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지 않은 계절을 기다리며
비가 오려는지, 하늘은 하루 종일 낮은 곳으로 내려와 있었다. 구름은 무겁게 처져 있었고, 골목의 전깃줄에는 오래전부터 매달려 있던 먼지가 축축한 기운을 머금은 채 검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런 날에는 도시 전체가 마치 한 번쯤 깊은 한숨을 쉰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곤 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지만, 끝내 울지 않고 버티는 얼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하루를 계속 넘겨야 하는 사람의 표정 같은 것.
서른도 되기 전인데 벌써 너무 오래 살아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저녁들이 있었다. 스물아홉의 민재에게는 요즘의 날들이 꼭 그랬다.
그는 오래 걷는 사람이었다. 목적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대학을 졸업한 지도 사 년이 넘었고, 자격증 시험은 세 번째 낙방했고, 면접은 붙지 않았고, 붙더라도 조건이 맞지 않았고, 조건이 맞아도 그가 버티지 못했다. 이력서 파일 이름은 날짜만 바뀐 채 늘 같은 내용이었고, 자기소개서의 문장들은 점점 닳아갔다. “도전정신”, “성실함”, “협업능력” 같은 말들이 자신의 삶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광고 문구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앞으로 잘될 거야’라는 말보다 ‘오늘도 살아냈네’라는 말이 훨씬 더 진실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가 사는 곳은 반지하 원룸이었다. 창문이라고는 골목 바닥과 평행한 작은 사각형 하나뿐이라, 누군가 지나가면 발목과 신발만 보였다. 아침이면 배달 오토바이의 소음이 가장 먼저 들어왔고, 밤이면 술 취한 사람들의 웃음이 가장 오래 머물렀다. 방 안에는 한때 꿈이라고 부르던 것들의 흔적이 조금씩 쌓여 있었다. 취업 준비 책, 접힌 면접 정장, 다 마시지 못한 캔커피, 벗어둔 양말, 충전기를 꽂아둔 채 켜지지 않는 노트북, 그리고 침대 옆에 놓인 종이상자 하나. 그 안에는 버리지 못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떨어진 수험표, 헤어진 연인이 남기고 간 엽서, 부모님이 보내준 반찬통 뚜껑, 군대에서 받은 편지, 오래전 친구와 찍은 사진, 그리고 손바닥만 한 메모지 몇 장.
메모지 가운데 하나에는 어머니의 글씨가 있었다.
힘들면 그냥 내려놔도 돼. 그래도 너는 우리한테 소중해.
민재는 그 문장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더 울고 싶어졌다. 내려놔도 된다는 말이 위로인 줄 알았는데, 어떤 날에는 그 말조차 너무 멀게 느껴졌다. 무엇을 어떻게 내려놔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한 사람은 하루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눈을 뜨면 다시 밥을 먹고, 씻고, 메일을 확인하고, 지원 공고를 보고, 부족한 돈을 계산하고, 통장 잔액을 확인하고, 두려움을 숨긴 얼굴로 부모님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포기하는 것에도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는 이미 너무 많이 닳아 있었다.
그날 저녁도 그는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삼각김밥과 캔커피로 저녁을 때우고 있었다. 고등학생 둘이 우산도 없이 뛰어가며 깔깔 웃었다. 운동화를 질질 끌며 지나가는 중년의 남자는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짜증 섞인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편의점 유리창에는 형광등 불빛이 번들거렸고, 자신도 그 속에 어렴풋이 비쳤다. 초점 없는 눈, 푹 꺼진 볼, 머리카락이 엉켜 있는 얼굴. 그는 잠깐 시선을 피했다.
그때 편의점 안쪽에서 아르바이트생이 나왔다. 회색 앞치마를 맨 여자였다. 민재보다 조금 어려 보였고, 얼굴은 희미하게 지쳐 있었지만 눈빛은 또렷했다. 그녀는 바닥에 뒤집어진 쓰레기통을 바로 세우더니 민재 옆 의자에 잠깐 기대듯 앉았다.
“오늘도 오셨네요.”
그가 놀라 그녀를 쳐다보자, 여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흘 연속 같은 시간에 오면 기억하죠.”
민재는 괜히 민망해서 삼각김밥 포장지를 만지작거렸다.
“아, 네.”
“여기 삼각김밥 참치마요는 먹다 보면 좀 물려요.”
“그래요?”
“네. 치킨마요가 더 나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아주 크게 웃는 건 아니었고, 입꼬리만 조금 올라가는 웃음이었는데 이상하게 사람을 안심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민재는 자기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웃으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웃음이 났다.
“다음엔 그걸로 먹어볼게요.”
“근데 그다음도 오실 건가 보네요.”
그녀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민재는 대답하지 못했다. 내일도 오늘과 비슷할 거라는 사실을 확인받는 일은 묘하게 쓸쓸했다. 여자는 그의 침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냥 일어나며 말했다.
“비 올 것 같으니까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가세요.”
그 말은 아주 평범한 말이었는데,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가세요. 누군가가 자신에게 들어갈 곳이 있는 사람처럼 말해준 것이 얼마 만인지 몰랐다.
그날 밤, 결국 비가 왔다. 골목 바닥에 떨어진 물방울들이 네모난 창문 아래로 차갑게 튀었다. 민재는 방 불을 끄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에서 들리는 윗집의 둔탁한 발소리, 냉장고의 작은 진동, 창밖으로 지나가는 차의 물 가르는 소리. 세상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계속 움직이고 있었고, 자신만 그 사이에 멈춰 선 것 같았다.
그는 휴대폰 메모장을 열었다. 한동안 비어 있던 페이지에 문장을 하나 적었다.
오늘 누군가 나한테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가라고 말했다.
그는 그 문장을 몇 번이고 읽었다. 별것 아닌 기록 같았지만, 이상하게 거기에는 하루를 버틴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온도가 있었다. 아주 미약한 불씨처럼.
며칠 뒤, 민재는 동네 도서관에 갔다. 냉방이 잘 되고 조용해서 취업 준비생들이 자주 가는 곳이었다. 그는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켰지만, 한 시간 동안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검색창만 열어둔 채 멍하니 앉아 있다가, 결국 3층 자료실로 올라갔다. 딱히 읽고 싶은 책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사람들이 말없이 책장을 넘기는 공간 속에 있고 싶었다. 자신의 실패가 유난히 크게 들리지 않는 장소. 아무도 서로를 묻지 않는 곳.
그는 문학 코너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소설책들은 이상하게도 늘 침착해 보였다. 세상이 무너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도 표지는 조용했고, 문장은 체온을 잃지 않았다. 그는 무심코 얇은 시집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쳤다가, 거기 적힌 문장 하나에 눈이 멈췄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붙들려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소리를 마음에 두고 살아간다.
민재는 책을 덮었다. 순간적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신에게는 지금 그런 목소리가 있나 생각했다. 떠올리려 하자 어머니의 메모,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말, 군대에서 함께 근무하던 선임이 야간 근무 후 건넸던 커피,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너는 너무 오래 혼자 버티려 한다”고 말했던 예전 연인의 목소리 같은 것들이 부스러기처럼 흩어져 떠올랐다. 다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문장들 속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지도 몰랐다.
