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봄비가 내리던 도시에서는 모든 불빛이 조금씩 젖어 있었다.
간판의 가장자리는 물기를 머금은 채 번졌고, 횡단보도 위의 흰 줄은 막 지워진 기억처럼 흐릿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우산을 쓰고 바쁜 방향으로 걸어갔지만, 비에 젖은 도시는 늘 그렇듯 누군가의 상실을 오래 숨기지 못했다. 길모퉁이의 편의점 유리창에도, 버스 정류장 광고판에도, 검은 택시 창문에도, 지나간 사랑이 문득 비칠 것 같은 저녁이었다.
그녀를 처음 본 것은 4월의 둘째 주 수요일, 종로와 을지로 사이 어딘가에 있는 아주 오래된 건물의 3층 카페에서였다. 이름이 없는 카페였다. 정확히는 이름이 있었지만, 간판의 글자 몇 개가 떨어져 나가서 누구도 그 이름을 온전히 읽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모퉁이 카페”라고 불렀다. 창문이 넓고, 오래된 나무 테이블들이 제각기 다른 상처를 가지고 있었으며, 에스프레소 머신 옆에는 언제나 젖은 우산들이 기대어 서 있는 곳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이준이었다. 서른여섯. 도시의 조감도를 그리는 회사에서 일했다. 개발계획서에 들어갈 조감도, 아직 존재하지 않는 아파트와 공원과 도로를 컴퓨터 화면 안에서 먼저 완성시키는 일이 그의 일이었다. 그는 늘 남보다 먼저 미래의 도시를 보았다. 그러나 그 미래에는 한 번도 자기 자신의 삶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날도 준은 도면 파일을 들고 거래처에 가기 전, 잠깐 비를 피하려고 카페에 들어갔다. 셔츠 어깨가 젖어 있었고, 구두 끝은 어두운 물빛을 띠었다. 카페 안은 따뜻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마음이 더 추워지는 걸 느꼈다. 봄이 오면 사람들은 덜 외로워질 거라고들 말하지만, 사실 봄은 겨울 동안 얼어 있던 감정들을 다시 녹여서 더 아프게 만드는 계절이었다.
그녀는 창가 맨 안쪽 자리에서 원고지를 펼쳐두고 있었다. 요즘엔 거의 쓰지 않는 원고지였다. 휴대전화나 노트북 대신 검은 만년필로 느리게 문장을 적고 있었고, 그녀의 손목 가까이에는 식어가는 커피가 놓여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종이 위에 작은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준은 그녀를 오래 보지 않으려 했다. 낯선 사람을 오래 바라보는 습관은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 시선이 갔다. 그녀가 예뻐서가 아니었다. 아니, 물론 예뻤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녀에게 어떤 “늦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제 시간보다 조금 빠르거나 조금 늦은 표정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마치 이미 모든 것이 지나가버린 뒤에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의 얼굴 같았다. 누군가를 잃고 난 후, 세상의 속도에서 영영 이탈해 버린 사람처럼.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을 때, 준은 아메리카노를 시키려다가 이상하게도 그녀가 마시고 있는 것과 같은 메뉴를 물었다.
“그분이 드시는 건 뭐예요?”
직원은 잠시 그녀를 돌아보더니 대답했다.
“오늘의 블렌드요. 산미 좀 있어요.”
“그걸로 주세요.”
커피가 나올 때까지 준은 창문 바깥만 보았다. 비는 가늘었고, 사람들은 우산 끝으로 저마다의 기분을 숨긴 채 지나갔다. 그때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산미 있는 커피 안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준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원고지 위에 펜을 올려둔 채 웃고 있었다. 웃음은 얇았지만 이상하게 친절했다.
“티 났나요?”
“조금요.”
“그럼 바꿔야 하나요.”
“아니요. 한 번쯤은 어울리지 않는 걸 마셔보는 것도 괜찮잖아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한 번쯤은 어울리지 않는 걸 마셔보는 것.
준은 그때 이미 알았어야 했다. 어떤 사랑은 바로 그런 식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애초부터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향해, 이상할 만큼 자연스럽게 끌려가는 방식으로.
