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 위의 계절
처음 그 소리를 들은 건 삼월의 끝자락이었다. 겨울이 다 가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보다 먼저 아는 것은 늘 건물이었다. 콘크리트는 계절을 피부처럼 기억했고, 배관은 찬 기운과 미지근한 기운을 가느다란 몸속으로 흘려보내며 조금씩 소리를 바꾸었다. 벽지는 낮 동안 품었던 햇빛을 저녁에 천천히 식혀 내놓았고, 천장은 그 위에서 지나가는 발자국 하나하나를 마치 얇은 북면처럼 받아 울렸다.
그 아파트는 지어진 지 오래되어, 사람의 생활이 서로의 천장과 바닥을 타고 조금씩 번졌다. 누가 새벽에 수도꼭지를 틀면 배관 어딘가에서 작은 기침 같은 소리가 났고, 누가 현관문을 세게 닫으면 복도 끝까지 공기가 움찔했다. 누군가 의자를 끌면 그 소리는 단순한 마찰음이 아니라,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하루가 벽 너머에서 접히고 펴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준은 904호에 살았다. 서른넷, 프리랜서 번역가였다. 하루 대부분을 집에서 보냈고, 밤이 되면 문장이 더 잘 풀리는 체질이었다. 그는 낮에는 말이 적고 밤에는 생각이 많아지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식탁 위에 노트북을 두고 새벽 두세 시까지 앉아 있으면, 창밖으로는 편의점 간판 불빛이 희미한 물결처럼 방 안까지 번져 들어왔다. 그는 그런 시간을 좋아했지만, 그 시간은 또 이상하리만큼 타인의 소리에 민감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1004호에는 여자가 이사 왔다.
이사 온 첫날, 복도에는 테이프가 뜯기는 소리와 박스가 바닥에 닿는 소리, 낯선 생활이 무게를 찾아가는 소리가 오래 머물렀다.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가 짐을 나르는 것 같았는데, 저녁 무렵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밤이 되어서는 하이힐 소리도 사라졌다. 대신 가볍고 빠른 걸음이 천장 위를 몇 번 오갔다. 이준은 그날만큼은 새 이웃이 정리하느라 바쁘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갔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밤 열한 시만 넘으면 천장에서 소리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의자를 끄는 소리 같았다. 길고 얇게, 바닥의 결을 끝까지 긁고 가는 듯한 소리. 그다음엔 둔탁한 쿵, 쿵. 발소리치고는 조금 규칙이 있었고, 운동 기구 소리치고는 이상하게 끊어졌다. 때로는 무언가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났고, 어떤 밤에는 가벼운 뜀박질처럼 이어졌다. 이준은 처음 사흘 정도는 참았다. 사람이 살면 그럴 수 있지.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으니 정리할 것도 많겠지. 그런 식의 양해는 처음에는 늘 넉넉하다. 그러나 잠을 빼앗기면 사람의 이해는 얇은 유리처럼 금이 간다.
넷째 날 새벽, 그는 결국 인터폰을 눌렀다.
받지 않았다.
다섯째 날 밤에도 비슷한 소리가 이어졌고, 그는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관리사무소 직원은 익숙하게, 그러나 피곤하게 대답했다.
“먼저 직접 말씀해 보시는 게 좋습니다. 층간소음은 서로 오해도 많아서요.”
오해도 많아서요.
그 문장은 이상하게도 이준의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오해일 수도 있다는 뜻은, 동시에 자신이 지나치게 예민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밤을 새운 사람에게 자신을 의심하라는 말만큼 모욕적인 것도 없었다.
그는 다음 날 저녁, 1004호 앞에 섰다. 문 앞에는 아직 택배 상자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손잡이 아래 작은 금속 명패에 이름 대신 호수만 붙어 있었다. 그는 벨을 눌렀다.
잠시 뒤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기 전, 체인 걸린 틈으로 먼저 따뜻한 불빛이 길게 새어 나왔다. 그리고 여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네?”
여자는 생각보다 어려 보였다. 검은 머리를 헐겁게 묶고 있었고, 눈 아래엔 옅은 그늘이 있었다. 눈이 예쁜 편이었지만, 그 예쁨은 환한 쪽보다 오래 잠을 못 잔 사람에게서 생기는 투명함에 가까웠다.
이준은 준비했던 말을 조금 잊었다가 다시 끌어모았다.
“아, 안녕하세요. 바로 아래층에 사는 사람인데요. 요즘 밤에 조금 소리가… 자주 들려서요.”
여자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그 굳음은 방어였고, 동시에 오래 익숙해진 어떤 예감 같았다.
“제가요?”
“네, 밤늦게 의자 끄는 소리나 뛰는 소리 같은 게… 거의 매일 있어서.”
“저 혼자 사는데요.”
“그래도 소리가 나니까요.”
그 말이 나간 직후, 이준은 아차 싶었다. 말끝이 딱딱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여자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저도 밤에는 조용히 있는 편이에요. 집에 늦게 들어오긴 해도, 뛰거나 그러진 않거든요.”