도서관에서 나오자 비는 그쳐 있었다. 대신 저녁 공기는 젖은 나무 냄새를 품고 있었다. 민재는 이상하게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버스 종점 쪽 언덕까지 걸어 올라갔다. 그곳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고, 벤치 몇 개와 철제 운동기구, 그리고 놀이터가 있었다. 미끄럼틀은 오래돼서 색이 많이 바랬고, 모래밭은 잡초가 듬성듬성 올라와 있었다. 그네 하나가 바람도 없는데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벤치 끝에 어떤 노인이 앉아 있었다. 낡은 점퍼를 입고, 검은 비닐봉지를 발밑에 두고 있었다. 민재는 눈길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노인이 먼저 말을 걸었다.
“젊은 사람.”
민재는 잠깐 멈춰 섰다.
“예?”
“시간 있으면 잠깐만 앉아봐.”
수상하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노인의 얼굴은 이상할 만큼 해가 없었다. 오랫동안 바람을 맞아 닳은 얼굴, 그러나 묘하게 온순한 눈. 민재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노인은 자신의 봉지에서 따뜻한 캔커피 하나를 꺼내 건넸다.
“방금 자판기에서 뽑았는데, 두 개가 나와서.”
민재는 거절하려다가 받았다. 캔 표면이 손바닥에 뜨뜻하게 닿았다.
“감사합니다.”
노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없었고, 먼 아파트 단지에서만 저녁 방송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살다 보면,” 노인이 입을 열었다. “아무도 안 봐주는 것 같은 때가 있어.”
민재는 고개를 들었다. 노인은 앞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있었는지조차 모를 것 같고. 없어져도 세상은 그대로 굴러갈 것 같고.”
그 말은 너무 정확해서, 민재는 대꾸할 수 없었다.
“근데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고.”
노인은 웃지도 울지도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젊을 때 공장 다녔어. 야간조도 하고, 철야도 하고, 허리도 망가지고. 집안도 가난했고. 딸 하나 있었는데 아팠지. 어느 겨울에 정말 끝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진짜로. 그만두고 싶은 게 아니라, 내가 세상에서 빠져버리고 싶었던 적.”
민재는 캔커피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노인은 한참 뒤에 말을 이었다.
“근데 그날 집에 들어가는데, 우리 딸이 자다가도 내 구두 소리를 듣고 나오더라. 문틈으로. 그 조그만 애가 눈도 다 못 뜬 채 나를 붙잡고 그러는 거야. 아빠 왔어? 늦었네. 밥은 먹었어? 그 한마디에 내가 못 죽겠더라고.”
노인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어. 세상을 위해서도 아니고, 대단한 꿈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냥 누가 나를 기다렸구나. 누가 내 구두 소리를 알고 있구나. 그게 사람을 살게 하더라.”
민재는 목이 메었다. 이상하게도, 울음을 참으려 할수록 더 선명해지는 감정이 있었다. 자신은 누구의 구두 소리였을까. 누가 자신의 귀가를 알았을까. 떠올리자 어머니가 예전에 현관문 소리만 듣고도 “민재 왔니?” 하고 말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대학 기숙사에서 늦게 돌아오면 룸메이트가 졸린 눈으로 “왔냐” 하고 묻던 얼굴도. 편의점 알바생의 “오늘도 오셨네요”라는 인사도. 사라진 줄 알았던 연결들이 생각보다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노인은 다시 말했다.
“젊은 사람. 너무 혼자 있다고 생각하지 마.”
민재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울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노인은 모른 척해주었다. 다만 아주 천천히, 오래 말라버린 나무처럼 조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버티는 것도 실력이 아니야. 어떤 날엔 그냥 하루를 건너가는 거지. 그걸로 충분한 날이 있어.”
그날 이후 민재는 가끔 그 공원에 갔다. 하지만 노인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정말 우연히 만난 사람인지, 이상한 비유처럼 한 번만 나타난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날 들은 말은 계속 남았다. 버티는 것도 실력이 아니다. 그냥 하루를 건너가는 것이다. 그 말은 이상하게 마음을 편하게 했다. 자신이 약해서 힘든 게 아니라, 원래 삶이라는 것이 어떤 날엔 건너기 어려운 강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했기 때문이다.
계절은 조금씩 움직였다. 장마가 지나고, 볕이 무거워지고, 골목의 냄새가 눅눅함에서 뜨거운 아스팔트 냄새로 바뀌었다. 민재는 여전히 취업 준비를 했고, 여전히 불합격 메일을 받았고, 여전히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컵라면과 계란으로 끼니를 때웠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모든 절망을 하나의 결론처럼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오늘의 실패가 내일의 정체성을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 오늘의 무력감이 나라는 사람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
그는 도서관에서 작은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폐관 시간 이후 책을 정리하고 서가를 점검하는 일이었다. 돈은 많지 않았지만, 밤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는 감각이 그에게는 꽤 중요했다. 책을 제자리에 꽂고, 반납함을 비우고, 구겨진 열람증을 주워 정리하는 단순한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세상에는 크고 눈부신 성공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일은 조용히 흩어진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에 가까웠다. 그는 그 사실이 좋았다. 무너진 사람에게는 거대한 환호보다 작은 질서가 먼저 필요할 때가 있었다.
도서관에서 일하던 어느 밤,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폐관 방송이 나오고도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민재가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이제 마감 시간이라서.”
아이의 눈가가 빨갰다. 울었는지, 잠을 못 잤는지 모를 얼굴이었다. 아이는 가방을 챙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집에 가기 싫어요.”
민재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낯익은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를 재촉하지 않고, 물 한 병을 건넸다.
“잠깐 앉아 있을래?”
아이와 함께 로비 의자에 앉아 있자, 형광등 불빛이 유리문에 희게 번졌다. 아이는 한참 뒤에 말했다.
“엄마는 입원했어요. 아빠는 야간 일 나가고. 동생은 외할머니 집에 있고. 집에 가면 아무도 없어요.”
그 말 끝에 아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민재는 갑자기 자신이 스물아홉이 아니라 훨씬 더 오래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의 슬픔 앞에서는 먼저 닳은 마음이 반응할 때가 있었다.
“배고프니?”
아이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는 도서관 앞 분식집에서 김밥 두 줄과 어묵국물을 사 왔다. 아이는 처음엔 조심스럽게 먹다가 이내 허겁지겁 먹었다. 국물 김이 아이의 안경에 잠깐 서렸다 사라졌다. 민재는 그 모습을 보며, 예전의 자신도 누군가 앞에서 저렇게 먹은 적이 있었나 생각했다. 몹시 외로울 때는 음식조차 위로의 형식을 띠곤 했다.
“형은 여기서 일해요?” 아이가 물었다.
“응.”
“좋겠다.”
민재는 웃었다.
“근데 형은 좀 안 무서워 보여요.”
그 말에 민재는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신은 여전히 무섭고, 여전히 흔들리고, 여전히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덜 무서워 보이는 얼굴이 되었구나. 그는 그 순간 깨달았다. 사람은 완전히 회복된 다음에야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아직 상처가 남아 있는 채로도, 충분히 누군가 곁에 앉아줄 수 있다는 걸.
“너도 안 무서워질 거야.”
민재가 말했다.
“언제요?”
“잘 모르겠어. 근데 어느 날 갑자기, 예전보다 조금 덜 무서운 날이 올 거야. 완전히 괜찮아지는 건 아닐 수도 있는데, 그래도 오늘보단 나아질 거야.”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믿겨서인지, 믿기고 싶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때때로 확실한 진실보다 견딜 수 있는 가능성 하나가 더 필요했다.
