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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지층

침식-시간

by 윤담

시간은 언제나 앞으로 흐른다고 배웠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그 흐름은 결코 일정하지 않다.
시간은 중력처럼 각자의 감정과 기억의 밀도에 따라 휘어진다.
누군가에겐 하루가 길고, 또 누군가에겐 1년이 짧다.
그 차이는 시계가 아니라 마음의 진자에서 생겨난다.

젊을 때의 시간은 바람 같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고, 잡으면 사라졌다.
계절의 경계가 희미했고,
아침과 밤은 단순히 빛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매일을 새로움으로 덮었고,
시간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나는 시간의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그 표면에서 미끄러지고 있었다.

지금의 시간은 다르다.
하루가 길지만, 해가 짧다.
빛은 빨리 지고, 기억은 오래 남는다.
말 한마디가 하루를 점유하고,
사람의 표정 하나가 밤까지 남는다.
시간은 더 이상 바깥의 것이 아니라,
몸속에서 서서히 나를 깎는 내적 생물이다.
나는 그 생물에게 매일 조금씩 갉아먹히며,
대신 조금 더 깊이 잠드는 법을 배운다.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선형적이지 않다.
그건 퇴적층처럼 쌓였다가,
어느 날엔 거꾸로 뒤집히기도 한다.
문득 옛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
스무 살의 공기와 냄새, 그때의 불안이 되살아난다.
그 기억이 내 안에서 돌처럼 굳어 있던 부분을 다시 부순다.
그 순간, 나는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화’한다.
시간은 과거를 멀리 보내지 않는다.
그저 다른 결로 저장할 뿐이다.

그렇기에 시간은 인간을 늙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감각으로 재배열하는 작업자다.
젊을 때의 감정은 빠르고 뜨거웠지만,
이제의 감정은 느리고 깊다.
어릴 땐 흘러가는 것이 두려웠고,
이제는 남아 있는 것이 버겁다.
시간이란 결국 감정의 밀도를 조절하는 장치다.
우리는 그 조율 속에서 나이를 먹는다.

나는 어느 날, 오래된 벽돌담 앞에 섰다.
담벼락엔 빗물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검은 곰팡이, 녹슨 못, 지워진 낙서들.
그건 시간의 얼굴이었다.
그 표면을 손끝으로 만지자
조용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온기는 살아 있는 것의 체온이 아니라,
시간이 스스로 발산하는 잔열이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시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형태를 바꾸어 우리를 감싼다.
우리가 가진 몸, 말, 기억이
모두 그 벽의 또 다른 층이다.

나는 한때, “늙는다”는 말을 단지 주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늙음은 감각의 밀도가 변하는 일이다.
한때 놀랍던 일이 이제는 예측 가능해지고,
눈물 나던 풍경이 이제는 그저 조용해진다.
그건 피로의 증거가 아니라,
시간이 인간의 신경망을 재배열한 결과다.
어른이 된다는 건,
감정의 속도를 늦춰
세상을 더 오래 바라보는 능력을 배우는 일이다.
시간의 침식은 바로 그 느림에서 시작된다.

세상은 여전히 빠르다.
기차, 뉴스, 사람, 데이터.
모두가 속도를 향해 달려간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진짜 변화는 느려지는 것에서 일어난다.
빨라지는 건 시스템의 진화이고,
느려지는 건 존재의 진화다.
시간은 달리는 자를 앞서가는 게 아니라,
멈추어 선 자를 안으로 침식시킨다.
그 침식의 결과로 남는 것은
피로가 아니라 깊이다.

밤마다 나는 시계를 본다.
초침이 한 칸씩 움직일 때마다
나의 하루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조금 더 눌러 앉는 느낌이 든다.
시간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점점 침전되고 있다.
그 침전물 위에서 인간은 하루를 다시 세운다.
지층은 그렇게 생긴다.

이제 나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건 죽음을 향한 속도가 아니라,
의미를 응축시키는 압력이다.
나는 여전히 늙고 있지만,
그 늙음 속에서 내 감정은 더 선명해진다.
시간은 나를 침식하지만,
그 침식이야말로 나를 형태 있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시간은 우리를 부식시키지 않는다.
그건 단지 우리가 더 단단해지기 위한
천천한 조각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모든 조각이 흙과 돌이 될 때,
그 표면에는 이렇게 새겨질 것이다.
“여기, 시간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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