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유랑 II

봄을 닮은 노랑

by 윤담

봄은 늘 문고리부터 풀렸다.
겨울 내내 차갑게 굳어 있던 쇠가 어느 날부터는 손바닥에 오래 남는 미지근함을 품고 있었고, 유리문 가장자리에 맺히던 김도 아침 햇빛 앞에서 금방 사라졌다. 골목 어귀 목련은 한꺼번에 피지 않았다. 하루에 두 장, 많아야 세 장씩 하얀 꽃잎을 열었고, 정희는 셔터를 올릴 때마다 어제보다 조금 더 환해진 나무를 보았다. 분식집 앞의 플라스틱 의자 다리에는 노란 먼지가 앉아 있었고, 세탁소 유리창에는 아침마다 다림질한 셔츠의 김이 엷게 번졌다. 모든 것이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계절이었다. 그러나 부드러워진다고 해서 다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봄에는 오히려 가벼운 것들이 더 오래 남았다.
정희의 문방구는 학교에서 멀지 않았다.
정문을 나와 왼쪽으로 꺾어 분식집과 세탁소 사이의 좁은 골목 안으로 조금만 들어오면, 유리문 위에 작은 종이종이 달린 가게가 하나 나왔다. 종은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가늘고 낡은 소리를 냈다. 맑다기보다 오래 닳은 은빛에 가까운 소리. 정희는 그 소리를 좋아했다. 세상에는 새것만으로는 나지 않는 소리들이 있었고, 사람 마음을 오래 붙드는 쪽은 대개 그런 소리였다.
가게 안에는 샤프심과 공책, 편지지와 봉투, 형광펜과 지우개, 투명한 자와 스티커, 얇은 리본 묶음과 색종이들이 있었다. 벽 쪽 선반 맨 위에는 유리병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단추, 조개껍질, 구슬, 작은 나사, 지워진 연필심, 종이클립, 이름 모를 금속 조각. 정희는 어디선가 그런 것들을 주워 와 병에 담아 두었다. 누구는 왜 그런 걸 모으느냐고 묻기도 했지만, 정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떨어진 단추 하나에도 모양이 있었고, 깨진 유리조각 하나에도 빛이 있었으며, 다 쓴 연필심 끝에도 손가락의 온도가 남아 있었다. 버려진 것들은 이상하게도 사람을 닮았다. 제자리를 잃고도 조금은 제 모양을 지키고 있는 점이 그랬다.
오후가 되면 학생들이 몰려왔다.
체육복 바지 끝에 흙먼지를 묻힌 채, 교복 소매를 걷은 채, 운동장에서 뛰어온 열기를 그대로 안고. 누군가는 샤프심을 찾았고, 누군가는 지우개를 고르다가 결국 가장 싼 것을 집었다. 누군가는 냉장고 앞에 서서 음료를 오래 들여다보다가, 친구에게 돈을 빌려 더 비싼 것을 사기도 했다. 계산대 위에는 동전이 굴렀고, 비닐봉지 소리가 났고, 바람이 불면 골목에서 올라온 흙 냄새와 분식집 국물 냄새가 문틈으로 함께 들어왔다. 학생들은 대개 들어올 때보다 나갈 때 더 시끄러웠다. 손에 쥔 것들이 생기면 걸음도 빨라지고 웃음도 커졌다.
그 학생은 처음부터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었다.
키도 중간쯤이었고, 머리도 단정했고, 친구들 틈에 섞이면 금방 사라질 얼굴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눈이 머물렀다. 조용한데 표정이 조금 엉뚱했고, 심심한 얼굴로 서 있다가도 갑자기 전혀 다른 말을 하나 툭 던질 것 같은 기운이 있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 친구 셋과 함께 들어왔을 때도 그랬다.
넷은 색종이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웅크리고 서 있었다.
그 중 한 여학생이 색종이 한 묶음을 집어 들고 비닐 너머로 안쪽 색들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맨 앞 노란색을 손끝으로 짚고, 묶음을 뒤집어 흰색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가늠했다.
“이건 병아리 같고, 이건 형광펜 같고…”
친구들이 웃었고, 여학생은 끝내 그 묶음을 품에 안았다.
“사장님, 노란색도 종류가 너무 많지 않아요?”
정희는 계산하던 손을 멈추고 웃었다.
“노란색은 원래 많지.”
학생은 하나씩 색을 가려 가며 말했다.
“이건 레몬사탕 같고, 이건 병아리 같고, 이건 형광펜 같고, 이건 체육대회 응원도구 같아요.”
옆에 있던 친구가 그의 팔을 툭 쳤다.
“또 시작한다.”
학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 더 연한 색 한 묶음을 찾아냈다.
햇빛을 아주 얇게 접어 놓은 것 같은 색이었다. 학생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이거다.”
“왜, 이건 뭐 같은데.”
정희가 묻자 학생은 색종이를 손끝으로 쓸며 말했다.