그날 이후 민재는 도서관 로비 한쪽에 작은 메모판을 만들어도 되겠냐고 관장에게 제안했다. 익명으로 짧은 문장을 적어두고 서로 가져갈 수 있는 게시판이었다. 관장은 처음엔 시큰둥했지만, “청소년 정서 지원에도 좋을 것 같다”는 말에 허락했다. 코르크판 하나와 압정 몇 개, 색색의 메모지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처음 며칠은 아무도 쓰지 않았다. 민재는 맨 위에 자신의 글을 하나 적었다.
오늘을 버틴 당신에게, 오늘은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다음 날 누군가가 그 밑에 적었다.
엄마 수술 잘 끝나길.
그다음 날에는,
시험 망쳤는데 집에 못 말하겠음.
또 다른 날에는,
살이 안 빠져서 우울하지만 그래도 저녁 산책은 함.
어떤 메모는 우스웠고, 어떤 메모는 너무 슬퍼서 오래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메모판은 조금씩 채워졌다. 누군가는 “아르바이트 첫 출근 무사히 마치게 해주세요”라고 적었고, 누군가는 “취준생인데 자꾸 내가 쓸모없게 느껴짐”이라고 적었다. 또 누군가는 그 밑에 삐뚤한 글씨로 답을 달았다.
쓸모로만 사람값 정해지는 거 아니에요.
민재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누가 썼는지 몰랐다. 중학생일 수도, 주부일 수도, 실직한 누군가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익명의 문장은 정확하게 사람의 상처를 짚었다. 우리는 자꾸 자신을 쓸모로 증명하려 들고, 세상은 자꾸 성과로 사람을 분류한다. 그러나 사람이 정말 가장 약할 때 필요한 것은 “그래도 네가 있어도 된다”는 허락일지 모른다.
메모판은 조금씩 소문이 났다. 어떤 날은 학생들이 낄낄거리며 장난스러운 글을 붙였고, 어떤 날은 누군가 눈물 자국이 번진 메모를 남겼다. 민재는 퇴근 전 그것들을 정리하며 가끔 손끝으로 종이를 눌러 평평하게 펴주곤 했다. 그 순간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마음도 이렇게 구겨졌다가, 누군가의 손길 하나로 아주 조금 펴질 수 있지 않을까. 완전히 새것이 되지는 않아도, 다시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는.
여름 끝 무렵,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도 조금 친해졌다. 그녀의 이름은 유진이었다. 유진은 야간 대학을 다니며 낮에는 카페, 밤에는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돈이 급해서요”라고 덤덤하게 말했지만, 그녀의 손등에는 늘 피곤이 내려앉아 있었다.
어느 날 민재가 치킨마요 삼각김밥을 들고 계산대에 서자, 유진이 웃었다.
“드디어 갈아타셨네요.”
“추천받은 거니까.”
“후회 안 하실 거예요.”
민재는 삼각김밥을 봉지에 넣다가 물었다.
“유진 씨는 안 힘들어요?”
말해놓고도 무례했나 싶었지만, 유진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힘들죠. 엄청.”
그리고 덧붙였다.
“근데 저는 힘든 걸 없애는 법은 잘 모르겠고, 대신 힘든 날에 덜 망가지는 법은 조금 아는 것 같아요.”
“그게 뭔데요?”
유진은 손가락으로 하나씩 세었다.
“씻기. 밥 먹기. 빨래하기. 창문 열기. 좋아하는 노래 한 곡 듣기. 연락하기 싫어도 한 사람한테는 답장하기. 그리고 자책은 밤 열한 시 이후엔 하지 않기.”
민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되나요?”
“잘 안 되죠. 근데 규칙처럼 만들어두면 아주 조금 나아요. 사람은 무너질 때 거창한 철학보다 사소한 순서가 더 필요하더라고요.”
민재는 그 말을 마음에 적어두었다. 씻기, 밥 먹기, 빨래하기, 창문 열기. 이상하게도 그 목록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가장 기본적인 자리에서 확인시켜주는 것 같았다. 삶이 전부 무너진 것 같을 때조차, 물을 틀고 얼굴을 씻고, 뜨거운 밥을 입에 넣고, 젖은 수건을 널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끝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날 이후 민재는 작은 규칙을 만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창문부터 열기. 하루 한 번 햇빛 보기. 지원서 한 건 못 넣어도 샤워는 하기. 자기 전 메모장에 오늘 있었던 아주 작은 일 하나 적기. 처음에는 우스워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효과가 있었다. 사람은 거대한 희망으로만 버티는 게 아니었다. 사소한 반복이 바닥을 만들어줄 때가 있었다. 발이 완전히 빠져들지 않도록.
가을이 왔다. 도서관 앞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었다. 바람이 불면 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현관 앞에 쌓였다. 민재는 빗자루를 들고 낙엽을 쓸다가 문득 자신이 한여름보다 조금 덜 어둡다는 걸 알았다. 여전히 취업은 안 됐고, 여전히 미래는 선명하지 않았고, 여전히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예전처럼 모든 날이 절벽 끝 같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담담했지만, 민재는 금방 알았다. 어머니도 지쳐 있었다. 아버지의 허리 통증이 심해졌고, 식당 일은 손님이 줄었고, 동생 등록금도 걱정이라는 말이 이어졌다. 어머니는 끝내 “너한테 이런 말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민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늘 자신이 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가족 모두가 각자의 무게를 들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누구 하나 쉬운 사람은 없었다. 어른이라고 덜 무서운 것도 아니고, 부모라고 덜 흔들리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각자 티를 덜 내고 있을 뿐이었다.
“엄마.”
민재가 천천히 말했다.
“나 요즘 좀 괜찮아지고 있어.”
그건 과장이 아니었다. 완전히 괜찮아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전보다 나아지고 있다는 고백은 진실이었다.
어머니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물었다.
“정말?”
“응. 아직 멀었는데, 그래도 예전보단 나아.”
수화기 너머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울음을 참을 때 내는 소리였다.
“그 말 들으니까 안심이 된다.”
위로는 언제나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게 아니었다. 어떤 날은 부모가 자식을 살리고, 어떤 날은 자식의 짧은 한마디가 부모를 붙든다. 사람은 서로를 구원하진 못해도, 서로가 가라앉는 속도를 늦출 수는 있는 것이다. 그 정도면 아주 큰 일인지도 몰랐다.
겨울 초입, 도서관에는 ‘마음을 적는 밤’이라는 작은 행사를 열게 되었다. 민재가 만든 메모판이 반응이 좋아, 동네 주민들과 짧은 글을 나누는 낭독회를 하자는 제안이 나온 것이다. 거창한 행사는 아니었다. 따뜻한 차를 준비하고, 서로 익명으로 적은 문장 몇 개를 읽고, 원하면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나누는 정도였다.
그날 저녁,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왔다. 교복 입은 학생들, 아이를 재운 뒤 나온 듯한 젊은 엄마, 퇴근복 차림의 직장인, 혼자 온 노인, 머리가 희끗한 아주머니, 그리고 유진도 있었다. 편의점 유니폼 대신 두꺼운 니트를 입고 와 있었다. 민재는 사람들 앞에 서자 손이 떨렸다. 자신이 이런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그는 미완성의 사람이었고, 여전히 삶은 자주 흔들렸다.
하지만 시작해야 했다. 그는 준비해둔 종이를 펼쳤다가, 다시 접었다. 대신 그냥 있는 그대로 말했다.