그녀의 이름은 서인아였다. 서른둘. 출판사에서 에세이 원고를 교정하는 프리랜서라고 했다. “먹고살기 위해 남의 문장을 고치고, 살기 싫어지지 않으려고 내 문장을 쓴다”라고,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 말도 가벼운 농담처럼 들렸지만, 준은 농담 뒤에 숨어 있는 어두운 부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날 두 사람은 40분 정도 함께 있었다. 처음에는 커피 맛 얘기, 그다음에는 비 오는 날의 냄새, 어느 동네의 오래된 극장, 사라진 골목과 재개발로 없어진 식당들. 특별할 것 없는 대화였다. 그런데 대화가 끝날 즈음에는 이상하게도 서로의 오랜 침묵까지 조금씩 들여다본 기분이 들었다.
인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먼저 갈게요.”
“네.”
“다음에도 비 오면 여기 올 것 같아요.”
준은 그 말을 듣고도 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우산을 펴고 계단을 내려갔고, 창문 너머로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준은 오래 앉아 있었다. 다시 만날 약속도, 연락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묘하게 확신했다. 봄비는 자주 내리고, 도시는 생각보다 사람을 좁게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을.
그 후로 준은 비가 오는 날마다 그 카페에 갔다. 일이 있든 없든, 일부러라도 갔다. 첫 주에는 한 번, 그다음 주에는 두 번. 카페 창가에 앉아 산미 있는 커피를 마셨다. 산미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것에 몸을 맡기는 일이 어쩌면 사랑의 연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 번째 비 오는 날, 그녀는 정말 다시 왔다.
그날은 저녁이 조금 더 어두웠다. 빗소리가 창문을 더 촘촘히 두드렸고, 거리의 네온은 물에 젖은 붓으로 그린 그림처럼 흔들렸다. 인아는 젖은 우산을 접으며 카페 안으로 들어왔고, 준을 보자 아주 잠깐 멈췄다가 조용히 웃었다.
“정말 계시네요.”
“정말 오셨네요.”
그날부터 두 사람은 비 오는 날마다 만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비가 오지 않아도 가끔 만났지만, 둘 다 비 오는 날의 만남을 더 좋아했다. 맑은 날의 도시에서는 사람들의 얼굴이 너무 선명하게 드러났고, 관계들도 지나치게 분명해졌다. 하지만 비가 내리는 날에는 모든 것이 조금 흐려졌다. 흐려진다는 것은 때로 허락받는다는 뜻이었다. 분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단정하지 않아도 되는 감정.
그들은 퇴근 후 광화문 뒤편의 오래된 골목을 걸었고, 청계천 근처 포장마차에서 국물을 나눠 마셨다. 종로 3가의 낡은 극장에서 재개봉 영화를 봤고, 을지로 인쇄골목의 작은 바에서 말없이 음악을 들었다. 인아는 손톱 끝으로 컵 표면에 맺힌 물기를 훑는 버릇이 있었고, 준은 상대가 말을 끝낼 때까지 절대 끼어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둘은 서로의 습관을 천천히 알아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거대한 고백보다도 그런 사소한 습관들에 익숙해지는 일인지도 몰랐다.
인아는 종종 자기 이야기를 하다가 중간에 멈췄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예전에 같이 살던 사람이 있었어요. 아, 아니… 됐어요.”
혹은,
“나는 원래 여름을 좋아했는데, 어느 해부터는 봄이 더 무서워졌어요. 왜냐하면…”
그리고는 말을 바꿨다. 준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누구나 아직 발설할 수 없는 이야기 몇 개쯤은 품고 사는 법이었다. 준 자신도 그랬다. 그는 3년 전에 약혼이 깨졌다.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다. 상대는 지쳤고, 그는 무뎠다. 사랑이 끝나는 대부분의 이유가 그렇듯, 어느 한쪽의 중대한 잘못 보다 작은 실망들이 오래 쌓인 결과였다. 그는 그 일을 누구에게도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 후로 사람을 만나는 일은 번거롭고 피곤한 것이 되었다. 잠깐의 웃음보다 오래 남는 공허가 더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아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많았다. 그녀는 묻지 않았고, 준도 다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는 자꾸만 깊어지는 침묵이 있었다. 불편한 침묵이 아니라, 말보다 오래 버티는 침묵.
