 갈라진다.


그의 그림자는 스케치북 위에 영원히 남았다.

선명한 얼굴이 아닌,

희미한 윤곽으로.

그녀가 기억하고 남긴 것은 그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가 존재했던 공간,

그가 비쳤던 빛,

그가 그녀의 삶에 드리웠던 깊은 그늘이었다.


사랑하는 이가 떠나야 할 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남기려 할까?

완벽한 초상화일까, 아니면 마음에 스민 그림자일까.


때로는 선명함보다 희미함이,

실체보다 덧없음이,

영원한 이별 앞에서 더 큰 위로가 되는 법이다.

그것은 잃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빈자리를 견딜 수 있도록 하는 마음의 호흡법이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사라져도,

그를 비추던 빛의 각도는 영원히 마음에 새겨지니까.



3.jpg God Speed, 화이팅 또는 이기고 돌아오세요, 1900


레이턴은 정교한 장인이었으며,

매우 완성도 높고 장식적인 역사적 그림을 제작했다.

이는 주로 기사도와 중세 의상을 입은 여성을 묘사한

낭만주의 그림으로 대중적 호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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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live/LpRZi_cOSOI?si=ip3fIXvQkDisx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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