“이건 그냥 봄 같아요.”
친구들이 동시에 웃었다.
“색 가지고 왜 맨날 그렇게까지 생각하냐.”
학생도 따라 웃었다. 웃을 때는 눈이 먼저 휘었고, 손끝은 여전히 종이 위에 있었다. 접기 전에 먼저 종이의 결을 만져 보는 사람처럼.
정희는 서랍 아래쪽에서 흰색 두 장과 하늘색 한 장을 꺼내 더 얹어 주었다.
“그럼 이것도 같이 가져가.”
학생은 고개를 들었다.
“왜요?”
“봄만으로는 배가 심심하니까.”
“배요?”
“종이배 접을 거 아니야?”
학생은 잠깐 놀란 듯했다가 웃었다.
“티 났어요?”
“색 고르는 걸 보니 그렇더라.”
친구 하나가 말했다.
“맞아요. 쟤 오늘도 배 접자고 난리였어요.”
학생은 계산대 위에 동전을 늘어놓으며 중얼거렸다.
“물에 뜨는 건 원래 다 멋있어요.”
“고무오리도?”
정희가 묻자 학생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고무오리는 너무 대책 없이 귀엽고, 종이배는 괜히 비장하죠.”
그 말에 정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학생은 자기가 우스운 말을 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말해버리는 얼굴이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오래 기억될 것 같은 사람이었다.
며칠 뒤 비가 내리는 오후, 학생은 혼자 왔다.
우산 끝에서 물이 떨어졌고, 운동화 끈 한쪽이 젖어 짙은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젖은 면 냄새와 빗물 냄새가 함께 따라 들어왔다. 유리문이 닫히자 종이종이 한 번 더 가볍게 울렸다.
“비가 많이 오네.”
정희가 말하자 학생은 창밖을 한번 돌아보았다.
“완전 수족관이에요.”
“사람들이?”
“네. 우산 쓴 물고기들.”
학생은 편지지 진열대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너무 화려하지 않은 것들을 골랐다. 아주 연한 꽃무늬가 구석에만 있는 것, 거의 흰 것처럼 보이는 크림색, 줄이 없는 매끈한 종이. 봉투도 가장 단순한 것을 집었다.
“누구한테 쓰려고?”
정희가 묻자 학생은 봉투 모서리를 손톱으로 톡톡 두드렸다.
“제가 편지를 줄 사람에게요.”
“그건 다 그렇지.”
정희의 말에 학생은 조금 웃었다.
“편지를 받는 사람이라고 하면, 가만히 있는 느낌이잖아요.”
정희는 잔돈을 세다가 손을 멈췄다.
“줄 사람이라고 하면?”
학생은 젖은 소매 끝을 조금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제가 가는 느낌이죠.”
말을 마친 뒤 학생은 바로 다른 쪽을 보았다.
대단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다만 말을 해놓고 나면 조금 쑥스러워져서 물건을 괜히 다시 만져 보는 사람의 손끝이 있었다. 정희는 그 손끝을 가만히 보았다. 빗물에 닿아 조금 차가워진 손, 동전을 세울 때마다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손톱의 움직임. 학생의 손은 늘 어른보다 빨랐지만, 그 빠름 속에는 아직 급히 자란 데 없는 서투름이 남아 있었다.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가게 앞 골목에서였다.
친구들이 먼저 뛰어나가며 뒤돌아 불렀다.
“다윤아, 빨리 와. 버스 온다.”
다윤.
입안에서 굴리면 둥글게 굴러가는 이름이었다. 정희는 속으로 한 번 불러 보았다가, 다시 부르지 않았다. 이름을 알고 나면 마음이 괜히 조심스러워졌다. 모르는 동안에는 얼굴 하나로만 남아 있던 사람이 이름을 얻는 순간부터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오는 법이었다.
그 뒤로도 다윤은 가끔 들렀다.
샤프심을 사러 왔다가 형광펜 색을 전부 시험해 보았고, 지우개를 사러 왔다가 단추 병 앞에 멈춰 섰다.
“이런 단추는 다 어디서 와요?”
“단추가 굴러 떨어진 데서 오지?”
다윤은 병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러면 좀 서운하겠다.”
“누가.”
“단추요. 붙어있다가 떨어진 거잖아요.”
정희는 웃었고, 다윤도 웃었다.
대수롭지 않은 말이었는데도, 그런 대화가 지나가고 나면 가게 안의 공기가 조금 흔들린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장난으로 유리창을 한번 두드리고 간 뒤에 남는 얇은 진동처럼.
토요일 오후에는 다윤이 친구 셋과 함께 다시 왔다.
넷은 문을 열자마자 한꺼번에 떠들기 시작했다. 누구는 리본을 찾고 있었고, 누구는 스티커를 들쑤셨고, 누구는 계산대 옆에 쌓인 사탕 개수를 슬쩍 세어 보았다. 정희는 서랍을 열어 리본 묶음을 꺼냈다. 분홍, 파랑, 연두, 노랑. 다윤은 그중 가장 연한 노란 리본 하나를 집어 손가락 위에 걸쳤다. 아주 얇아서 숨만 불어도 흔들릴 것 같았다.
