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풍경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가을이면 나는 유난히 그림이 그리워진다.

낙엽 밟는 소리에도,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에도,

어디선가 그림 한 점이 떠오르곤 한다.

어쩌면 우리의 가을은 누군가의 붓끝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의 화가들이 그려낸 가을 풍경 앞에 서면,

나는 단순한 계절이 아닌 우리 민족의 정서와 역사가 스며든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이인성의 가을은 축제처럼 화려하다.

1934년 어느 가을날,

그는 푸른 하늘 아래 서 있는 여인을 그렸다.

강렬한 원색들이 화폭을 가득 채운 그 그림 속에서 가을은 마치 폭죽처럼 터져 나온다.

푸른 하늘과 붉은 대지, 그 사이에 선 여인의 적갈색 피부와 주변을 둘러싼 노란빛 식물들.

그것은 고갱의 타히티가 아니라 조선의 들판이었고,

모델은 이국의 여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동생이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 그림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여인의 차림새가 조선적이지 않다고, 이것이 과연 우리의 가을인가 하고 물었다.

그 질문 속에는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었다.

이인성은 서양의 기법으로 조선의 가을을 그리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의 가을은 찬란하면서도 어딘가 슬픈 빛을 띠게 되었다.


1592258954594.jpg 이인성, 〈가을 어느 날〉, 1934


이인성-경주의_산곡에서(1935)캔버스에_유채,_삼성미술관_리움.jpg 이인성-경주의_산곡에서(1935)


오지호의 가을은 다르다.

그의 붓끝에서 피어난 가을은 따스하고 고요하다.

옅은 갈색과 노란색으로 물든 산자락, 맑은 파란 하늘,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초가집들.


1953년의 어느 가을날을 담은 그 그림에는 전쟁이

끝난 뒤의 안도감과 처연함이 함께 묻어난다.

오지호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빨치산에게 납치되는 고초를 겪었고,

돌아와 고향 광주에 작은 집을 지어 다시 붓을 들었다.


그가 그린 가을 풍경에는 폐허 속에서도 돌아오는 계절의 순환이 있었고,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예술가의 눈이 있었다.

빛과 색채의 화가로 불렸던 그는 유럽의 인상주의를 그대로 가져오지 않았다.

조선의 밝은 태양 아래서 산란하는 색채를, 우리 산천의 빛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담아냈다.


20251025_065231.jpg 오지호, 추경, 1953



333.jpg 오지호, 추경, 1982


김종학의 가을은 또 다른 울림을 준다.

그의 화폭 속에서 가을은 멈춰있지 않고 움직인다.

폭포가 흐르고, 덩굴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고, 덤불이 바람에 흔들린다.

김종학의 많은 작업에서처럼 폭포, 덩굴, 덤불이 등장한다.

이 세 소재가 함께 등장하거나, 혹은 하나 둘만 등장하기도 한다.

그 들 작품은 설악산의 같은 장소에서 그려졌고,

가을뿐만 아니라 봄, 여름, 겨울에서도 이 장소는 자주 출몰한다.

실제로, 그가 선호하는 실제 장소를 재현했을 수도,

맘에 드는 여러 구도를 종합해서 만든 구도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장소, 시간, 초목들의 이치와 섭리를 깨닫고 그의 방식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20251025_065921.jpg 김종학, 추경, 2015


408609_414154_5016.jpg 김종학, Untitled, 2017


이들의 가을은 각기 다르지만, 그 안에는 공통된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계절의 풍경을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역사와 개인의 삶이 겹쳐진 시간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인성의 화려한 원색 속에는 식민지 예술가의 정체성 고민이,

오지호의 따스한 빛 속에는 전쟁의 상흔과 극복의 의지가,

김종학의 역동적인 에너지 속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자연에 대한 철학이 녹아있다.


서양의 화가들이 가을의 빛과 색을 객관적으로 관찰했다면,

한국의 화가들은 가을에 자신의 삶을 투영했다.

그들은 서양의 기법을 배웠지만, 그것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조선의 햇살로, 우리 산천의 빛깔로, 우리만의 정서로 가을을 다시 그려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의 그림 앞에 설 때,

우리는 낯선 이국의 풍경이 아닌, 어딘가 익숙하고 그리운 우리의 가을을 만나게 된다.


요즘도 나는 가을이면 미술관을 찾는다.

그리고 그 오래된 그림들 앞에서 생각한다.

저 화가들이 겪었던 시대의 아픔과 고뇌,

그럼에도 놓지 않았던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을.

그들이 남긴 가을은 이제 우리의 기억이 되었고, 우리의 정서가 되었다.

미술관을 나서 가을바람을 맞으면, 나는 문득 깨닫는다.

우리가 보는 가을은 그저 자연의 계절이 아니라,

누군가의 붓끝에서 완성된, 예술이 된 시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위로를 받으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박광진, 불국사의 가을, 1978.jpg 박광진, 불국사의 가을, 1978


https://youtu.be/6941gTPifi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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