“그럼 다른 소음이 여기서 내려오는 걸 수도 있잖아요.”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체인 걸린 문틈이 갑자기 더 좁아 보였다. 낯선 사람과의 대화는 늘 이상한 곳에서 벽을 세운다. 말의 내용보다 말이 닿는 방식이 먼저 마음을 긁는다.
이준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그래도 조금만 신경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이 닫혔다. 체인이 풀리는 소리도, 추가로 무언가 설명하는 말도 없었다. 그저 문 한 장이 닫히는 무표정한 소리만 복도에 남았다.
그날 밤, 소리는 더 심해졌다.
쿵, 쿵, 쿵.
마치 누군가 일부러 존재를 증명하듯 천장을 두드리는 듯했다. 이준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도배지 위로는 아무것도 없는데, 소리는 꼭 누군가 보이지 않는 신발을 신고 자기 머리 위를 서성이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분노보다 먼저 수치심을 느꼈다. 낮의 대화가 저 위에서 비웃음이 되어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결국 그는 빗자루 손잡이로 천장을 세 번 쳤다.
툭, 툭, 툭.
그러자 위층의 소리가 순간 멎었다. 건물 전체가 숨을 참는 듯 조용해졌다. 이준은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초 뒤, 위에서 다시, 더 또렷하게 세 번의 응답이 내려왔다.
쿵. 쿵. 쿵.
그것은 말이 아니었지만 말보다 선명했다. 건너편에서 던져진 악의 없는 악의, 혹은 상처 입은 자존심의 단단한 알맹이 같은 것. 이준은 그 짧은 교신으로 완전히 잠을 잃었다.
그날 이후 둘 사이에는 차가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낮에는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나 밤이 되면 서로의 존재를 의식했다. 이준은 소리가 나기 전에 먼저 귀를 세웠고, 실제보다 작은 소리도 크게 듣게 되었다. 여자는 정말 조심하려 했는지 한동안 잠잠했다가도, 어느 날은 새벽에 갑자기 가구를 움직이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는 인터폰을 눌렀고, 여자는 받지 않았다. 관리사무소에 민원을 넣었고, 관리사무소는 위층에 주의 전화를 했다고 했다. 그러자 복도 게시판에 “층간소음으로 인한 감정적 대응을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었다. 누군가의 얼굴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그 문장은 둘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며칠 뒤 밤, 복도에서 두 사람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준은 편의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고, 여자는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오는 중이었다. 복도등 아래서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녀는 마른 편이었고, 손목이 지나치게 가늘었다. 쓰레기봉투는 의외로 무거워 보였다.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민원 넣으셨죠.”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차가웠다.
“소리가 나니까 넣었죠.”
“제가 아니라니까요.”
“그럼 어디서 그렇게 계속 소리가 나요?”
“저도 들었어요.”
이준이 잠시 멈칫했다.
“네?”
“저도 밤에 소리 들었다고요. 근데 그게 제 집에서 나는 소리 같진 않았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여자는 쓰레기봉투 손잡이를 쥔 채, 잠시 말을 골랐다.
“이 건물 오래됐잖아요. 옆집 소리도 타고, 대각선 집 소리도 타고. 윗집에서 난 소리가 아래로 바로 안 가고 비껴서 들리기도 하고.”
이준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여자의 표정에는 변명할 때 생기는 들뜸이 없었다. 오히려 지쳐 보였다.
“그럼 왜 그때는 그렇게 말했어요?”
“처음 찾아오셨을 때요?” 여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예전 집에서도 그랬거든요. 제가 원인으로 몰린 적이 많아서.”
복도 창문 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봄밤의 바람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애매한 체온으로,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더 모호하게 만들었다.
“죄송하지만,” 여자가 말했다. “계속 그렇게 의심받으면 저도 좀… 힘들어요.”
그 순간 이준은 그 말 뒤에 붙어 있지 않은 문장들을 들은 것 같았다. 힘들어요, 이미 충분히. 힘들어요, 설명할 힘도 없을 만큼. 힘들어요, 그런데 또 증명할 방법도 없어서.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피해가 먼저일 때 남의 피로를 오래 들여다보지 못한다.
“저도 힘듭니다. 잠을 못 자서.”
그는 결국 그렇게 말해 버렸고, 여자는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 그 눈빛 속에는 분노보다 피로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오래 젖은 종이가 더 이상 구겨지지도 못하는 상태처럼.
“그러세요.”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봉투가 그녀의 무릎 근처에서 조용히 흔들렸다. 그 모습은 어쩐지 날개를 접은 새 같기도 하고, 물에 젖은 깃털처럼 가벼운데도 무거워 보였다.
