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를 그리다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조선 중기,

왕실의 한 종친이 붓을 들어 대나무를 그렸다.

탄은(灘隱) 이정(1554∼1636). 그의 호 '탄은'은 여울에 은거한다는 뜻으로,

왕족의 신분이면서도 세속의 명리를 멀리하고자 했던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왕실 종친이라는 지위가 오히려 정치적 활동에 제약이 되던 시대,

이정은 시와 서예, 그림이라는 예술 세계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이정은 시·서·화 삼절(三絶)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묵죽화에서 그의 진가가 드러났다.

대나무는 사군자의 하나로,

곧은 절개와 굽히지 않는 지조를 상징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가장 사랑한 소재였지만,

그 중에서도 이정의 대나무는 남달랐다.

그는 유덕장, 신위와 함께 조선시대 묵죽화 3대가로 꼽힐 만큼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이정, 풍죽도, 17세기 초


이정의 대나무는 바람을 머금고 있다.

고요히 서 있는 대나무가 아니라, 바람에 흔들리며 생동하는 대나무다.

그의 대표작 '풍죽도(風竹圖)'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먹의 농담과 붓의 강약으로 표현된 대나무 잎들은 마치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정적인 화면 속에서 동적인 기운을 포착해낸 것이다.

이는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대나무의 본성을 깊이 관찰하고 이해한 예술가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이정 필 삼청첩 (李霆 筆 三淸帖)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정치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던 이정에게,

대나무는 어쩌면 자신의 처지를 투영하는 매개체였을지 모른다.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는 대나무처럼,

그는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의 예술 세계를 지켜냈다.

그의 작품에는 왕족의 품격과 은일자의 정신이 조화롭게 녹아 있다.


오늘날 이정의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 간송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등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의 '풍죽도'가 오만 원권 지폐 후면에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신사임당의 초충도와 함께 배치된 이정의 대나무는,

매일 우리 손에서 오가며 조선 묵죽화의 정수를 전하고 있다.


탄은 이정. 그는 왕실 종친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예술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를 통해 자신의 정신을 표현하고,

그 정신은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다.


33333.jpg 이정의 '삼청첩'에 포함된 달 아래 매화도 '월매

** 이정은 임진왜란 때 왜적에 칼을 맞은 후, 부상에서 회복되자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고 무너진 조선의 자존과 사기를 북돋우고자 1594년 삼청첩을 완성했다. 이정이 그린 매 죽 난에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최립, 한호, 차천로가 글을 더했다. 병자호란 때 소실될 위기를 겪었고, 19세기 일제 침탈을 겪으며 일본으로 반출되기도 했다. 1935년 간송 전형필이 수집해 한국으로 돌아왔고 2015년 전면 수리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https://youtu.be/8BabV0J55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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