“저도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언제 괜찮아지는지, 왜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 어려운 날이 계속 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 취업도 못 했고, 여전히 불안하고, 어떤 날은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힘듭니다.”
그는 숨을 한번 고르고 계속 말했다.
“그런데도 제가 여기 서 있는 이유는, 완전히 괜찮아진 다음에만 다른 사람 곁에 설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조금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어떤 날은 같이 떨고 있는 사람끼리도 서로 붙잡을 수 있더라고요. 거창한 말이 아니라, ‘밥 먹었어?’, ‘늦지 않게 들어가’, ‘오늘은 그걸로 충분해’ 같은 말로도요.”
앞줄에 앉은 어떤 여자가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우리는 자꾸 강해져야 한다고 배웁니다. 빨리 회복해야 하고, 더 나아져야 하고, 뒤처지면 안 된다고. 그런데 저는 요즘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꼭 강하지 않아도 된다고.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무너진 뒤에도 다시 일어나 앉는 사람이면 된다고.”
민재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차분해졌다.
“혹시 지금 너무 힘든 분이 있다면, 꼭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당신이 아직 도착하지 못한 사람이어도, 실패한 사람처럼 보여도, 남들보다 늦은 사람이어도, 사라져도 되는 사람은 아닙니다. 오늘 아무것도 못 한 것 같아도 숨 쉬고 집에 돌아온 것만으로 충분한 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삶은 원래 그렇게, 어떤 날은 아주 작은 일로 겨우 이어집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 오늘의 자신을 너무 쉽게 버리지 마세요. 아직 다 지나가지 않았으니까요. 당신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당신보다 먼저 알아보는 사람들이 분명 있으니까요.”
낭독회가 끝난 뒤 사람들은 말없이 차를 마셨다. 어떤 이는 메모를 남기고 갔고, 어떤 이는 서로 모르는 사람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진은 돌아가기 전 민재에게 말했다.
“오늘 좋았어요.”
“좀 오글거리진 않았어요?”
“조금.”
유진이 웃었다.
“근데 진심이었잖아요.”
진심이었다. 민재는 그 사실 하나가 이상하게 마음을 놓이게 했다. 잘 만들어진 문장보다 덜 매끈해도, 진심은 사람에게 오래 남는다.
그날 밤 그는 반지하 방으로 돌아왔다. 예전과 같은 방이었다. 좁고, 습기가 차고, 겨울 바람이 틈새로 들어오는 방. 하지만 방 안의 공기는 아주 조금 달라져 있었다. 아니, 달라진 것은 아마 방이 아니라 그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는 창문 아래 앉아 휴대폰 메모장을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적기 시작했다.
사람은 완전히 빛나는 상태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꺼지기 직전의 불씨를 두 손으로 감싸듯 살아가는 날이 더 많다. 오늘의 나는 대단하지 않다. 여전히 흔들리고, 자주 겁이 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흔들린다는 것은 부서졌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겁이 난다는 것은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의 한마디가 하루를 건너게 하고, 어떤 익명의 문장이 밤을 지나게 하며, 아주 사소한 생활의 순서가 마음을 붙들어 준다는 것을.
그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적었다.
나는 지금도 자주 넘어질 것이다. 다시 무력해질 것이고, 어떤 계절에는 너무 오래 울 수도 있다. 그래도 예전처럼 나를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의 나를 내일의 내가 데리러 올 수 있도록. 아직 피지 않은 내 안의 시간들을 너무 빨리 버리지 않도록.
문장을 다 쓰고 나니 새벽이 가까워져 있었다. 창문 밖 골목은 조용했고, 먼 데서 택시 지나가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그는 전등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은 여전히 낮고, 겨울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날의 어둠은 전보다 덜 깊었다. 어둠 속에도 사람을 살리는 것들이 섞여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기다림, 다정한 인사, 익명의 문장, 함께 떨던 저녁, 따뜻한 캔커피, 돌아갈 곳이 있다고 말해주는 한마디.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리 지쳐도 끝내 자신을 완전히 내놓지 않는 마음.
다음 날 아침, 민재는 알람보다 먼저 눈을 떴다. 습관처럼 다시 누워 있고 싶었지만,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먼저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고, 아직 햇빛이 들기 전의 흐린 푸른빛이 방 안으로 번졌다. 골목을 청소하는 빗자루 소리가 들렸다. 어딘가에서는 밥 짓는 냄새도 났다. 세상은 여전히 완벽하지 않았고, 자신도 아직 도중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알았다. 도중이라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진행형이라는 뜻이라는 걸.
그는 세수를 하고, 어젯밤에 벗어둔 옷을 정리하고, 물을 끓였다. 컵라면 대신 밥솥에 남아 있던 찬밥을 데워 계란프라이를 얹었다. 식탁이라고 하기 민망한 작은 상 위에 그릇을 놓고 앉아 한 숟갈을 떠먹었다. 소박하고 조금 싱거운 아침.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아침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 그는 문득 부모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아침 챙겨 먹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잠시 뒤 어머니에게 답장이 왔다.
그래. 잘했어. 아들
민재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웃었다. 잘했어. 아들. 살아가는 데는 때때로 정말 그 정도면 충분했다. 거대한 승리도,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성취도 아닌, “오늘 밥 먹었다” “무사히 돌아왔다” “아직 있다” 같은 말들. 그 소박한 문장들이 사람을 다음 날까지 데려간다.
그날 저녁 도서관 메모판에는 새 글이 하나 붙어 있었다. 아주 삐뚤고 작은 글씨로.
어제 낭독회 듣고 집에 가서 울었어요. 그래도 오늘 학교 갔어요.
그 아래에는 또 다른 누군가의 답이 달려 있었다.
잘했어요. 정말 잘했어요.
민재는 그 메모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세상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가혹했고, 누군가는 오늘도 견디기 어려운 하루를 통과하고 있을 것이다. 청춘은 찬란하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밤을 자주 건넜고, 어른들 또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오래 흔들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이상하리만치 계속 살아낸다. 서로를 완벽히 구해내지 못해도, 서로에게 한 칸의 의자가 되어주면서. 잠깐 기대어 울 수 있는 벽이 되어주면서. “괜찮아”라고 함부로 말하지 못할 때는 대신 “네가 여기 있어도 된다”고 말해주면서.
민재는 메모지 한 장을 꺼내 조용히 적었다.
당신이 늦게 오더라도, 느리게 가더라도, 자주 주저앉더라도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너무 서둘러 자신을 잃지 마세요.
오늘의 당신은 아직 끝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그 메모를 제일 위에 붙였다. 그리고 한 발짝 물러나 읽었다. 문장은 여전히 완벽하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삶도 완벽하지 않은 채 계속되니까. 누구는 취업에 성공하고, 누구는 병원비를 감당하고, 누구는 이별을 견디고, 누구는 가족을 먹여 살리고, 누구는 불면을 견디며 새벽을 넘긴다. 우리는 각자의 전선에서 너무 조용히 싸우고 있어서 서로의 전투를 잘 모른다. 그래서 더 자주 말해줘야 한다. 너만 그런 게 아니라고. 무너진 날에도 사람은 사람이라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은 날에도 네 존재는 삭제되지 않는다고.