그날 이후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준은 점점 더 확신을 잃었다. 정말 위층일까. 아니면 옆집, 윗윗집, 복도 끝의 집일까. 오래된 건물의 소리는 물속의 빛처럼 굴절되어, 근원을 짐작하게만 할 뿐 정확한 방향을 내주지 않았다. 그는 벽에 귀를 대어 보기도 하고, 화장실 배관 쪽에 서 보기도 했다. 그럴수록 소리는 더 이상 한 사람의 탓이 아니라 이 건물 전체가 품고 있는 늙은 신경통처럼 느껴졌다.
문제는 그 무렵부터 이준 자신도 점점 망가지기 시작했다는 데 있었다.
번역 마감은 밀렸고, 짧은 문장 하나를 붙드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낮에는 멍했고 밤에는 예민했다. 커피를 마시면 심장이 먼저 지쳤고, 안 마시면 머리가 둔해졌다. 그는 모니터를 보다가 문득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잊곤 했다. 문장을 번역하는 일은 타인의 생각을 가장 조용하게 집 안으로 들이는 일이었는데, 정작 그는 자기 집 안의 소리 하나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비 오는 밤이었다. 빗소리가 창문을 얇게 두드리며 오래 이어졌고, 천장에서는 또다시 둔탁한 소리가 몇 번 울렸다. 이준은 거의 울컥하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지금 올라가서 끝을 보자. 그렇게 생각했다.
복도는 비 냄새가 들었다. 엘리베이터 앞 바닥에 누군가 우산에서 떨군 물방울이 점점이 남아 있었다. 그는 904호 앞까지 갔다. 벨을 누르려는 순간, 문 안쪽에서 아주 낮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울음소리였다.
정확히는, 울음을 참는 소리였다. 숨을 깊게 들이켰다가 목구멍 어딘가에서 걸리는 소리. 소리라는 것은 커질 때보다 작아질 때 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이준은 손을 내렸다. 그 자리에서 한참 서 있다가 결국 벨을 누르지 못하고 돌아섰다.
다음 날 아침, 1층 우편함 앞에서 두 사람은 또 마주쳤다.
여자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이준은 순간 망설였다. 어젯밤 일을 말해야 하나, 모른 척해야 하나. 그러는 사이 여자가 먼저 우편물을 꺼내 들었다. 봉투 하나가 떨어졌다. 이준이 반사적으로 주워 들었는데, 수신인 옆에 병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외래 예약 안내.
그는 무심코 본 것을 바로 후회했다. 봉투를 건네며 시선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여자는 그 말이 봉투를 본 것에 대한 것인지,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것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잠시 뒤 그녀가 말했다.
“괜찮아요.”
그러나 괜찮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날 저녁, 이준은 처음으로 904호에 쪽지를 써서 붙였다.
지난번에 제가 너무 예민하게 말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소음이 언제 어떻게 들리는지 같이 확인해 볼 수 있을까요. 저도 정확한 원인을 찾고 싶습니다. 아래층 903호 이준.
그는 한참 망설이다 끝에 자신의 번호도 적었다. 쪽지를 붙이고 돌아서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낯선 사람에게 번호를 남긴다는 건, 때로 사과보다 더 깊은 문을 여는 일이었다.
답은 다음 날 새벽에 왔다.
모르는 번호로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오해가 계속되는 것 같아서 저도 답답했어요. 내일 저녁 가능하면 같이 확인해 봐요. 1004호 서윤.
서윤. 이름이 생기자 여자는 더 이상 막연한 위층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은 이름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미워하기가 조금 어려워진다. 이름이란 얼굴보다 먼저 마음에 걸리는 작은 못 같은 것이어서, 감정을 함부로 미끄러지지 못하게 붙들어 놓는다.
다음 날 저녁, 둘은 처음으로 제대로 대화를 나눴다.
서윤의 집은 생각보다 훨씬 비어 있었다. 거실엔 작은 소파 하나와 접이식 테이블, 그리고 벽에 기대 둔 액자 두 개뿐이었다. 식물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었다. 생활의 부피가 아주 얇았다. 집 전체가 누군가 잠시 머무는 호텔방처럼 느껴졌다.
“생각보다…” 이준이 말을 흐렸다.
“아무것도 없죠?” 서윤이 대신 말했다. “정리할 기운이 없어서요.”
그녀는 민망한 듯 웃었다. 그 웃음은 종이컵 가장자리처럼 얇았다.
둘은 한 시간 넘게 서로의 집을 오가며 소리를 확인했다. 서윤이 자기 집에서 걸어 보고, 이준이 아래에서 들었다. 의자를 끌어 보고, 서랍을 닫아 보고, 세탁기 위에 손을 올려 진동을 느껴 보았다. 신기하게도 문제의 소리는 재현되지 않았다. 대신 욕실 배관을 타고 어디선가 쿵 하는 진동이 전해졌고, 벽 한쪽을 두드리면 옆집 방향에서 더 크게 울렸다. 그러다 밤 아홉 시가 조금 넘어, 갑자기 천장 위가 아닌 벽 너머에서 그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길고 얇게 긁히는 소리, 뒤이어 둔탁한 쿵.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이거…” 이준이 말했다.