어느 저녁, 비가 유난히 세게 내리던 날이었다. 두 사람은 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 앉아 있다가 결국 같은 방향의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는 젖은 옷 냄새와 히터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창문은 김이 서려 바깥 풍경이 뿌옇게 번졌다.
인아가 말했다.
“이런 날엔 도시가 물속에 잠긴 것 같아요.”
“그러네요.”
“사람들도 다 잠수해서 사는 것 같고.”
“그럼 우리는 지금 물고기인가요?”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이 가라앉기도 전에, 아주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니면 익사 직전이거나.”
준은 그 말을 듣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버스 조명이 그녀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추고 있었다. 말은 농담 같았지만 표정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그녀 안에 자신이 짐작한 것보다 더 깊고 어두운 물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버스가 인아의 정류장에 멈췄다. 그녀는 내리기 전에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우리, 오늘 조금 더 걸을래요?”
그들은 비를 맞으며 한강 쪽으로 걸었다. 우산 하나를 같이 썼지만, 바람이 세서 둘 다 많이 젖었다. 강변 산책로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멀리 다리 아래로 차들이 지나가고, 물 위에는 비의 파문이 끝없이 겹쳐졌다. 도시 전체가 말없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인아가 갑자기 물었다.
“사람이 자기를 제일 망치는 게 뭔지 알아요?”
준은 잠시 생각했다.
“미련?”
“희망.”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희망이 있으면 자꾸 버티게 되잖아요. 이쯤이면 끝내야 한다는 걸 알아도, 조금만 더 가보자고, 내일은 다를지도 모른다고, 계속 자기한테 거짓말하게 되고.”
“꼭 그런 것만은 아니죠.”
“아니에요. 어떤 사람들한텐 그래요.”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뺨에 붙어 있었다. 준은 그걸 떼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대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인아는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강물과 빗소리 사이에서 그 침묵은 아주 얇게 떨렸다. 한참 뒤 그녀가 말했다.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어요. 아주 많이.”
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오래 아팠어요. 몸이 아니라 마음이. 처음엔 내가 옆에 있으면 괜찮아질 줄 알았어요. 다들 그렇게 착각하잖아요. 사랑하면 구할 수 있다고.”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 이미 너무 여러 번 혼자 되뇌어본 이야기의 리듬이었다.
“그 사람은 자꾸 무너졌고, 나는 자꾸 붙잡았어요. 병원도 같이 가고, 약도 챙기고, 새벽마다 전화받고, 달려가고, 같이 울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그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같이 가라앉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준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결국 그 사람은 떠났어요?”
인아는 고개를 저었다.
“죽었어요.”
그 말은 빗소리보다 조용했지만, 이상하게도 도시 전체가 한순간 멎는 것처럼 들렸다.
“미안해요.”
“미안할 건 없어요. 벌써 2년 전 일이니까.”
하지만 2년이라는 말은 거짓처럼 들렸다. 상실은 달력으로 낡지 않는 법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떠난 날의 계절을 평생 몸에 남긴다. 봄에 잃은 사람은 봄마다 다시 상실하고, 비 오는 날 떠난 사람은 모든 빗소리에서 마지막 숨을 듣는다.
인아가 다시 말했다.
“그 사람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계속 문자가 올 것 같았어요. 습관처럼 폰을 보게 되고. 가끔은 정말 와 있기를 바라기도 했고요. 그게 얼마나 끔찍한지 알아요? 이미 없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오길 바라는 거.”
준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위로란 늘 뒤늦고 엉뚱하다. 그래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그녀와 같은 속도로 걸었다. 그날 둘은 헤어질 때까지 손도 잡지 않았다. 그런데 준은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자신이 이미 너무 늦게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아직 떠난 사람의 계절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후로 두 사람의 만남은 더 조심스러워졌다. 가까워진 만큼 더 멀어지기도 했다. 인아는 때때로 며칠씩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새벽, “자요?” 같은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준이 “아니요”라고 답하면, 그녀는 대개 “다행이다”라고만 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밤이 몇 번 있었다.
준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고백이 아니라 압박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그녀가 좋아하는 시집을 기억했고, 카페에 먼저 가서 창가 자리를 잡아두었고, 비 오는 날 그녀의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인아는 그런 준의 조용한 다정을 모르는 척하지 않았다. 다만 받아들이기를 늘 망설였다.