“이건 괜찮다.”
친구가 물었다.
“왜?”
다윤은 리본 끝을 잡고 빛 쪽으로 들어 올렸다.
창문으로 들어온 오후 햇살이 리본 위에 얹혔다가 미끄러졌다. 아주 잠깐, 노란 리본이 빛보다 가벼운 것처럼 보였다.
“가벼워 보여.”
“리본은 원래 가볍지.”
“그런 가벼움 말고.”
다윤은 말을 끝까지 하지 않고 웃었다. 친구 하나가 어깨를 툭 밀쳤다.
“쟤 또 이상한 말 한다.”
“맨날 이상해.”
네 사람의 웃음이 작은 가게 안을 금세 채웠다.
웃음은 천장 근처에 닿아 오래 맴도는 것처럼 들렸다. 정희는 리본을 봉투에 넣으며 그 얼굴들을 차례로 보았다. 웃을 때 목이 먼저 접히는 학생, 이를 드러내고 웃는 학생, 웃다가 금방 표정을 수습하는 학생. 다윤은 웃으면서도 손끝에서 리본을 놓지 않았다. 리본 끝이 친구의 팔에 닿았다가, 자기 소매에 닿았다가, 다시 공중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그 주의 끝자락부터 다윤은 며칠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았다. 시험 기간일 수도 있고, 그냥 다른 길로 다닐 수도 있었다. 그래도 종이종이 울릴 때마다 정희는 한번쯤 고개를 들었다. 문이 열리고 다른 학생이 들어오고, 계산대 위에서 동전이 구르는데도 이상하게 빈 자리가 하나 남아 있었다. 누군가 빠진 자리는 소리보다 먼저 공기의 모양으로 드러났다.
사월의 빛은 자주 그랬다.
환한데 어딘가 얇고, 따뜻한데 금세 식을 것 같았다. 정희는 아침에 셔터를 올리며 맞은편 분식집 텔레비전을 힐끗 보았다. 처음에는 화면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바다, 기울어진 배, 화면 아래를 지나가는 자막. 너무 큰 일은 늘 처음에 실감이 나지 않았다. 유리창에 낀 김과 떡볶이 냄새와 설거지통의 물소리 같은 것들이 여전히 눈앞에 있는데, 저 화면 속에서만 다른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다.
분식집 아주머니는 리모컨을 쥔 채 서 있었다.
국자가 냄비 안에 반쯤 잠긴 채 멈춰 있었고, 가게 앞을 지나던 사람들이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누군가 무어라 말하자 다른 누군가가 급히 휴대폰을 꺼냈다. 정희는 셔터 손잡이를 놓은 채 그 장면을 보았다. 햇빛은 평소처럼 문틀을 타고 들어오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얼굴만 갑자기 계절을 잃은 것 같았다.
그날 문방구 안에서 정희가 무엇을 했는지, 나중에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손님이 다녀갔는지, 점심을 먹었는지, 잔돈을 제대로 건넸는지. 다만 중간중간 유리문 쪽을 계속 보았다는 것만은 기억났다. 종이종이 울리면 다윤이 들어올 것 같았다. 우산을 접으며, 친구를 밀치며, 혹은 아무렇지 않게 또 이상한 말을 하나 던지며.
문은 몇 번이고 열리고 닫혔지만, 다윤은 오지 않았다.
며칠 동안 학교 앞 공기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교문 근처에는 사람들이 자주 멈춰 섰고, 지나가는 학생들의 웃음소리도 끝이 짧았다. 게시판 한쪽에 종이들이 붙기 시작했고, 담장 아래에는 꽃보다 리본이 먼저 보였다. 바람이 불면 리본들이 한쪽으로 눕다가 다시 천천히 돌아왔다. 멀리서 보면 누군가가 지나가며 봄빛을 조금씩 묶어 놓고 간 것 같았다. 오후 햇살이 그 위에 닿으면 노란색은 환하게 뜨지 않고 오히려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명랑한 색이었던 것이 다른 얼굴을 가지게 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희는 가게 문을 닫기 전에 길 건너편을 오래 바라보곤 했다.
학생들이 몇 명씩 모여 서 있다가 흩어지고, 어른들이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교문을 지나던 발걸음이 자꾸 멈췄다 이어졌다. 저녁이 오면 운동장 쪽 방송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고, 버스 정류장에 늘어선 교복들 사이에서도 전처럼 재잘거림이 크게 터지지 않았다. 사월은 원래도 조금 서늘한 달이지만, 그해의 사월은 바람이 아니라 사람들 얼굴에서 먼저 식어 갔다.
다음 날 정희는 문방구 한쪽에 작은 상자를 놓았다.