“옆라인 같죠?” 서윤이 낮게 말했다.
그 순간 둘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처음에는 아주 짧게. 그러다 조금 길게. 한참 서로를 괴롭혀 온 괴물이 사실 그림자였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처럼, 허탈하고도 우스운 웃음이었다.
그 후 둘은 관리사무소와 함께 며칠 더 확인했고, 결국 소음의 주된 원인이 바로 위층이 아니라 대각선 윗집의 실내 운동기구와 가구 이동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래된 구조 탓에 소리가 비껴 내려왔던 것이다. 관리사무소는 해당 세대에 다시 주의를 줬고, 바닥 매트 설치와 사용 시간 조정을 요청했다.
문제는 그렇게 끝나는 듯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러나 사람 사이의 오해가 풀렸다고 해서 마음속에 생긴 자국까지 바로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준은 미안했다. 서윤은 경계가 남아 있었다. 둘은 종종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고, 이제는 인사를 나눴지만 아직 편한 사이는 아니었다. 대화는 짧았고, 웃음은 조심스러웠다. 마치 한 번 금이 간 유리잔을 다시 손에 쥔 사람처럼, 서로를 다루는 태도에 늘 미세한 망설임이 있었다.
변화는 뜻밖의 저녁에 찾아왔다.
이준은 마감을 끝내고 늦게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그때 위층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큰 소리가 났다. 이전과는 다른, 훨씬 직접적이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이어서 짧은 비명 같은 것이 들렸다.
그는 생각할 새도 없이 올라갔다.
문을 두드리자 서윤이 한참 뒤 열었다. 그녀는 현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거실 쪽에는 액자 하나가 넘어져 유리가 깨져 있었고, 작은 선반도 한쪽으로 비뚤어져 있었다.
“괜찮아요?”
서윤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울지도 못한 얼굴이었다. 누군가 가까스로 숨만 붙들고 있는 표정. 이준은 망설이다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다친 데는 없어요?”
“없어요. 그냥… 어지러워서.”
그는 선반을 세우고 깨진 유리를 치웠다. 서윤은 거실 바닥에 기대앉아 있었다. 손등에 작은 상처가 있어, 이준은 구급상자를 찾아 밴드를 붙여 주었다. 아주 잠깐, 그녀의 손이 그의 손 위에 놓였다가 금세 물러났다. 그 짧은 온기 하나가 방 안의 공기를 바꿨다. 전쟁이 끝난 자리 위로 아주 가느다란 휴전선 같은 것이 그어졌다.
“요즘 잠을 거의 못 자서 그래요.” 서윤이 천천히 말했다. “공황이 와서요.”
이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윤은 벽을 보고 앉은 채 말을 이었다.
“원래는 무용을 했어요. 현대무용.”
그제야 이준은 그 밤의 규칙적인 둔탁함들이 왜 발소리 같으면서도 아니었는지 떠올렸다. 그녀의 몸은 아직도 습관처럼 리듬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발끝, 호흡, 근육의 기억들.
“몇 달 전에 그만뒀어요. 정확히는, 더는 못 하게 됐고.”
“다쳐서요?”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발목도 그렇고… 정신도 좀. 무대에 오르기 전에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숨을 못 쉬겠더라고요. 처음엔 한 번이었는데, 나중엔 계속.”
창밖에서는 봄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얇은 물소리가 유리창에 붙어 천천히 미끄러졌다.
“춤추는 사람은 몸으로 거짓말을 못 하거든요. 괜찮은 척해도 무대에 올라가면 다 드러나요. 몸이 먼저 도망가 버려서.”
그녀는 웃으려다 말았다.
“이사 온 것도… 그냥 다 피하고 싶어서였어요. 누구도 모르는 데로.”
이준은 식탁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었다. 마음속 어딘가가 천천히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몇 주 동안 괴로워했던 소리들 사이에, 이 여자의 상실과 불안이 엉겨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가슴이 저렸다. 소음이라는 단어는 너무 건조했다. 어떤 소리는 실은 무너지는 사람의 속도일 수도 있었다.
그날 이후 둘은 아주 천천히 가까워졌다.
가까워졌다는 말이 꼭 연애의 시작 같은 것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저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서윤은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가끔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은 조용하네요.
그러면 이준이 답했다.
그러네요. 비 와서 그런가 봐요.
혹은
옆집 운동기구 주인도 드디어 양심이 생긴 모양이네요.
서윤은 드물게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 웃음표 하나가 이상하게도 그녀가 실제로 웃는 얼굴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어느 날은 이준이 아래층에서 수프를 끓여 위층에 가져다주었고, 어느 날은 서윤이 구운 쿠키를 내려보냈다. 쿠키는 모양이 제각각이었고 조금 탔지만, 버터 냄새가 좋았다. 그는 다 먹고 접시를 씻어 돌려주며 말했다.
“맛있었어요.”
서윤은 어깨를 으쓱했다.
“반죽하다가 두 번 울어서요. 설탕이 조금 더 들어갔을지도.”