6월이 가까워질수록 비는 더 자주 내렸다. 도시의 나무들은 진한 초록으로 젖어 있었고, 저녁 공기에는 흙냄새가 섞였다. 어느 날 인아의 집 앞 골목에서, 준은 처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주 자연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녀가 발밑의 물웅덩이를 피하려다 잠깐 비틀렸고, 준이 손목을 붙잡았고, 그녀가 그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손을 잡은 채 잠시 서 있었다. 멀리 편의점 냉장고 소리, 전깃줄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차가 물을 가르며 지나가는 소리. 도시의 밤은 늘 사소한 소음들로 가득했지만, 그 순간 준의 귀에는 그녀의 숨소리만 들렸다.
“인아 씨.”
“네.”
“나, 당신 좋아해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젖은 속눈썹이 떨렸다.
“알아요.”
“부담 주려는 건 아니에요.”
“그것도 알아요.”
“그냥, 말하고 싶었어요.”
인아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젖어 있었지만 울고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오래 울어서 이제는 쉽게 울 수 없는 사람의 눈 같았다.
“준 씨.”
“네.”
“나는… 사람을 다시 사랑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왜요?”
그녀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마치 그 이유가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고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또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도 잃게 될 것 같아서요.”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잖아요.”
“알아요. 머리로는 알아요. 그런데 몸이 안 믿어요.”
그 말이 무엇인지 준은 어렴풋이 이해했다. 상처는 생각보다 육체적이다. 한 번 크게 다친 사람은, 비슷한 발소리만 들어도 먼저 몸이 긴장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이성이 아니라 근육과 호흡과 맥박이 먼저 기억한다.
“그래도,” 준이 말했다. “그래도 사람은 살아야 하잖아요.”
인아가 쓸쓸하게 웃었다.
“살고 있잖아요. 이렇게.”
그 웃음 속에 얼마나 많은 체념이 들어 있는지, 준은 그날 처음 알았다.
그 후로 그들은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상태로 여름의 문턱까지 걸어갔다.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새벽에 전화하고, 비 오면 만났다. 그러나 서로의 관계를 어떤 이름으로도 부르지 않았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부서질 것 같은 것들이 세상에는 있다. 그들은 그 사실을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러던 6월의 마지막 주, 비가 며칠째 그치지 않던 밤이었다. 준은 야근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오다가 인아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숨은 이상하게 가빴다.
“준 씨…”
“무슨 일이에요?”
“미안한데… 지금 올 수 있어요?”
주소도 묻지 않았다. 이미 몇 번 데려다준 적이 있어 알고 있었다. 준은 택시를 잡아타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오래된 빌라 4층, 복도에 형광등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거실은 어두웠고, 창문은 열려 있었다. 비 냄새가 가득 들어와 있었다. 인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방 안에는 오래된 사진들과 상자들이 흩어져 있었고, 작은 액자 하나가 깨져 있었다.
“왜 그래요?”
그녀는 준을 보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소리 없는 울음이었다. 몸만 크게 흔들렸다. 준은 잠시 망설이다 그녀 앞에 앉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오늘이 그 사람 생일이에요.”
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괜찮을 줄 알았어요. 2년이나 지났으니까. 근데 아니더라고요. 아침부터 계속 이상했어요. 편집하던 원고 문장도 하나도 안 들어오고, 거리에서 누가 비슷한 뒷모습만 보여도 숨이 막히고. 그래서 그냥 잤다가 일어나면 나을 줄 알았는데…”
인아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진이랑 편지랑 다 버리려고. 근데 하나도 못 버리겠는 거예요.”
준은 흩어진 사진들 사이를 보았다. 젊은 남자와 인아가 웃고 있었다. 바다 앞에서, 병실에서, 겨울 골목에서. 사진 속 두 사람은 서로를 아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너무 선명해서 잔인할 정도였다.
그 순간 준은 자신이 질투를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죽은 사람에게 질투한다는 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돌아오지 않을 사람, 이미 시간 밖으로 사라진 사람에게 살아 있는 자신이 지고 있다는 사실. 그는 그 감정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억누를 수 없었다.
인아가 흐느끼며 말했다.