과자 상자를 뒤집어 포장지를 벗긴 것이어서, 모서리마다 종이결이 조금 일어나 있었다. 너무 새것 같지 않은 것이 오히려 나았다. 새 물건은 아직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런 얼굴은 그해 봄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정희는 흰 종이를 잘라 상자 앞면에 끼워 넣었다.
한참 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하다가, 연필 끝으로 천천히 글자를 눌렀다.
종이배를 놓아 주세요
쓰고 나니 문장이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유도 없고, 설명도 없고, 부탁 하나만 놓여 있는 문장.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쉬웠고, 그 쉬움 안에 더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잠겨 있었다.
상자 곁에는 흰 색종이와 하늘색 색종이, 아주 연한 노란색 종이를 몇 장씩 가지런히 놓아 두었다. 짧은 연필 두 자루와 지우개 하나도 함께. 정희는 한 발짝 물러서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계산대 옆, 사탕 진열대 아래, 손님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제일 먼저 보게 되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숨는 자리도 아니었다. 누군가 잠깐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는 자리. 그 정도가 좋았다.
그날 오후 문방구 안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학생들은 여전히 들어왔고, 샤프심을 찾고, 음료를 고르고, 동전을 세었다. 그런데 말끝이 자꾸 짧아졌다. 웃음이 나와도 오래 이어지지 않았고, 웃고 난 뒤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깐씩 입을 다물었다.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젖은 운동화 냄새 같은 것이 남아 있는 날이 있었다. 그날이 꼭 그랬다. 밖은 분명 맑았고 유리문으로 들어오는 햇빛도 환했는데, 사람들 어깨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무언가가 얹혀 있는 것 같았다.
맨 처음 종이배를 넣고 간 것은 키 작은 남학생이었다.
문방구에 오면 늘 과자를 먼저 고르던 학생이었는데, 그날은 냉장고 문도 열지 않고 상자 앞에 바로 섰다. 색종이를 한 장 집어 들고 서툰 손으로 한참을 접었다. 접었다 펴고, 모서리를 잘못 맞추고, 다시 구기듯 눌렀다. 정희는 모르는 척 계산대에 시선을 둔 채 있었다. 학생은 끝내 완벽한 모양을 만들지 못한 채 조금 찌그러진 배 하나를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연필을 집어 들더니 배 바닥에 아주 작게 무언가를 적었다. 그 글씨는 정희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학생이 돌아나갈 때 유리문 종이종이 울렸다.
쇠가 맞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유난히 길게 남았다. 정희는 그 학생이 나간 뒤에야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흰 종이배 한 척이 비스듬히 들어 있었다. 배 옆면에 눌린 손자국이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 다음에는 여학생 둘이 함께 왔다.
둘은 한참 색종이 앞에 서 있었다. 하나는 노란 종이를 집으려다 말고 하늘색으로 바꾸었고, 다른 하나는 끝내 흰색만 두 장 가져갔다. 둘은 접는 내내 별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분명히 상대의 손을 보고 웃었을 학생들인데, 그날은 서로의 종이를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다만 한 학생이 마지막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그거 삐뚤어졌어.”
그러자 다른 학생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알아.”
짧은 말이었는데, 이상하게 정희의 가슴 한쪽이 오래 저렸다.
삐뚤어진 것을 아는데도 다시 펴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다. 다 고칠 수 있을 것 같던 나이가 지나가고 나면, 사람은 그런 순간을 조금씩 배우게 되었다.
며칠이 지나자 상자 안에는 배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완벽하게 접힌 것도 있었고, 머리 부분이 눌린 것도 있었고, 종이 대신 공책 종이를 뜯어 접은 것도 있었다. 어떤 배는 너무 조심스럽게 만들어져 끝이 날카로웠고, 어떤 배는 성급하게 접혀 허리 부분이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이름이 적힌 것도 있었고, 아무것도 적지 않은 것도 있었다. 누군가는 배 대신 노란 리본 한 줄을 접어 넣었고, 누군가는 별 스티커 하나를 종이 안쪽에 붙여 두었다. 상자에 쌓이는 것은 가벼운 것들뿐이었는데, 저녁마다 정희가 상자를 들어 자리를 조금 옮길 때면 손목에 전해지는 무게가 어제와 달랐다.
어느 날 저녁, 정희는 상자 안의 종이배들을 하나씩 바로 세우다가 맨 아래에 납작하게 눌린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희고 얇은 봉투였다. 오래 눌려 있었는지 가장자리가 조금 무뎌져 있었다. 손에 쥐자 종이에서 아주 옅은 먼지 냄새와, 오래된 책장을 넘길 때 나는 마른 냄새가 함께 났다. 정희는 한참 동안 그것을 들고만 있었다. 가게 안에는 냉장고의 낮은 진동 소리와, 형광등이 아주 작게 윙윙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유리문 바깥으로는 저녁빛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분식집 간판 불이 켜지고, 세탁소 유리창에 붉은 노을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골목 바닥의 물기 없는 시멘트에도 이상하게 물빛 같은 푸른 기운이 잠깐 머물렀다. 정희는 그 빛이 다 빠져나가기 전에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한 번 반듯하게 접혔다가 다시 펴진 편지지가 들어 있었다.
