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그가 태어난 피츠버그의 이민자 가정 부엌에는
체코식 감자 수프 냄새가 스며들었을 것이다.
병약해 침대에 누운 소년 앤디는 캔벨 수프와 만화책,
영화 잡지 속 이미지들로 세상과 대화했다.
그 소박한 일상의 오브제들이 훗날 예술사를 뒤흔든
폭발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피츠버그에서 뉴욕으로,
상업 일러스트레이터에서 팝아트의 아이콘으로,
워홀의 여정은 예술의 정의 자체를 공장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놓는 혁명이었다.
"더 팩토리" 라는 이름이 암시하듯,
그의 스튜디오는 전통적인 아틀리에가 아닌 예술 생산 공장이었다.
은박지로 뒤덮인 공간에서 실크스크린 기계가 쉼 없이 돌아갔다.
마릴린 먼로의 얼굴,
달러 지폐,
전기 의자의 이미지가 무한 복제되며 쌓여갔다.
여기서 워홀은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화가가 아닌 "기계의 확장" 이 되었다.
"예술가를 기계로 대체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그의 선언은
순수 예술의 신성함을 정면으로 겨눈 선전포고였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 공장이 예술가, 마약중독자, 록스타,
사회적 낙오자들이 뒤섞인 초(超)민주적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워홀은 그들의 '오염된' 에너지를 창작 연료로 삼으며
"예술은 누구나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는 선언을 몸소 실천했다.
그의 비즈니스 전략은 냉소적이면서도 혁신적이었다.
재스퍼 존스와 리히텐슈타인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깨달은
"일상의 신성화" - 캠벨 수프 캔 32점을 마트 진열대처럼 전시한
1962년 LA 개인전은 미술계에 핵폭탄을 떨어뜨렸다.
엘리트 예술이 경멸하던 소비문화의 상징이 갤러리 벽을 장악한 순간이었다.
그는 유명인의 초상화를 대량으로 제작해 팔고(돈 받고 그렸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프로듀서가 되고, 광고 모델로 출연했다.
"돈 버는 것 자체가 가장 위대한 예술이다"
라는 선언은 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뿜어낸 예술 선언문이었다.
수백억 원의 경매 낙찰가를 기록하는 그의 작품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희소성'이 아닌 '대량성'으로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천재성은 모순을 포용하는 능력에 있었다.
장 미셸 바스키아와의 협업에서 드러나듯,
워홀은 완고한 개인주의자이면서도 공동 창작의 매개자였다.
캔버스에 자신의 팝 아이콘을 스크린하면 바스키아의 거친 낙서가 덧입혀졌다.
예술적 에고를 내려놓은 이 '무계획적 대화'에서 새로운 미학이 탄생했다.
또한 그는 대중을 향한 예술을 외치면서도 냉소적 거리를 유지했다.
유명인사들의 초상화에 은박지 배경을 사용한 것은
그들을 아이콘으로 격상시키면서도 동시에
일회성 소비품으로 전락시키는 이중적 장치였다.
"모든 것은 15분 동안 유명해진다" 는
그의 유명한 말은 현대 사회의 허망한 유명세를 꿰뚫으면서도,
그 15분의 빛을 영원히 캔버스에 가두는 예술가의 욕망을 배반했다.
피츠버그의 병약한 소년이 뉴욕의 예술 제국을 건설한 여정은
본질적으로 "경계 허물기" 의 연속이었다.
예술과 상업, 고급과 저급, 작가성과 무명성-
그가 허문 경계마다 논란은 뒤따랐지만,
미술 시장은 그 모순들을 '워홀 브랜드'라는 하나의 가치로 재편했다.
오늘날 인스타그램 속 무한 복제되는 이미지,
유튜버의 자기 상품화,
NFT의 대량 생산적 예술성을 보면,
우리는 모두 워홀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지 않은지 의문이 든다.
캔벨 수프 캔 속에는 여전히 질문이 담겨 있다:
예술이 대중의 것이 되어야 한다면,
대중은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그 '대중'을 향한 예술가의 시선은 사랑인가, 냉소인가?
워홀의 은박지 조각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반짝이며 흐릿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