“나 너무 나쁜 사람 같아요.”
“왜요?”
“그 사람을 아직 이렇게 붙잡고 있으면서, 준 씨한테 자꾸 기대잖아요.”
준은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사람이 꼭 하나의 마음만 가져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니요. 그래야 해요. 적어도 누군가를 덜 망치려면.”
“내가 망가질지 아닐지는 내가 정해요.”
그 말이 조금 강하게 나갔는지, 인아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준은 그제야 자기가 참아온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기다림. 이해하려는 노력. 그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결심. 그 모든 것 밑에 깔려 있던 절망이 문득 올라오고 있었다.
“나도 알아요,” 준이 낮게 말했다. “당신이 아직 거기 있다는 거. 나를 완전히 볼 수 없다는 것도 알고.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시간이 지나면 조금은 바뀔 수 있을 거라고. 근데…”
“준 씨…”
“나는 계속 살아 있는 사람인데, 자꾸 죽은 사람과 같이 비교되고 있어요. 당신 안에서.”
말해놓고 나니 잔인했다. 인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미안해요.”
준은 곧바로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어떤 문장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관계의 결을 영영 바꿔버린다.
인아는 한참 말이 없었다. 빗소리만 창문 밖에서 커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아주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맞아요.”
준은 숨을 멈췄다.
“나는 아직 거기에 있어요. 그리고 아마 오래 못 나올 거예요. 준 씨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어도.”
그 말은 공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정직해서 더 아팠다.
“그래서 더 미안해요. 내가 준 씨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닌데…”
그녀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닌데.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보다 더 잔인한 문장일 때가 있다. 가능성을 남겨두는 척하면서, 사실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 말.
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너무 무거워 견딜 수 없었다.
“오늘은 가볼게요.”
“준 씨.”
“괜찮아요.”
하지만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준은 현관문을 열고 나가다가 잠시 멈췄다. 뒤돌아보면 안 될 것 같았다. 뒤돌아보는 순간 다시 그녀 곁으로 가서 안아줄 것 같았고, 그러면 더 깊이 망가질 것 같았다. 그래서 끝내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왔다.
밖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이 있었지만 펴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비를 맞으며 큰길까지 걸었다. 신호등의 붉은 불빛이 물 위에 길게 흔들렸고, 지나가는 차들은 낮고 거친 물소리를 냈다. 그 도시 한복판에서 준은 처음으로 아주 명확하게 알았다. 사랑이 사람을 살리는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때로 사랑은 이미 끝난 사랑의 폐허 앞에서 무릎 꿇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그 후 두 사람은 한동안 만나지 않았다.
준은 카페에 가지 않았다. 비가 와도 가지 않았다. 핸드폰을 몇 번이나 들여다봤지만 연락하지 않았다. 인아에게서도 아무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 도시는 비를 끝내고 본격적인 여름으로 들어갔다. 습한 공기, 늦은 해, 쉽게 짜증이 나는 사람들. 준은 평소보다 더 오래 일했고, 집에 돌아오면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누워 잠들었다. 가끔 새벽에 깨면, 자신이 아직도 그녀의 이름을 속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8월 초, 태풍이 북상한다는 예보가 있던 날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인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잘 지내요?
너무 짧고 무심해서, 오히려 오래 바라보게 되는 문장이었다. 준은 한참 뒤에 답했다.
응. 인아 씨는요.
한참 후 답이 왔다.
나도.
거짓말 같았지만, 준은 그 거짓말을 굳이 들추지 않았다.
그날 이후 다시 가끔 연락이 이어졌다. 날씨 이야기, 본 영화 이야기, 누가 새로 낸 시집이 좋았다는 이야기.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문장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 조심스러움 자체가 이미 이전과 다르다는 증거였다. 상처 입은 사람들은 서로를 만지지 않고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가을이 오기 전, 준은 회사를 그만두었다. 더 큰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와서 옮기게 된 것이기도 했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매일 똑같은 도시의 조감도를 그리는 일이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늘 아직 없는 건물을 만들고 있었고, 자신의 인생은 여전히 무너진 자리 위에 멈춰 있었다. 사람은 가끔 환경을 바꾸는 척하면서 사실은 슬픔에서 도망친다. 준도 그랬다.