크림색에 가까운 종이였다. 손톱으로 눌린 접힌 선이 아직 남아 있었다. 정희는 종이를 펼쳤다.
봄꽃이 아름다워요. 그쪽도 보고 있어요?
오늘 햇빛이 좋아요. 당신들이 보고 싶어요.
바람이 좀 차가운데 감기 조심해요.
노란색이 생각보다 고급스러워요. 그렇죠?
글씨는 반듯했지만 군데군데 힘이 조금 달랐다.
어떤 자음은 깊게 눌렸고, 어떤 획은 거의 닿을 듯 말 듯 지나가 있었다. 정희는 손가락으로 그 눌린 자국을 천천히 따라갔다. 종이 위에 남은 압력은 이상하게 사람의 목소리보다 오래 살아 있었다.
잘 지내요, 나도 잘 지내고 있어요.
거기까지 읽은 뒤 정희는 종이를 내려놓지 못했다.
문방구 안으로 들어온 저녁 공기가 계산대 위 영수증 끝을 아주 조금 들었다 놓았고, 유리문 손잡이에 묶어 둔 노란 리본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너무 작아서 눈으로 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 미세했지만, 정희는 이상하게 그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 오는 날 우산 끝에서 물이 떨어지던 소리, 봉투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던 손톱 소리, 색종이를 빛에 비춰 보며 웃던 학생들의 숨소리 같은 것들.
정희는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고 한참 동안 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상자 안에는 배들이 빽빽하게 포개져 있었다. 조금만 건드려도 서로의 끝이 닿아 사각, 아주 작은 마찰음이 났다. 마치 얇은 새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며 잠드는 소리 같았다. 정희는 그 소리를 듣다가 흰 색종이 한 장을 꺼냈다.
모서리를 맞추고, 선을 눌러, 천천히 배를 하나 접었다.
이번에는 손이 전보다 더 느렸다. 종이가 한 번 접힐 때마다 안쪽에 공기가 조금씩 갇히는 것 같았고, 손톱으로 선을 누를 때마다 되돌릴 수 없는 무엇이 종이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완성된 배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자 종이는 금방 체온을 먹었다. 너무 가벼워서 없다고 해도 믿을 만한 무게였는데, 손바닥은 분명히 무엇인가를 받치고 있었다.
문을 닫기 전, 정희는 그 배를 상자 맨 위에 올려두었다.
이름도 쓰지 않았고, 문장도 적지 않았다. 대신 손끝으로 배의 등을 한번 쓸었다. 그러자 얇은 종이에서 아주 작은 바스락 소리가 났다. 정희는 그 소리를 오래 들었다. 무언가 떠나는 소리라기보다, 겨우 남아 있는 소리에 가까웠다.
밖으로 나오니 골목의 공기가 한결 차가워져 있었다.
낮에 남아 있던 온기가 시멘트 바닥에서 조금씩 빠져나가고, 분식집 문틈으로 새어 나온 국물 냄새가 바람을 타고 번졌다. 멀리 강 쪽에서는 물 냄새가 났다. 정희는 골목 끝에 서서 잠깐 뒤돌아보았다. 문방구 유리문 너머, 노란 리본이 불빛을 받아 얇게 떠 있었다. 너무 가벼워 금방이라도 풀려날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그 자리를 오래 지키고 있었다.
그해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장마가 시작되자 가게 바닥은 늘 약간 축축했다. 학생들이 들고 오는 우산 끝에서 물이 떨어졌고, 문 앞 고무매트는 하루 종일 젖어 있었다. 색종이 상자 가장자리도 조금 눅눅해졌고, 영수증 끝은 공기만 먹어도 말려 올라갔다. 정희는 저녁마다 종이배 상자 뚜껑 대신 얇은 천 한 장을 덮어 두었다. 물기를 먹지 않게 하려는 뜻도 있었지만, 밤사이 먼지가 쌓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아침에 천을 걷어 내면 배들은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비 오는 날에는 어쩐지 어제보다 더 가까이 포개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로 기대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처럼.
여름방학 무렵에도 학생들은 가게에 들렀다.
보충수업을 마친 얼굴로, 햇빛에 달아오른 뺨으로, 땀에 젖은 셔츠 깃을 만지작거리며. 누군가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왔다가 상자 앞에서 멈췄고, 누군가는 공책을 사러 왔다가 리본 하나를 가만히 넣고 갔다. 교복 대신 반팔 티셔츠를 입은 날에도, 머리를 묶지 않은 날에도, 상자 앞에 서는 학생들의 손끝은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장난스럽게 떠들다가도 그 앞에서는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어떤 자리에는 저절로 생기는 목소리의 높이가 있었다.