바깥에는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주 가늘고 성긴 눈발이었다. 유리문 밖으로 떨어지는 흰 점들을 보며 민재는 생각했다. 눈은 한꺼번에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처음에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미세하게 내린다. 그러나 어느 순간 길가의 색이 달라져 있고, 지붕 위에 얇은 빛이 내려앉아 있다. 위로도 아마 그런 것일지 모른다. 당장 인생을 바꿔주지는 못해도, 어느 한 사람의 하루 위에 조금씩 쌓여서, 그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것.
그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처음 내리는 겨울의 눈, 아직 멀리 있는 봄, 그 사이를 건너야 하는 수많은 날들. 그리고 그 모든 날 속에서도 끝내 버려지지 않을 어떤 마음.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일인지도 몰랐다.
아주 캄캄한 밤에도, 누군가의 말 한 조각을 품고
자기 자신을 다 잃지 않은 채
조금 느리고 서툴게라도
다음 날 쪽으로 걸어가는 일.
그리고 혹시 오늘, 너무 오래 울어버린 사람이 있다면
아무리 애써도 마음이 바닥까지 꺼져버린 것 같은 사람이 있다면
꼭 이 말만은 남겨두고 싶다.
당신은 아직 늦지 않았다.
당신은 아직 다 지나간 사람이 아니다.
세상이 너무 빨라서, 사람들이 너무 쉽게 비교해서,
당신이 자꾸 자신을 낡은 실패처럼 여기게 될지라도
당신 안에는 아직 불리지 않은 이름들과
도착하지 않은 계절들과
쓰이지 않은 문장들이 남아 있다.
그러니 오늘의 자신을 너무 성급히 단정하지 말기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겨우 숨을 고르고 있는 지금조차
당신은 분명, 삶의 안쪽에 있다.
잘 살아내지 못해도 괜찮다.
가끔은 무릎을 꿇고 가도 괜찮다.
멈춰 서서 울고, 길가에 앉아 쉬고,
누군가의 말 하나로 다시 천천히 움직여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아직 여기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디
당신도 당신을 버리지 말기를.
그 문장을 적고 난 뒤에도 민재는 오래 도서관 유리문 앞에 서 있었다. 어두운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여전히 어딘가 지쳐 있었고, 여전히 완전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텅 빈 얼굴은 아니었다. 사람의 표정에도 아주 미세한 계절의 이동 같은 것이 있어서, 무너진 시간의 끝자락에서는 잘 보이지 않다가도 어느 날 문득 달라져 있곤 했다. 그는 그 미세한 변화가 두려웠다기보다, 이제는 조금 소중했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자기 안에서 천천히 자라고 있는 것들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겨울은 더 깊어졌다. 도서관 난방기에서는 마른 공기가 나왔고, 사람들은 코트를 여미고 책장을 넘겼다. 민재는 여전히 밤마다 서가를 정리하고, 반납된 책의 바코드를 찍고, 어쩌다 누군가 두고 간 머리끈이나 장갑을 정리함에 넣어두었다. 어느 날은 학생들이 두고 간 참고서 사이에서 접힌 메모를 발견했고, 어느 날은 누군가 펼쳐둔 채 잠든 시집을 조심히 덮었다. 그런 일들에는 대단한 이름이 붙지 않았지만, 그는 그 작은 움직임들 속에서 이상한 안정을 느꼈다. 흩어진 것들을 다시 자리로 돌려놓는 일.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을 사물들에게 알려주는 일. 그것은 어쩌면 사람을 대하는 일과도 닮아 있었다.
연말이 가까워질 무렵, 도서관 관장이 사무실에서 민재를 불렀다. 민재는 자기가 메모판을 너무 오래 방치했나, 혹은 낭독회 정산에 뭔가 문제가 있었나 잠깐 긴장했다. 그러나 관장은 의외로 부드러운 표정으로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거 한번 봐요.”
지역 청년지원센터에서 계약직 행정지원 인력을 채용한다는 공고였다. 주 업무는 프로그램 운영 보조, 문서 정리, 이용자 응대, 사업 자료 취합. 자격 요건은 평범했고, 특별한 스펙을 요구하는 자리도 아니었다. 다만 우대 항목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지역 청년 지원 프로그램 운영 경험자, 상담 및 행정 보조 경험자 우대.
민재는 한참 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관장이 말했다.
“민재 씨가 해볼 만할 것 같아서.”
“제가요?”
“왜요. 도서관에서 한 게 전부 경험이죠. 메모판도 그렇고, 행사 준비도 그렇고, 사람들 응대도 그렇고.”
민재는 종이를 쥔 채 잠시 말이 없었다. 자신이 지금껏 해온 일들을 누군가 경험이라고 말해주는 것이 낯설었다. 그는 늘 그것들을 임시방편처럼 여겨왔다. 버티기 위해 붙잡은 조각들. 그런데 누군가는 그것을 하나의 이력으로 보고 있었다.
관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덧붙였다.
“민재 씨는 사람을 조급하게 안 대해요. 그게 생각보다 중요한 거예요.”
그날 저녁, 민재는 반지하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 화면 위에 공고문을 띄워놓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가슴 한쪽이 아주 조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청년지원센터. 누군가가 넘어지지 않게 잠깐 받아주는 자리. 누군가에게 연결점을 만들어주는 자리. 그는 공고문을 다시 읽었다. 업무는 소박했고, 급여도 아주 넉넉하진 않았고, 계약직이라는 말은 여전히 불안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공고는 그가 여태껏 보아온 수많은 채용 공고들과 달랐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자신이 스며들 자리가 조금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기소개서를 쓰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예전처럼 멋있어 보이는 문장부터 쓰지 않았다. 오히려 무엇을 버텨왔는지를 먼저 떠올렸다. 취업 실패의 연속, 사라지고 싶던 저녁들, 도서관에서 만난 아이, 익명의 메모판, 누군가의 울음이 번진 종이. 그는 이번에는 자신을 빛나게 포장하려 하지 않았다. 화려한 성취 대신 자신이 배운 태도를 쓰고 싶었다. 오래 불안한 사람 곁에서는 빠른 해결보다 오래 들어주는 태도가 더 필요하다는 것. 무기력한 얼굴 앞에서는 충고보다 지워지지 않는 응대가 먼저라는 것. 그는 몇 번이고 문장을 고쳤고,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저는 빠르게 성공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너지는 시간을 오래 지나온 만큼, 누군가의 느린 걸음을 함부로 재촉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가 겪은 시간은 뒤처짐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문장을 다 쓰고 나니 밤이 깊어 있었다. 골목 아래로 누군가 귀가하는 발소리가 지나갔고, 창틀 틈으로 스며드는 찬 공기가 손등에 닿았다. 그는 제출 버튼 위에 마우스를 올려둔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기대는 늘 두려움을 데리고 왔다. 다시 떨어지면 어쩌지. 괜히 희망을 품었다가 또 무너지면. 그러나 이번에는 그 두려움과 함께 아주 작고 단단한 다른 감정도 있었다. 이 문장만큼은 거짓이 아니라는 감각. 결과가 어떻든 적어도 그는 이번에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 그는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제출 버튼을 눌렀다.
며칠 뒤 오후, 메일 알림 소리가 울렸다. 민재는 도서관 열람실 한쪽에서 공공근로 신청서를 정리해주던 중이었다. 습관처럼 기대 없이 메일함을 열었고, 순간 화면을 다시 봐야 했다. 서류 전형 합격 안내. 면접 일정 안내. 그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처음에는 발신자를 의심했고, 제목을 다시 읽었고, 본문을 끝까지 내렸다. 서류 합격이라는 말이 아무리 짧아도, 그것이 사람 한 명의 시간 속에서 차지하는 면적은 생각보다 컸다. 너무 오래 닫혀 있던 문 앞에 서 있으면, 문이 정말 열릴 때에도 사람은 곧바로 기뻐하지 못한다. 오히려 믿기지 않아서 잠시 멈춰 서게 된다.