새 회사는 성수동에 있었다. 한강과 더 가까웠고, 건물은 유리로 반짝였고, 사람들은 더 젊고 더 빨랐다. 그러나 어디로 옮겨도 도시의 비는 비슷한 냄새로 내렸다. 9월의 어느 날, 퇴근 무렵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준은 건물 로비에 서서 빗줄기를 보다가 문득 인아 생각을 했다. 아주 오랜만에, 견딜 만한 아픔으로.
그날 밤 인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준 씨.”
그녀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차분했다.
“네.”
“지금 혹시 시간 있어요?”
준은 바로 대답했다.
“있어요.”
“그 카페로 와줄래요?”
모퉁이 카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간판은 더 낡았고, 계단 벽지는 조금 뜯겨 있었고, 창문은 비에 젖어 있었다. 준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인아는 처음 봤던 바로 그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원고지는 없었고, 앞에는 커피 대신 맥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예전보다 조금 마른 것 같았다. 그러나 얼굴은 이상할 만큼 맑았다. 오래 울고 난 뒤의 맑음, 혹은 오랫동안 앓던 열이 조금 내린 뒤의 맑음 같은 것.
“오랜만이에요.”
“그러게요.”
준이 앉자 그녀는 한참 동안 잔 가장자리만 만졌다. 카페 안에서는 오래된 재즈가 흐르고 있었고, 빗소리는 창문 바깥에서 낮게 번졌다.
“할 말이 있어요.” 인아가 먼저 말했다.
준은 조용히 기다렸다.
“나, 떠나기로 했어요.”
“어디로요?”
“부산.”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출판사 아는 분이 작은 독립서점 겸 작업실을 같이 해보자고 했어요. 바닷가 쪽에. 계속 고민했는데… 가보려고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한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 목이 막혔다.
“잘됐네요.”
“응. 아마 잘된 거겠죠.”
그녀는 웃었지만, 그 웃음엔 여전히 흔들림이 있었다.
“서울에 있으면 자꾸 같은 길만 걷게 되더라고요. 같은 카페, 같은 정류장, 같은 병원 근처. 기억이 너무 많아서 숨이 막혀요.”
준은 이해했다. 도시는 사람을 붙잡는 방식으로 상처를 보존한다. 누군가와 함께 걷던 길은, 헤어진 뒤에도 길 자체로 남아 매번 같은 통증을 재생한다.
“언제 가요?”
“다음 달.”
생각보다 빨랐다.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했다. 카페 안에서는 다른 테이블의 웃음소리가 잠깐 흘렀다가 사라졌다. 누군가는 사랑을 시작하고, 누군가는 끝낸다. 같은 공간에서도 사람들의 계절은 모두 다르다.
인아가 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날, 미안했어요.”
준은 금방 무슨 날인지 알았다. 사진이 흩어져 있던 밤.
“나도 미안했어요.”
“아니에요. 준 씨 말이 맞았어요. 나는 죽은 사람한테 너무 오래 붙들려 있었어요.”
“그건 붙들린 거지, 붙잡은 건 아니겠죠.”
“둘 다였을 거예요.”
그녀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사실은, 준 씨를 사랑할 수도 있었어요.”
준은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오히려 숨이 막혔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사랑할 수도 있었다는 말이 더 사람을 깊이 찢었다. 가능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 인생은 언제나 실제보다 가능성 때문에 더 오래 아프다.
“근데 무서웠어요. 또 누군가를 잃을까 봐. 아니, 그것보다… 내가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들킬까 봐.”
준은 웃으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이미 들켰잖아요.”
“그러네요.”
인아도 웃었다. 둘 다 슬픈데 웃고 있었다.
“부산 가기 전에 한 번은 꼭 보고 싶었어요. 그냥, 도망가듯 사라지고 싶지 않아서.”
“잘 왔어요.”
“그리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뭘요.”
“내가 제일 추울 때 옆에 있어줘서.”
준은 창밖을 보았다. 빗물이 유리창을 따라 미끄러지고 있었다. 봄에 시작된 비가 가을 문턱에서도 여전히 같은 소리로 내리고 있었다. 계절은 바뀌어도, 어떤 감정은 비슷한 모양으로 되돌아온다.
“인아 씨.”
“네.”