그 말에 그는 웃었고, 그녀도 따라 웃었다. 사람이 웃을 때 비로소 보이는 얼굴의 본류 같은 것이 있다. 서윤은 웃으면 눈매가 한층 부드러워졌고, 입술 끝이 조용히 풀렸다. 마치 얼어 있던 얕은 물 위로 햇살이 스미는 것처럼.
둘은 때때로 늦은 밤 편의점까지 같이 걸었다. 아파트 단지의 벚나무가 꽃잎을 떨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꽃은 가까이서 보면 선명했지만 멀리서 보면 마치 누군가의 기억이 허공에 퍼진 것 같았다. 바람이 불면 꽃잎은 소리 없이 흩어졌고, 길 위에 앉았다가 누군가의 신발 끝에 밟혀 조용히 뭉개졌다. 아름다운 것은 늘 조금 슬픈 방식으로 떨어진다.
“사실,” 어느 밤 서윤이 말했다. “처음엔 당신도 싫었어요.”
“저도요.”
“빗자루로 천장 친 거 너무 유치했어요.”
“위에서 세 번 맞받아친 건 더 유치했죠.”
서윤이 웃었다.
“그건 제가 아니에요.”
“네?”
“그날 저 없었거든요. 병원 갔다가 늦게 들어왔어요.”
이준이 멈춰 섰다.
“그럼 그건 누구예요?”
서윤은 어깨를 움찔했다.
“모르죠. 아마 진짜 범인?”
둘은 한참 웃었다. 웃음이 진정된 뒤에도 이준은 이상하게 오래 웃고 싶은 기분이었다. 세상에는 끝내 원인을 밝힐 수 없는 소리도 있고, 해명되지 않은 장면도 있고, 누가 먼저 오해했는지조차 잊히는 관계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때로 원인보다 그다음이었다. 잘못 닿은 마음이 어떻게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가. 그 과정이 어쩌면 관계의 진짜 얼굴인지도 몰랐다.
계절은 조금 더 흘렀다. 여름의 입구에서 공기는 하루하루 무거워졌고, 밤은 늦게 왔다. 서윤은 병원 치료를 계속 받으면서 주 2회 작은 무용 스튜디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 몸을 푸는 법과 리듬을 느끼는 법을 알려 주는 일이라고 했다.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진 모르겠어요.” 그녀가 어느 날 말했다. “그래도 몸을 완전히 미워하지는 않으려고요.”
그 말은 조용했지만 단단했다. 마치 금이 간 자리마다 천천히 새살이 차오르는 소리 같았다.
이준 역시 조금 나아졌다. 그는 밤의 소리에 덜 흔들리게 되었고, 일도 다시 속도를 찾았다. 무엇보다 그는 이전보다 누군가의 사정을 상상하려는 사람이 되었다. 천장에서 나는 쿵 소리 하나가 단순히 무례의 증거만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 뒤늦게 배웠다. 사람의 생활은 늘 표면보다 깊다. 낮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밤마다 무너질 수도 있고, 웃는 사람이 귀가한 뒤 운동화도 벗지 못한 채 현관에 주저앉을 수도 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아도 우리는 대부분 그런 것을 모른다. 모르는 채로 섣불리 단정하고, 단정한 뒤에 상처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갈등이 찾아왔다.
이번엔 소음 때문이 아니었다.
서윤이 한동안 연락이 뜸해졌다. 마주쳐도 피곤한 웃음만 짓고, 메시지 답도 늦었다. 이준은 처음엔 스튜디오 일 때문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저녁, 편의점 앞에서 그녀가 모르는 남자와 함께 있는 걸 보았다. 남자는 서윤보다 조금 나이가 있어 보였고, 둘은 무언가를 두고 낮게 실랑이하는 중이었다. 남자의 손이 순간 서윤의 팔목을 붙잡았고, 서윤이 그것을 뿌리치는 장면을 본 순간 이준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무슨 일이세요?”
남자가 돌아보았다. 얼굴에는 짜증이 먼저 떠올랐다.
“누구세요?”
“이웃입니다.”
서윤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요. 준 씨.”
그러나 괜찮지 않아 보였다.
남자는 비웃듯 웃었다.
“이웃이 별 걸 다 끼어드네요.”
이준은 그 웃음이 싫었다. 타인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의 웃음은 공기마저 더럽힌다. 그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팔 놓으시죠.”
남자가 팔을 놓긴 했지만, 눈빛은 더 거칠어졌다.
“전 남자친구예요. 우리 둘 문제니까 빠지세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윤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분명했다. 남자는 잠시 서윤을 보다가, 결국 욕 비슷한 것을 삼키며 돌아섰다. 멀어지는 걸음이 거칠게 바닥을 찼다.