가을이 오면 햇빛은 다시 길어졌다.
오후 네 시쯤부터 가게 바닥에 금빛 사선이 눕기 시작했고, 유리병 속 구슬들은 그 빛을 오래 품었다. 정희는 가끔 병들을 닦다가 그 안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구슬은 사람 얼굴을 둥글게 비틀었고, 조개껍질은 빛을 흰 가루처럼 튕겨냈다. 상자 안의 종이배들도 가을빛을 먹으면 잠깐 더 단단해 보였다. 하지만 손끝으로 건드리면 여전히 쉽게 흔들렸다. 계절이 바뀐다고 해서 종이의 성질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쉽게 젖고, 쉽게 구겨지고, 그러면서도 한번 접힌 선은 오래 남는 것. 사람 마음도 그와 비슷하다고 정희는 생각했다.
겨울에는 문고리가 다시 차가워졌다.
학생들은 장갑 낀 손으로 동전을 세다가 자꾸 떨어뜨렸고, 입김은 유리문에 잠깐 원을 만들었다 사라졌다. 분식집 아주머니는 가끔 뜨거운 어묵 국물을 종이컵에 담아 건네주었고, 정희는 빈 컵을 세탁소 앞 쓰레기통에 버리며 골목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잎이 다 떨어진 가지들 사이로 해가 금방 기울었다. 해가 짧은 계절엔 하루가 빨리 지나갔지만, 이상하게 저녁은 더 오래 남았다. 문방구 불을 끄고도 가게 안에는 얼마간 따뜻한 형광등 냄새가 머물렀다. 정희는 그 냄새를 맡으며 상자 앞에 잠깐 멈춰 서곤 했다. 종이배들은 겨울에도 그대로였다. 차갑고 가볍고, 그러나 서로 기대어 쓰러지지 않는 모양으로.
해가 바뀌고 다시 봄이 왔다.
목련은 또 하루에 두어 장씩 열렸고, 문고리는 다시 풀렸다. 정희는 문방구 유리문에 새 노란 리본을 묶었다. 너무 진하지 않은 색으로, 햇빛을 얇게 접어 놓은 것 같은 색으로. 매듭을 지을 때마다 리본 끝이 손등을 한 번씩 스쳤다. 차갑고, 가볍고, 잠깐이었다. 그런데도 그 감촉은 오래 남았다. 손등에서 지워진 뒤에도 한동안 거기 있었던 것처럼.
그날 오후에도 학생들이 들어왔다.
이제 다윤과 같은 학년이었을 학생들이었고, 어쩌면 그보다 한 살쯤 어린 학생들이기도 했다. 얼굴은 달랐지만 웃는 법은 비슷했다. 셔츠 소매를 걷는 버릇, 동전을 셀 때 혀끝을 잠깐 내미는 습관, 친구를 부르는 목소리의 끝이 살짝 올라가는 방식. 사람은 바뀌어도 나이는 비슷한 표정을 되풀이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저렸다. 사라진 것은 단지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나이 전체의 봄이었고, 그 계절이 가질 수 있었던 무수한 오후들이었다.
어느 날은 졸업한 뒤 오랜만에 들른 학생이 상자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정희가 얼굴을 익히던 아이였는데, 이제는 교복 대신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접힌 메모지를 꺼내더니 상자 안에 조심히 넣었다. 종이배는 아니었다. 정희가 아무 말 없이 보고 있자 그가 낮게 말했다.
“접으면 자꾸 찢어져서요.”
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뒤에는 더 붙을 문장이 많았을 텐데, 그는 붙이지 않았다. 붙이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있었다. 찢어진다는 말 하나만으로도 다 전해지는 오후가 있었다.
어느 해 사월에는 비가 왔고, 어느 해에는 바람이 유난히 셌고, 어느 해에는 하늘이 너무 맑아서 오히려 눈이 시렸다. 정희는 그럴 때마다 골목 끝까지 걸어가 강가를 보았다. 강은 바다가 아니었지만, 저녁의 물은 늘 어디선가 이어져 온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두운 수면 위에 다리 불빛이 잘게 부서졌고,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그 조각들이 한 번 접혔다가 다시 펴졌다. 정희는 물가에 서면 자주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종이를 접고, 리본을 묶고, 봉투를 펼치던 손. 사람을 붙들지 못한 대신 남은 것들을 오래 만지게 된 손.
상자 맨 아래의 편지는 해마다 한 번쯤 다시 펼쳐졌다.
정희는 어느 날은 마지막 줄까지만 읽었고, 어느 날은 첫 줄에서 멈추었다.
봄이 오면 당신들이 먼저 떠올라요.
그 문장을 읽고 나면 언제나 문방구 안의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아무 일도 없는데 냉장고 소리가 더 또렷해지고, 바람에 들린 영수증 끝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정희는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을 때마다 종이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눌렀다. 접힌 선은 오래되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윤의 얼굴은 해가 지날수록 또렷해지는 데가 있었다.