“거기 가서는 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움직임 속에 수많은 실패와 다짐이 겹쳐 있는 것 같았다.
카페를 나온 뒤 두 사람은 천천히 골목을 걸었다. 비는 약해졌고, 공기는 서늘했다. 계절이 바뀌는 밤의 냄새가 났다. 교차로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인아가 문득 말했다.
“준 씨는 언젠가 좋은 사람 만날 거예요.”
준은 웃었다.
“그런 말은 보통 떠나는 사람이 하죠.”
“알아요.”
“위로가 잘 안 되는 것도.”
“알아요.”
잠시 후 신호가 바뀌었다. 사람들은 우산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도시의 밤은 여전히 분주했고, 아무도 그들 쪽을 보지 않았다. 상실은 늘 군중 속에서 더 선명해진다.
인아가 발걸음을 멈췄다.
“나 한 번만 안아줘요.”
준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어깨는 가늘고 차가웠다. 그러나 그 안에 아주 오래 버텨온 피로가 느껴졌다. 인아도 조용히 그를 안았다. 둘은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사랑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포옹이었다. 너무 늦게 도착한 위로, 혹은 너무 일찍 끝나버린 미래 같은 것.
그녀가 먼저 몸을 떼었다.
“잘 가요, 준 씨.”
“인아 씨도.”
그녀는 돌아서서 걸어갔다. 우산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준은 그녀가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붙잡고 싶지 않았다. 붙잡는다고 붙잡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사랑의 형태로 잠시 머물다가, 결국 자기의 어두운 계절 속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은 그 짧은 체온만 오래 기억한다.
인아가 떠난 뒤, 준은 한동안 다시 그 카페에 가지 않았다.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이 왔다. 도시의 나무들은 앙상해졌고, 강바람은 차가워졌다. 그는 새 회사에 적응했고, 주말이면 가끔 혼자 전시를 보러 다녔다. 삶은 이상하게도 계속되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계속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웃어야 했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남는다. 상실을 극복해서가 아니라, 상실을 품은 채 일상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그해 겨울 끝자락, 부산에서 엽서 한 장이 왔다.
앞면에는 비 오는 바다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뒷면에는 인아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여긴 바다에도 비가 내려요.
이상하게 서울보다 덜 외로워요.
아직 잘 지내는 법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금씩 배우고 있어요.
그때 말 못 한 게 있는데, 봄비가 내리던 날의 준 씨 얼굴을 나는 오래 기억할 것 같아요.
누군가를 구하지 못해도, 잠시 따뜻하게 해 줄 수는 있다는 걸 당신에게 배웠어요.
건강해요.
그게 전부였다. 주소도, 다시 보자는 말도 없었다. 준은 그 엽서를 한참 손에 들고 있었다. 바다에도 비가 내려요. 그 짧은 문장 안에 그녀의 여전히 끝나지 않은 슬픔과, 그래도 계속 살아보겠다는 희미한 의지가 함께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봄이 왔다.
도시는 언제나 그랬듯 아무 일 없다는 듯 꽃을 피웠다. 벚꽃은 몇 번의 바람에 무너졌고, 미세한 먼지와 햇빛과 사람들로 거리가 부풀었다. 어느 저녁, 퇴근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주 가는 봄비였다. 준은 문득 별생각 없이 그 카페 쪽으로 걸었다. 거의 1년 만이었다.
카페는 여전했다. 낡은 간판, 삐걱거리는 계단, 젖은 우산 냄새. 창가 자리는 비어 있었다. 준은 그 자리에 앉아 산미 있는 커피를 주문했다. 처음 그녀를 따라 시켰던 그 커피였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한 맛이었다. 사람은 결국 어울리지 않던 것에도 익숙해진다. 사랑도, 상실도, 혼자 남는 일도 그렇게 몸에 스며든다.
창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어떤 연인은 우산 하나를 같이 썼고, 어떤 사람은 급히 택시를 잡았다. 어떤 여자는 젖은 가방을 품에 안고 뛰어갔다. 도시는 여전히 수많은 사랑과 이별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준은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작년 봄보다 조금 더 지쳐 보였고, 조금 더 단단해 보이기도 했다. 상처는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상한 결을 만든다. 완전히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깨진 모양대로 다른 빛을 품게 되는 것.