남자가 사라진 뒤에도 서윤은 한참 아무 말이 없었다. 밤공기 속에서 그녀의 숨이 가늘게 떨렸다. 이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올라갈까요?”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1004호에 올라와서도 그녀는 한참 물만 마셨다. 컵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준은 거리를 두고 앉았다. 가까이 가고 싶었지만, 가까이 가는 것이 언제나 위로는 아니란 걸 알게 된 뒤였다.
“미안해요.” 서윤이 먼저 말했다. “괜히 보게 해서.”
“미안할 일 아니에요.”
“헤어진 지 좀 됐는데, 가끔 와요. 자꾸. 자기가 날 망친 게 아니라 도와준 거라고 말해요.”
그녀는 웃었다. 슬픈 웃음이었다. 젖은 성냥처럼 금방 꺼지는 웃음.
“사람을 가장 오래 아프게 하는 건 맞았던 말보다 틀린 위로인 것 같아요.”
이준은 그 문장을 오래 마음에 넣었다. 틀린 위로. 그것은 상처 위에 덮인 차가운 손바닥 같아서, 따뜻해 보이지만 실제론 피를 더 느리게 흐르게 만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날 밤, 서윤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길게 했다. 무용단에서 만나 연인이 되었던 남자. 처음엔 누구보다 자신을 이해한다고 믿었던 사람. 그러나 점점 그녀의 불안을 “유난”이라고 부르고, 무대에 서지 못하는 그녀를 “의지가 약하다”라고 단정했던 사람. 그녀는 자기 고통을 설명하느라 지쳤고, 결국 설명을 포기한 뒤에는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 관계는 사랑이라기보다 오래된 방에 차오르는 먼지 같아서, 처음엔 보이지 않다가 어느 순간 숨을 막히게 만들었다.
“그래서 누가 나한테 뭘 오해하거나 단정하면…” 서윤이 낮게 말했다. “견딜 수가 없었어요. 예전 집 얘기도 사실 비슷한 거였고.”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내가 그걸 했네요.”
서윤은 그를 보았다. 그 눈빛에는 원망보다 피곤한 이해가 먼저 깃들어 있었다.
“했죠. 근데 나도 그때 당신을 그냥 공격적인 사람으로만 봤어요.”
“저는 그때 정말 공격적이었고요.”
“그래서,” 서윤이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이렇게까지 친해질 줄은 몰랐어요.”
친해졌다는 단어가 조용히 둘 사이에 놓였다. 사람이 사람에게 건너갈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다리 중 하나는, 사랑보다 먼저 친밀일지도 몰랐다. 상대의 취약함을 알면서도 그것을 무기로 쓰지 않는 상태. 설명되지 않은 침묵도 함께 견딜 수 있는 상태.
그 여름, 둘의 마음은 서서히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준은 어느 밤 작업을 하다 문득 위층에서 들려오는 아주 미세한 발소리를 들었다. 예전 같으면 신경이 곤두섰을 소리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소리가 누군가가 잠들지 못하고 물 한 잔을 마시러 가는 걸음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사람을 알고 난 뒤 소리는 달라진다. 같은 쿵도 어떤 밤엔 무례였고, 어떤 밤엔 살아 있음의 증거가 된다. 감정은 청각마저 바꾼다.
서윤 역시 조금씩 웃는 날이 많아졌다. 스튜디오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는 눈이 밝아졌고, 가끔 거실에서 아주 짧게 몸을 풀다가 스스로 민망한 듯 웃곤 했다. 어느 날 이준이 말했다.
“한번 보여줘요.”
“뭘요?”
“춤.”
서윤은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왜요?”
“아직은… 내 몸이 내 편이 아닌 느낌이라.”
그 말은 이준의 마음에 오래 맴돌았다. 몸이 자기 편이 아니라는 감각. 생각해 보면 사람은 몸과 함께 살면서도, 어느 날 갑자기 몸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심장이 제멋대로 빨리 뛰고, 다리가 무대 앞으로 가지 않고, 잠이 오지 않고, 눈물이 원치 않는 순간에 흐른다. 몸은 가장 가까운 타인이다.
여름 끝자락, 아파트에서는 주민 대표회의를 열어 층간소음 대책 안내를 했다. 방음 매트, 사용 시간 준수, 직접 대면 시 감정적 언행 자제 같은 평범한 내용들이 이어졌다. 이준과 서윤은 나란히 뒷자리에 앉았다. 회의가 끝난 뒤 돌아오는 길, 서윤이 말했다.
“웃기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렇게 얇은 바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산다는 게.”
“그러게요.”
“가끔은 우리가 다 서로의 천장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아요.”
그 비유가 이준은 좋았다. 서로의 천장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 닿을 수는 없지만 소리는 전해지고, 오해는 쌓이고, 생활은 스며드는 곳. 아파트는 어쩌면 거대한 악기 같은 것이어서, 누구 하나만 세게 울려도 전체가 함께 떨리는 구조인지도 몰랐다.
가을이 왔다.
공기는 다시 가벼워졌고, 창문을 열어 두면 저녁 냄새가 방 안으로 깊게 들어왔다. 서윤은 그즈음 작은 발표회에 아이들을 세우기로 했다. 정식 공연은 아니고, 학부모 몇 명만 보는 작은 자리라고 했다. 그래도 그녀는 긴장했다.