그날 밤 편의점에 들렀을 때, 유진은 민재의 얼굴을 보자마자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서류 붙었어요.”
유진은 계산하던 손을 멈추고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평소보다 조금 더 크게 번졌다.
“진짜요?”
민재는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면접 남았지만요.”
“그래도 붙은 거잖아요.”
유진은 냉장고에서 비타민 음료 하나를 꺼내 계산대 위에 올려두었다.
“이건 서비스.”
“또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오늘만 괜찮아요.”
민재는 병을 받아 들며 웃었다. 갈색 유리병이 손안에서 조그맣게 차가웠다.
“긴장돼요.”
“좋죠.”
“뭐가요?”
“긴장된다는 건 아직 포기 안 했다는 뜻이니까.”
그 말은 짧았지만, 이상하게 면접 준비 내내 그의 마음속에 남았다.
면접 전날 밤, 그는 낡은 정장을 꺼내 다림질을 했다. 셔츠의 주름을 펴고, 구두에 묻은 먼지를 닦고, 예상 질문을 적은 노트를 다시 펼쳤다. 거울 앞에 서자 여전히 부족한 얼굴이 보였다. 어깨는 조금 말려 있었고, 표정에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불안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예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그 얼굴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 얼굴은 실패의 얼굴이 아니라 살아남은 얼굴이었고, 오래 흔들렸지만 끝내 여기까지 걸어온 얼굴이었다. 그는 거울을 보며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가보자.”
면접장 건물은 지하철역 근처 행정복지센터 뒤편에 붙은 회색 건물이었다. 로비에는 건조한 난방 냄새가 났고, 벽에는 청년 취업 지원 프로그램 안내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그는 대기 의자에 앉아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손끝이 차갑게 떨렸다. 이름이 불렸을 때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면접실로 들어갔다.
세 명의 면접관이 앉아 있었다. 질문은 평범했다. 지원 동기, 업무 이해도, 문서 정리 경험, 민원 응대 경험, 컴퓨터 활용 능력. 민재는 준비한 대로 답하다가 몇 번 목이 말랐다. 어떤 질문 앞에서는 머릿속이 순간 하얘지기도 했다. 하지만 한 면접관이 “청년지원센터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오히려 마음이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질문만큼은 외워온 답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직접 꺼낼 수 있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빠른 해결을 약속하는 것보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당장 해결되지 않더라도 끝까지 응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면접관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민재는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다.
“힘든 상황에 있는 청년들은 이미 여러 번 무시당했거나, 스스로도 자신을 포기한 상태로 오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필요한 건 정답을 빨리 말하는 사람보다, 그 사람 말을 끊지 않고 받아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완벽한 답을 줄 수는 없어도, 함부로 단정하지 않고 필요한 정보를 끝까지 연결하는 직원이 되고 싶습니다.”
말을 마친 순간, 그는 이상하게 후회가 없었다. 붙을지 떨어질지와는 별개로, 방금 한 말은 자신의 진짜 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면접실 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예전보다 덜 무거웠다.
결과는 사흘 뒤 오전 열한 시쯤 왔다. 그는 도서관 뒤편 작은 사무실에서 반납 도서 목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르는 번호가 휴대폰 화면에 떴다. 망설이다 받은 전화기 너머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채용 확정, 출근 가능 일정 확인, 제출 서류 안내. 통화는 길지 않았다. 길어야 몇 분. 그러나 전화를 끊고 나서 민재는 한동안 꼼짝할 수 없었다.
창문 밖으로 겨울 햇빛이 차갑게 비치고 있었다. 서가의 먼지가 그 빛 속에서 아주 느리게 떠다녔다. 그는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책상 끝을 붙잡았다. 머릿속이 비는 것 같았다. 기쁘다는 감정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멍한 정적이었다. 너무 오래 기다린 일은 막상 닿고 나면 기쁨보다 먼저 현실감이 사라진다. 정말 된 건가. 정말 나한테 이런 전화가 온 건가. 그는 몇 초쯤 그렇게 서 있다가, 결국 조용히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울었다.
크게 무너지는 울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래 눌려 있던 것이 천천히 풀릴 때 나는 소리 없는 울음에 가까웠다. 불합격 메일을 수없이 지워왔던 시간들, 부모님 전화 앞에서 괜찮은 척하던 저녁들, 편의점 의자 위에서 삼각김밥을 씹던 날들, 노인의 캔커피, 메모판 앞의 밤, 낭독회에서 떨리던 목소리.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사람은 결코 혼자 여기까지 오는 것이 아니구나. 성공이라는 것도 혼자 만들어내는 승리가 아니라, 수많은 말과 손길과 기다림 위에 겨우 올라서는 일이구나. 그는 그 사실이 목 안쪽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어머니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어머니가 받았다.
“왜, 민재야.”
그는 곧장 말을 하지 못했다. 목구멍이 자꾸 막혔다.
“무슨 일 있어?” 어머니가 다시 물었다.
민재는 숨을 한번 삼킨 뒤 겨우 말했다.
“나… 됐어.”
“뭐가?”
“취직. 나 됐어.”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아주 짧은 침묵이었는데, 그 안에 그들이 지나온 계절이 전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어머니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울음을 참을 때 나는, 그 익숙하고도 아픈 소리.
“그래… 그래, 우리 민재…”
어머니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민재는 창가에 앉은 채 눈을 감았다. 밖에서는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고함치며 뛰고 있었고, 누군가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도 났다. 세상은 여전히 별일 없다는 듯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날의 공기와 빛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첫 출근 날 아침, 민재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났다. 셔츠 단추를 채우며 몇 번이나 거울을 봤고, 서류봉투를 세 번쯤 다시 확인했다. 청년지원센터는 오래된 공공건물 4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하얀 벽과 푸른 안내 표지판, 복도 끝 정수기, 접수대 옆 팸플릿 꽂이가 보였다. 아주 평범한 풍경이었지만, 민재는 그 모든 것이 이상하게 눈부셨다. 이제 그는 이 건물에 볼일이 있어서 잠깐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이곳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팀장은 사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말투는 빠르고 일 처리는 단호해 보였지만, 눈빛에는 생각보다 온기가 있었다. 그녀는 민재에게 자리를 안내하며 말했다.
“일 많고, 민원도 생각보다 복잡해요. 대신 오래 버티는 사람한텐 배우는 게 많은 자리예요.”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처음 며칠은 정신이 없었다. 프로그램 신청자 명단 정리, 전화 응대, 엑셀 입력, 서류 분류, 교육 일정 확인, 상담 연계. 누군가는 면접용 정장을 빌릴 수 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고, 누군가는 실업급여와 청년수당 차이를 몰라 답답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고, 누군가는 분노를 감추지 못한 채 제도가 왜 이렇게 복잡하냐고 쏟아냈다. 민재는 처음엔 허둥댔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그는 깨달았다. 이곳에 오는 얼굴들은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초조함을 숨긴 말투, 애써 괜찮은 척하지만 이미 많이 지친 눈, “이것도 안 되면 어떡하죠” 하고 묻는 망설임. 그는 그런 얼굴을 이미 너무 오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이었으니까.