그는 엽서를 떠올렸다. 바다에도 비가 내린다는 문장, 그리고 누군가를 구하지 못해도 잠시 따뜻하게 해 줄 수는 있다는 말.
그 순간 준은 비로소 알았다. 자신이 인아를 끝내 갖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었다는 것을. 어떤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만 끝나는 게 아니라, 끝내 구원하지 못했어도 서로의 가장 어두운 계절에 잠시 불을 켜주었다는 기억으로 남는다. 그 기억은 사람을 완전히 살리진 못하지만, 아주 나쁜 밤에 한 번쯤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게 해준다.
비는 조금 더 굵어졌다. 카페 안에는 늦은 손님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누군가는 젖은 어깨를 털고, 누군가는 전화로 다정한 거짓말을 하고, 누군가는 혼자 앉아 창밖을 봤다. 준은 식어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산미가 혀끝에 남았다. 예전 같으면 어색했을 맛이 이제는 어쩐지 정확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엽서를 꺼내 다시 한번 읽었다. 글씨는 조금 번져 있었다. 아마 몇 번이나 꺼내봤던 탓일 것이다. 준은 엽서를 접어 다시 넣고, 한참 창밖을 바라보았다.
봄비가 내리는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잠시 흐려진다. 불빛도, 얼굴도, 마음도. 그러나 흐려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것들은 선명할 때보다 흐릴 때 더 오래 남는다. 잡히지 못한 손의 감각, 끝내 다 하지 못한 말, 사랑할 수도 있었던 사람의 뒷모습. 그런 것들은 비가 그친 뒤에도 오래 마르지 않는다.
준은 카페를 나설 때 우산을 폈다. 비는 여전히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길 위의 물웅덩이에는 신호등 불빛이 흔들렸다. 그는 천천히 걸었다. 누군가를 잊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고, 여전히 사랑한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다만 어떤 계절의 자신이 아직 그 사람 곁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봄비가 오는 날이면 조금은 그렇게 서 있게 되리라는 것도.
도시는 그의 슬픔에 관심이 없었다. 버스는 도착했고, 택시는 지나갔고, 편의점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저녁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준은 문득 그 무심함이 고맙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매번 자신의 상실에 같이 울어준다면 사람은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불을 켜고, 문을 열고, 신호를 바꿔주기 때문에, 남겨진 사람도 언젠가는 다시 길을 건널 수 있다.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바람이 불어 우산 가장자리로 빗물이 흘렀다. 준은 고개를 들었다. 젖은 공기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아득하게 번지고 있었다. 그 빛들 가운데 어딘가에는 이미 멀어진 사람의 방도, 다른 비를 맞고 있을 바다도, 아직 시작되지 않은 누군가의 사랑도 있을 것이다.
신호가 바뀌었다.
준은 천천히 길을 건넜다.
봄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고,
그 비 속에서 끝난 사랑들은 모두 조금씩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완전히 잊히지 못한 것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못한 것들이,
도시의 젖은 불빛 아래에서 오래도록 희미한 체온을 내고 있었다.
어쩌면 사랑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자기 모양을 갖는지도 몰랐다.
함께 있을 때보다, 떠난 뒤의 계절 속에서 더 분명해지는 방식으로.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평생 한 사람과 살지 못하더라도
한 계절의 비로 서로의 생을 적셔놓는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방식으로,
그러나 끝내 부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날 밤 준은 집에 돌아와 창문을 조금 열어두었다.
젖은 바람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멀리서 차 지나가는 소리와 빗소리가 겹쳐 들렸다.
그는 불을 끄고 어둠 속에 앉아 한참 귀를 기울였다.
어딘가에서는 아직도
누군가가 누군가를 잃고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어디에서는 늦은 사랑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을 것이다.
도시는 늘 그런 식으로 젖고, 마르고, 다시 젖는다.
준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제야 겨우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처럼 생각했다.
사랑은 때때로 사람을 구하지 못한다.
대신 그 사람이 가장 깊이 가라앉던 밤,
혼자였다는 기억만은 조금 덜어준다.
그것이면 되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봄에는.
적어도 그 비 속에서는.
적어도
서로를 끝내 가질 수 없었던 두 사람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