“가서 볼래요?” 어느 날 그녀가 물었다.
그 질문은 사소했지만, 이준은 그것이 자신에게 건네는 신뢰의 형태라는 걸 알았다.
“당연하죠.”
발표회 날, 작은 스튜디오는 햇빛 냄새와 분주한 아이들의 체온으로 가득했다. 아이들은 제각기 다른 속도로 몸을 움직였고, 음악보다 먼저 웃음이 흘렀다.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서윤은 아이들 사이를 오가며 자세를 잡아 주고, 타이밍을 맞춰 주고, 넘어지는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그 움직임에는 무대 위의 화려함은 없었지만, 오래 잃어버렸던 자기 리듬을 다시 찾는 사람의 조심스러운 기쁨이 있었다.
발표가 끝난 뒤, 스튜디오가 거의 비었을 때였다. 서윤은 빈 거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창가로 기울어진 햇빛이 그녀의 발목과 손끝에 얇게 걸렸다. 이준은 멀찍이서 그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아주 짧게, 정말 짧게 몸을 움직였다. 음악도 없고 관객도 없는 자리에서, 숨을 들이쉬고 한 발을 내딛고, 상체를 천천히 열었다. 그 동작은 기술이라기보다 고백 같았다. 무언가를 이겨냈다고 선언하는 몸짓이 아니라, 아직 두렵지만 그래도 다시 시작해 보겠다는 조용한 약속 같은 것.
그 순간 이준은 알았다. 자신이 언제부터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의 회복을 자기 일처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돌아오는 길, 둘은 나란히 걸었다. 은행잎이 인도 위에 얇게 깔려 있었고, 신발 밑에서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오늘 좋았어요.” 이준이 말했다.
“아이들이요?”
“아이들도. 당신도.”
서윤은 걷던 걸음을 조금 늦췄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뺨에 붙였다가 떨어뜨렸다.
“나는 아직 많이 불안한데.”
“알아요.”
“가끔은 또 다 망가질 것 같고.”
“그럴 수도 있겠죠.”
그녀가 그를 보았다. 사람은 대개 괜찮을 거라는 말을 기대한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괜찮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함께 인정해 주는 사람이 더 위로가 된다.
“그래도,” 이준이 말했다. “같이 있으면 조금 덜 무서울 것 같아요.”
서윤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가로등 아래서 길게 늘어졌다가 포개졌다. 마치 서로 다른 방향에서 살아온 시간이 잠깐 같은 모양을 갖는 것처럼.
“나도요.”
그 한마디는 사랑 고백처럼 뜨겁지 않았다. 대신 조용하고 깊었다. 따뜻한 물이 천천히 얼음 밑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늦지만 확실한 온도였다.
그 뒤로 둘은 연인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천천히.
처음 손을 잡았던 건 겨울 초입이었다. 단지 앞 붕어빵 노점에서 막 나온 봉투를 함께 들고 걷다가, 손등이 여러 번 부딪친 끝에 어느 쪽도 물러서지 않으면서 손이 겹쳤다.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고, 둘 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랑은 종종 대단한 문장보다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아주 사소해서 도리어 부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물론 그 뒤에도 갈등은 있었다.
서윤은 갑자기 연락을 끊고 혼자 있고 싶어지는 날이 있었고, 이준은 그런 날 이유를 묻고 싶어 하다가도 참아야 했다. 이준이 일에 치여 며칠 예민해지면 서윤은 다시 자신이 부담이 되는 건 아닐까 불안해했다. 한 번은 아주 사소한 말다툼 끝에 서윤이 말했다.
“당신도 결국 내가 번거로워질 거야.”
그 말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흘러온 공포였다. 이준은 그 말을 듣고 화가 나기보다 슬펐다.
“내가 뭘 해도 결국 떠날 거라고 미리 정해 놓지 마요.”
그 말 이후 둘은 한동안 침묵했다. 관계는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상대를 믿는 것보다, 상대가 자신을 믿게 기다리는 일이 더 어렵다.
서윤이 먼저 울었다.
“미안해. 자꾸 최악부터 생각해서.”
이준은 그녀를 바로 안지 않았다. 대신 가까이 앉아 손만 잡았다. 사람이 무너질 때는 껴안는 것보다 버티도록 곁을 내주는 편이 더 나은 순간도 있으니까.
“나는 완벽하게 이해할 순 없어요. 근데 도망가진 않을게요.”
그 약속은 화려하지 않았다. 대신 생활 같았다. 날마다 반복해서 증명해야 하는 종류의 말. 사랑이란 결국 감정보다 습관에 가까운 것인지도 몰랐다. 오늘도 돌아오고, 오늘도 귀를 기울이고, 오늘도 쉽게 단정하지 않으려 애쓰는 일.