어느 오후, 스물한 살이라고 적힌 신청서를 든 청년 하나가 접수대 앞에 서 있었다. 신발 앞코가 많이 닳아 있었고, 손끝은 계속 종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민재는 서류를 받으며 말했다.
“처음 오셨어요?”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천천히 하시면 돼요.”
그 짧은 말에 청년의 얼굴이 아주 조금 풀리는 것이 보였다. 민재는 그 미세한 변화를 알아보았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 앞에서만 얼굴에 스치는 작은 이완 같은 것. 그는 신청서를 정리하며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단순한 행정업무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다시 삶 안으로 발을 들일 수 있도록, 첫 문턱을 조금 덜 차갑게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렀다. 계약직으로 시작한 세 달 동안 민재는 한 번도 지각하지 않았고, 맡은 문서를 꼼꼼히 정리했고, 흩어진 안내 자료를 보기 쉽게 재배치했다. 이용자들이 자주 묻는 질문을 정리해 간단한 응대 가이드를 만들었고, 팀장이 찾기 쉽게 파일 체계를 바꾸었다. 도서관에서 해오던 일들이 이런 식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그때는 그냥 흩어진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이었는데, 지금은 그 습관이 업무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람의 시간은 정말 이상해서, 낭비라고 생각했던 날들이 어느 순간 가장 유용한 연습으로 드러나곤 했다.
어느 날 회의가 끝난 뒤 팀장이 그를 불렀다.
“민재 씨.”
“네.”
“처음보다 많이 좋아졌어요.”
민재는 자세를 바로 했다.
“감사합니다.”
팀장은 서류철을 넘기며 덧붙였다.
“좋아진 정도가 아니라, 솔직히 말하면 제 몫 좀 덜어줬어요. 청년 응대도 좋고, 문서 정리도 꼼꼼하고. 계약 끝나면 연장 검토하려고 해요.”
민재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해주는 순간은 이상할 만큼 느리게 가슴에 닿았다. 예전에는 늘 자신의 부족함만 보였는데, 이제는 누군가의 하루를 덜 복잡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사람은 큰 상장이나 거대한 박수만으로 자신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작은 인정 하나로도 오래 무너졌던 바닥이 조금씩 단단해질 수 있었다.
그날 퇴근길에 그는 편의점에 들렀다. 유진은 계산대에 서서 빵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있었다. 민재가 들어서자 유진은 그의 얼굴을 한번 보고 물었다.
“좋은 일 있죠?”
“계약 연장 얘기 들었어요.”
유진은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스티커를 내려놓았다.
“봐요. 제가 뭐랬어요.”
“뭐라고 했죠?”
“안 망한다고 했잖아요.”
민재는 피식 웃었다. 유진은 삼각김밥을 봉지에 담아주다가 물었다.
“이제 좀 성공한 거 같아요?”
민재는 잠깐 생각했다. 예전이라면 성공이라는 말을 훨씬 더 멀리 있는 것으로만 상상했을 것이다. 큰 회사, 좋은 연봉, 남들이 알아주는 직함.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다른 장면들이었다. 아침에 갈 곳이 있다는 사실. 월급날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고 부모님께 조금이나마 보낼 수 있었던 순간. 누군가에게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듣고 건물을 나서는 저녁. 접수대 앞 청년이 며칠 뒤 다시 와서 “덕분에 다음 단계 신청했어요”라고 말하던 얼굴.
“크게 성공한 건 아닌데,” 민재가 말했다. “그래도 이제는 내 삶에서 도망치고 있진 않은 것 같아요.”
유진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조용히 그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너무 정확해서, 더 보탤 것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봄이 올 무렵, 민재는 반지하 방에서 작은 원룸으로 이사했다. 햇빛이 드는 3층 방이었다. 창문을 열면 맞은편 빌라 벽이 가까이 있었지만, 그래도 하늘 한 조각은 보였다. 그는 중고로 산 작은 책상을 창가에 두고, 그 위에 잎이 동그랗고 단단한 식물 하나를 올려두었다. 살아남기 쉬운 식물이라고 주인이 말했다. 민재는 그 말이 괜히 마음에 남았다.
이삿날 저녁, 부모님이 작은 전기밥솥을 보내왔다. 어머니는 전화로 말했다.
“밥은 꼭 챙겨 먹어.”
민재는 웃었다.
“이제 잘 챙겨 먹어요.”
잠시 뒤 아버지가 전화를 바꿔받았다. 그는 늘 긴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린 말도 짧았다.
“수고했다.”
그러나 민재는 알았다. 그 짧은 말 안에 서툰 사람의 가장 깊은 마음이 들어 있다는 것을. 칭찬과 안도와 미안함과 자랑스러움이 한꺼번에 엉겨 있는 한마디라는 것을.
센터에서는 반년쯤 지나자 민재에게 작은 프로그램 운영도 맡기기 시작했다. 자기소개서 클리닉 일정 관리, 특강 보조, 참여자 접수, 상담 동선 정리. 어느 날은 소규모 모임에서 직접 이야기를 해달라는 부탁도 받았다. 취업 준비 중인 청년들이 둥글게 앉아 있는 자리였다. 모두의 얼굴에 피로가 비슷한 결로 내려앉아 있었다. 민재는 그 얼굴들을 보다가 오래전의 자기 자신을 보았다.
“저도 한동안 취업이 안 됐습니다.”
그가 먼저 말했다.
사람들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압니다. 주변 사람들 말이 응원이 아니라 압박처럼 들릴 때가 있다는 걸. 서류 떨어지는 게 반복되면 내가 점점 종이보다 얇아지는 것 같을 때가 있다는 걸. 잘될 거라는 말도 어떤 날엔 하나도 안 믿긴다는 걸.”
몇몇이 아주 작게 웃었다. 쓴웃음에 가까운, 그러나 동의의 기척이 실린 웃음이었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 알게 된 게 있습니다. 취업이 안 된 시간에도 사람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저는 그 시간에 많이 무너졌고, 부끄러웠고, 남들보다 늦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 시간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되었고, 일을 정리하는 방식이 되었고, 결국은 저를 여기까지 데려왔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천천히 덧붙였다.
“늦게 피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신 그런 사람은 자기 계절이 왔을 때, 생각보다 단단하게 핍니다.”
모임이 끝난 뒤 한 청년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도 될까요?”
민재는 그 질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예전 같았으면 선뜻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함부로 희망을 말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알았다. 희망은 장담이 아니라 건네는 방향 같은 것이라는 걸. 누군가를 밀어 넣는 말이 아니라, 아주 잠깐 어두운 곳을 비춰주는 손전등 같은 것이라는 걸.
“네,” 그가 말했다. “조금 오래 걸릴 수는 있어요. 그래도 됩니다.”