잊혀지는 부분보다 남는 부분이 더 선명했다. 노란색도 종류가 많다고 하던 표정, 고무오리는 너무 대책 없이 귀엽다고 말하던 입술 끝, 봉투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던 손가락, 비 오는 날 젖은 운동화 끈. 죽은 사람은 종종 너무 크고 무거운 이름으로만 남지만, 다윤은 그런 식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색종이를 고르던 눈동자와, 웃음 끝에 남는 숨과, 리본을 빛에 비춰 보던 손끝으로 남아 있었다. 정희는 그 점이 다행인지, 더 견디기 어려운 일인지 오래 알지 못했다.
봄날 저녁, 유리문에 매단 리본이 흔들릴 때면 정희는 종종 문득 고개를 들었다.
방금 문이 열릴 것 같아서. 종이종이 울리고, 젖은 우산이 문 옆에 세워지고, 누군가 “사장님” 하고 부를 것 같아서.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몸은 가끔 먼저 기억했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서도, 사람의 몸은 한동안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해로부터 십여 년이 흐른 어느 사월 저녁, 정희는 가게 문을 닫고 조금 늦게까지 안에 남아 있었다.
바깥은 이미 어두워졌고, 분식집 불도 꺼진 뒤였다. 골목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정희는 상자 안의 종이배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오래 눌려 모양이 무너진 것들은 살짝 펴 주고, 끝이 벌어진 것들은 손끝으로 눌렀다. 어떤 배는 종이가 누렇게 바래 있었고, 어떤 배는 아직도 흰빛을 조금 지니고 있었다. 노란 리본 한 줄이 맨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 리본은 너무 오래 접혀 있었는지 가운데가 납작하게 꺾여 있었다.
정희는 그 리본을 꺼내 손바닥 위에 펴 보았다.
아주 얇은 천이었다. 빛이 없는데도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노란 기운을 띠고 있었다. 한쪽 끝이 조금 헤져 있었다. 정희는 그것을 유리문 손잡이에 새로 묶지 않고, 상자 가장 위에 놓아 두었다. 종이배들 사이에 노란색 한 줄이 조용히 눕자,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날 밤 강가에는 바람이 거의 없었다.
물은 넓고 검었고, 다리 위 불빛만 길게 흔들렸다. 정희는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금 사이에는 오래된 종이 가루 같은 것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실은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그는 주머니에서 흰 색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제는 접는 순서를 생각하지 않아도 손이 먼저 알았다. 반을 접고, 펴고, 모서리를 맞추고, 눌렀다. 종이배 하나가 손바닥 위에 올라왔다.
정희는 이번에도 그것을 물에 띄우지 않았다.
물가에 앉아 있으면 종종 무엇이든 띄워 보내야 할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지만, 꼭 물 위로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남겨 두는 방식도 있었다. 젖지 않도록, 찢어지지 않도록, 그러나 사라지지도 않도록. 정희는 배를 두 손 사이에 올려놓고 한참 있다가 다시 주머니 속에 넣었다. 종이가 구겨질까 조심해서 손바닥을 반쯤 펴 둔 채로.
돌아오는 길에 문방구 앞에 서 보니 유리문 안쪽으로 상자가 보였다.
형광등은 꺼져 있었고, 가로등 불빛만 비스듬히 들어와 상자의 테두리를 어둡게 드러내고 있었다. 종이배들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윤곽으로만 보였다. 가벼운 것들은 빛이 약할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무거운 것은 그림자로 가라앉고, 가벼운 것은 윤곽으로 떠올랐다.
정희는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쇠는 낮 동안의 온기를 다 잃고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래도 손을 떼고 나면 금속의 온도보다 자기 손바닥의 온기가 더 오래 남았다. 봄이면 늘 그랬다. 금방 식을 것 같은 것들이 생각보다 늦게 식었다. 금방 사라질 것 같은 말들이 오래 남았다. 오늘 햇빛 좋다, 같은 말. 바람이 좀 차갑다, 같은 말. 노란색이 생각보다 안 촌스럽다, 같은 말. 그런 말들은 삶의 가장 바깥쪽에 놓여 있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가장 안쪽에서 다시 들렸다.
다음 날 아침 정희는 일찍 가게 문을 열었다.
목련은 거의 다 피어 있었고, 골목 바닥에는 어제보다 빛이 조금 더 길게 누워 있었다. 분식집 아주머니가 빗자루로 문 앞을 쓸고 있었고, 세탁소 안에서는 다리미 김이 새어 나왔다. 정희는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상자부터 바라보았다. 밤새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상자는 제자리에 있었고, 안의 배들도 그대로였다. 다만 맨 위, 노란 리본 옆에 작은 배 하나가 더 놓여 있었다.
정희는 잠깐 멈춰 섰다.