겨울이 깊어졌을 때, 아파트엔 다시 층간소음 안내문이 붙었다. 이번엔 다른 세대의 민원 때문이었다. 둘은 그 종이를 함께 보고 피식 웃었다.
“예전엔 이 종이만 봐도 심장이 뛰었는데.” 서윤이 말했다.
“나도요.”
“이상하네. 같은 건물인데 이제 덜 무서워.”
이준은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 위에도 누군가 살고, 그 위에도 또 누군가 살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를 오해할 것이고, 밤중엔 누군가의 발소리에 누군가가 깰 것이다. 세상은 갑자기 조용해지지 않는다. 갈등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어떤 사람을 만난 뒤에는 소리를 듣는 마음이 달라진다. 그것만으로도 삶은 꽤 많이 바뀐다.
그날 밤, 둘은 서윤의 집 거실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창밖에는 아주 늦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은 소리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꾼다. 평소엔 거칠게 울리던 도시의 가장자리들이 흰 숨 아래 잠잠해진다. 천장 위에서도 발소리가 간간이 났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멀게 들렸다. 마치 아주 먼 생의 일처럼.
서윤이 말했다.
“가끔 그런 생각해. 우리 처음 만난 게 소리 때문이라는 게.”
“더 정확히는 오해 때문이죠.”
“응. 오해.”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턱을 올렸다.
“근데 어쩌면 사람들은 다 오해를 뚫고 만나게 되는 것 같아. 처음부터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처음엔 다 소음처럼 들리죠. 뜻도 모르고, 방향도 모르고.”
“그러다 어느 날 그게 누군가의 생활이고, 두려움이고, 숨소리였다는 걸 알게 되고.”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창문에 비친 실내 불빛이 그녀의 뺨에 얇게 얹혀 있었다. 처음 복도에서 봤던, 눈 아래 그늘이 짙던 여자는 여전히 완전히 괜찮아진 것은 아니었다. 아마 앞으로도 완전히 괜찮아지는 날은 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자기 불안을 숨기지 않았고, 그는 그 불안을 문제로만 보지 않았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아도 함께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마치 오래된 아파트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완전히 멈추진 못해도, 그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리듬을 조금씩 맞춰 가며 사는 것처럼.
“서윤.”
“응?”
“처음에 당신이 문 열었을 때, 되게 차가운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녀가 웃었다.
“나도. 당신이 세상 제일 재수 없는 남자인 줄 알았어.”
“정정할 기회를 주세요.”
“글쎄. 아직 심사 중인데.”
“그럼 오래 기다릴게요.”
서윤은 그 말에 웃다가, 아주 잠깐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 무게는 가벼웠지만, 이상하게도 겨울밤 전체가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사람의 체온은 때때로 난방보다 정직하다.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얼마나 머물 생각인지, 말보다 먼저 알려 준다.
천장 위에서는 또 한 번 작은 발소리가 났다. 누군가 늦은 밤 물을 마시러 가는 걸지도 모르고, 욕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돌아오는 것일지도 몰랐다. 예전의 이준이라면 인상을 찌푸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 소리를 듣고 생각했다. 저 위에도 누군가 하루를 견디고 있겠구나. 오늘을 잘못 보냈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일은 조금 다르길 바라겠구나. 그렇게 층층이 쌓인 희망과 피로가, 이 건물의 밤을 받치고 있겠구나.
서윤이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하게 이제는 천장 소리가 좀 안심돼.”
“왜요?”
“아무도 혼자가 아닌 것 같아서.”
그 말은 오래도록 방 안에 머물렀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소리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참아야 할 소음이고, 누군가에게는 아직 살아 있다는 신호다. 어떤 소리는 사람을 미치게 하고, 어떤 소리는 사람을 구한다. 결국 차이를 만드는 건 소리 그 자체보다, 그것을 듣는 마음의 자리일지도 모른다.
바깥의 눈은 점점 굵어졌다. 도시의 모서리들이 흰 빛에 닳아 둥글어졌다. 천장과 바닥, 벽과 벽 사이를 타고 오가던 낡은 전쟁들도 그 밤만큼은 조금 잠잠했다. 서로 다른 층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한 방 안에 나란히 앉아, 같은 소리를 다르게 듣게 되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해는 물때처럼 쉽게 달라붙고, 이해는 겨울 해처럼 늦게 온다. 그러나 늦게 온 빛이 늘 약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가장 늦게 도착한 빛이 가장 오래 머문다.
이준은 조심스럽게 서윤의 손을 감쌌다. 서윤은 눈을 감은 채 손가락을 조금 움직여 그의 손을 마주 쥐었다. 그 작은 맞물림 위로, 천장 위의 발소리가 아주 멀게 한 번 더 지나갔다.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래된 북의 가죽을 살짝 건드리는 것처럼, 겨울밤은 한 번 가늘게 울리고 이내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조용한 가라앉음 속에서, 둘은 처음으로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평온을 알았다.
소리가 사라져서가 아니었다.
서로가, 마침내 서로의 뜻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