청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성공이란 이런 식으로도 드러나는구나. 남보다 높은 곳에 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당신도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여름이 시작될 무렵, 센터에서는 정규직 전환 검토가 있었다. 팀장은 민재에게 평가 서류를 건네며 필요한 항목들을 설명했다. 민재는 담담하려고 했지만, 마음 어딘가가 계속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계약직으로 시작해 여기까지 온 시간들이 눈앞을 스쳤다. 반지하, 편의점, 도서관, 메모판, 첫 면접, 첫 월급, 새 방의 창문. 삶이 바뀔 때는 언제나 한 번에 바뀌지 않았다. 너무 작은 단위로 조금씩 달라져서, 어느 날 돌아보아야 비로소 이만큼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규직 전환 확정 통보를 받은 날은 비가 오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처음 이야기가 시작되던 날처럼, 하늘은 낮은 곳으로 내려와 있었고, 전깃줄에는 비가 축축하게 맺혀 있었다. 팀장은 사무실로 민재를 불러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그 말은 짧았지만 묵직했다. 앞으로. 이제 그는 잠깐 머물다 사라질 사람이 아니었다. 내일도, 다음 달도, 다음 계절에도 이곳으로 출근할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서류를 받고, 누군가의 다음 단계를 연결하고, 누군가가 다시 자기 삶 쪽으로 몸을 기울이게 만드는 일을 계속할 사람이었다.
민재는 인사를 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그는 우산을 펴지 않고 잠시 처마 아래 서 있었다. 비 냄새가 아스팔트 위에서 올라왔고, 사람들은 각자의 우산 아래로 바쁘게 지나갔다. 그는 문득 아주 오래전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던 자신을 떠올렸다. 비가 오려던 저녁, 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길을 서성이던 스물둘의 얼굴. 그때의 자신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몇 해 뒤, 같은 비 냄새 속에서 정규직 통보를 받고 서 있게 될 줄은. 사람의 인생은 때때로 너무 느리게 움직여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금씩 방향을 바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어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정규직 됐어요.
답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 아들, 참 잘 견뎠다.
민재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축하한다는 말보다, 성공했다는 말보다, 그 문장이 더 깊이 가슴에 남았다. 잘 견뎠다. 어쩌면 그의 삶에서 가장 먼저 인정받아야 했던 것은 능력보다 견딘 시간이었는지도 몰랐다. 무너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무너졌다가도 다시 일어선 시간. 남들이 모르는 곳에서 스스로를 놓지 않았던 밤들. 그 시간들이 결국 그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퇴근길에 그는 일부러 예전 반지하 골목 쪽으로 걸어갔다. 골목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축축한 계단, 낡은 담벼락,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 유진은 이제 그곳에 없었다. 야간 대학을 졸업하고 사무직으로 옮겼다고, 새로 들어온 아르바이트생이 말해주었다. 민재는 잠시 편의점 앞에 서서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예전의 그 창이었다. 형광등 불빛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그 앞에 서 있는 사람 쪽이었다.
그는 아주 조용히 웃었다. 얼마나 많은 밤을 여기서 흘려보냈던가. 얼마나 자주 자신이 끝난 것처럼 느꼈던가. 그런데 결국 사람은, 끝난 줄 알았던 자리에서도 다시 시작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새 방으로 돌아온 밤, 민재는 창문을 열었다. 빗소리가 멀리서 들렸고, 도로 건너 불빛들이 물기를 머금은 채 번지고 있었다. 책상 위 식물 잎은 어둠 속에서도 작은 윤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한참 밖을 바라보았다. 성공이라는 말은 여전히 조금 쑥스러웠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 그는 알고 있었다. 성공은 아주 높은 곳으로 오르는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오래 흔들리던 사람이 마침내 자기 발로 서서 아침을 열 수 있게 되는 것.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 걱정만 보내지 않고 안심을 줄 수 있게 되는 것. 자신의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것으로 누군가의 어두운 시간을 이해하게 되는 것. 그런 것도 분명한 성공이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거의 속삭이듯 혼잣말했다.
“나, 여기까지 왔네.”
그 말은 자랑이 아니라 놀라움에 가까웠다. 진짜로 여기까지 왔구나. 그렇게 오래 헤매고, 그렇게 많이 주저앉고, 그렇게 자주 자신을 의심하면서도 결국은.
세상은 아마 내일도 여전히 빠를 것이고, 누군가는 또 비교할 것이며, 삶은 앞으로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민재에게도 다시 흔들리는 날은 올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예전과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삶을 붙드는 법을 배웠고, 끝내 자기 자리 하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것은 아무도 대신 해줄 수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더 귀했다.
어느 날 저녁, 센터 상담실 밖에서 그는 익숙한 문장을 다시 들었다. 초조한 얼굴의 청년 하나가 신청서를 쥔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청년은 민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집에 가기 싫네요.”
민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래전 도서관 로비와 형광등 불빛, 김밥 냄새, 그리고 젊은 날의 자기 얼굴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청년 옆에 조용히 앉았다.
“잠깐 있다 가도 괜찮아요,” 그가 말했다. “천천히 해요.”
청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고, 민재는 그 옆에서 말없이 함께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고, 유리창에는 저녁의 어스름이 엷게 깔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문득 알았다. 자신이 정말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이제 그는 위로를 받기만 하던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의 저녁을 조금 덜 차갑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마 삶이라는 것은 결국 그런 식으로 이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한 사람이 어떤 말에 겨우 살아남고, 그 살아남은 사람이 다시 다른 사람 곁에 앉아 같은 어둠을 조금 나눠 갖는 일. 완전히 구원하지는 못해도, 가라앉는 속도를 늦춰주는 일. 다정한 한마디가 사람 하나를 건너가게 하고, 건너간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의 다리가 되어주는 일.
그러니 늦었다고 생각하는 모든 청춘에게, 자꾸만 자기 자신이 초라해 보이는 모든 사람에게, 이 이야기는 아주 조용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넘어진 시간이 길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끝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늦게 도착한 사람에게도
분명 자기 자리는 있다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것 같던 날들 끝에서도
사람은 결국 자기 삶을 다시 붙들 수 있다고.
그리고 어떤 성공은
세상이 박수치는 모양으로 오지 않는다고.
그것은 오히려
한 사람이 더 이상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게 되는 순간의 얼굴로 오고,
오래 닫혀 있던 방 창문을 열어젖히는 아침의 손끝으로 오고,
부모에게 “오늘 아침 챙겨 먹었어요”라고 보낼 수 있는 담담한 문장으로 오고,
낯선 이에게 “천천히 하시면 돼요”라고 말할 수 있는 목소리로 온다고.
비가 오려던 저녁의 스물둘은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자기가 그렇게 많은 날을 돌아
결국은 자기 이름으로 일하고,
자기 몫의 하루를 만들고,
누군가에게 늦지 않았다고 말해줄 사람이 될 줄은.
하지만 삶은,
보이지 않을 만큼 천천히 내리던 눈이
어느 순간 지붕 위를 희게 덮어놓듯
그렇게 사람을 조금씩 바꾸어 놓는다.
그러니 혹시 오늘도 길 위를 오래 걷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돌아가기 싫은 방을 떠올리며 주머니 속 손을 더 깊이 넣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꾸만 자신이 뒤처진 것 같아 마음을 접어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 말만은 믿어도 좋다.
당신은 아직 늦지 않았다.
당신은 아직 끝난 사람이 아니다.
당신이 지나온 캄캄한 시간도
언젠가는 누군가를 이해하는 힘이 될 것이다.
지금은 그저 하루를 건너는 일만으로 벅차더라도
그 하루들이 쌓여
언젠가 당신을 당신 자리까지 데려갈 것이다.
아주 천천히라도.
조금 서툴더라도.
몇 번이고 멈춰 서더라도.
그러니 부디
당신도 당신을 버리지 말기를.
당신 안에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이 있고,
아직 불리지 않은 이름이 있고,
아직 시작되지 않은 당신의 아침이 남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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