문을 잠그기 전에 자신이 넣고 간 배와는 모양이 달랐다. 더 작고, 더 반듯했다. 언제 누가 넣고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새벽에 다녀간 사람이 있었을까. 혹은 전날 저녁, 문을 닫기 직전 미처 보지 못한 걸까. 정희는 상자 가까이 다가가 배를 들어 올렸다. 흰 종이였고, 안쪽 바닥에 아주 작은 글씨로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잘 지내요.
그 글씨를 보는 순간 정희는 한동안 숨을 수 없었다.
글자는 너무 평범했고, 그래서 더 아팠다. 아무 꾸밈도 없는 네 글자. 위로도 아니고 약속도 아닌, 그저 건너가는 말 같은 문장. 그런데 그 말이 상자 안에 놓인 종이배들보다 더 가벼워 보여서, 오히려 더 멀리 갈 것 같았다. 정희는 손끝으로 글씨를 한번 따라가 보았다. 연필 자국이 종이 위에 아주 미세하게 패여 있었다.
유리문 밖에서 학생들이 지나가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시험이 망했다고 했고, 누군가는 체육 시간에 발목을 삐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점심 반찬이 별로였다고 투덜거렸다. 그런 소리들이 골목으로 흘러들어 왔다가 다시 멀어졌다. 정희는 그 소리들을 가만히 들었다. 살아 있는 하루의 소리였다. 배고프고, 지루하고, 우습고, 투덜거리는 쪽으로 기운 소리. 한때 다윤도 그 속에 있었을 것이다. 색종이를 고르고, 친구를 밀치고, 노란 리본을 빛에 비춰 보던 웃음으로.
정희는 배를 다시 상자에 내려놓았다.
종이배들 사이에, 노란 리본 옆에, 오래된 편지가 눌린 자리 위에. 정희는 상자 뚜껑 대신 덮어 두던 얇은 천을 걷어 옆으로 치웠다. 오늘은 덮어 두고 싶지 않았다. 봄빛이 그대로 닿게 두고 싶었다. 유리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상자 가장자리를 더듬었고, 흰 종이배들의 접힌 선 위에 엷은 금빛을 올려놓았다. 노란 리본은 그 빛 속에서 잠깐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노란색도 종류가 많다고 하던 얼굴, 고무오리는 너무 대책 없이 귀엽다고 하던 목소리, “제가 편지를 줄 사람에게요” 하고 봉투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던 손끝, 종이의 결을 한 번 쓸어 보고서야 접기를 시작하던 습관 같은 것들이 해마다 사월이 오면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정희는 봄이 오면 새 리본을 묶고, 상자 앞에 색종이를 다시 채워 두었다.
누군가 또 배를 접어 넣고 갈지 몰랐고, 아무도 넣지 않더라도 상자는 그 자리에 있어야 했다. 가게 안의 가장 작고 가벼운 자리에, 그러나 가장 오래 비워 둘 수 없는 자리로. 종이배를 놓아 주세요. 그 문장은 여전히 상자 앞면에 붙어 있었다. 연필 자국은 조금 흐려졌고, 종이 모서리는 세월에 닳아 보풀이 일어났지만, 글씨는 아직 읽을 수 있었다.
봄은 또 문고리부터 풀릴 것이고, 목련은 하루에 두어 장씩만 열릴 것이며, 학생들은 여전히 샤프심을 사고 음료를 고르고 웃고 떠들 것이다.
그리고 어떤 오후에는, 아주 연한 노란 리본이 빛에 닿아 가볍게 흔들릴 것이다. 정희는 그때마다 알고 있었다. 너무 가벼워서 금방 사라질 것 같은 것들이, 실은 가장 오래 사람 곁에 남는다는 것을. 종이 한 장, 리본 한 줄, 잘 지내요 같은 짧은 말 하나가, 차가운 물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을.
그래서 문방구 안에는 여전히 작은 상자가 있고, 그 안에는 배들이 있다.
서툴게 접힌 것, 반듯하게 접힌 것, 이름이 적힌 것, 아무 말도 없는 것. 서로 기대고 눌리며 조금씩 모양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배의 꼴을 하고 있는 것들. 그 가벼운 것들이 한데 모여, 한때 바다 쪽으로 떠났던 봄을 붙들고 있다. 손으로는 오래 붙잡을 수 없는 계절을, 종이의 접힌 선과 리본의 매듭과 짧은 문장들로 겨우 여기에 묶어 두고 있다.
정희는 오늘도 셔터를 올리고 문고리를 잡는다.
쇠는 미지근하고, 목련은 더 피었고, 골목에는 분식집 국물 냄새와 새 종이 냄새가 섞여 있다. 유리문 종이종이 작게 울리고, 누군가 들어온다.
그 소리 뒤로, 오래전 한 학생이 웃으며 빛 쪽으로 노란색을 들어 보이던 손끝이 잠깐 따라오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러면 정희는 고개를 들고, 아무 말 없이, 상자 쪽을 한 번 본다.
가벼운 것들은 아직 거기 있다.
봄도 아직, 다 가버리지 않았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