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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지층

침식-인간 II

by 윤담

아파트 단지는 언제나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복도는 길고, 벽은 얇고,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 벽을 통과한다.
나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를 지층처럼 바라본다.
인간의 관계는 언제나 퇴적과 침식, 균열과 변성의 반복이다.

그날, 집사람은 평소보다 늦게 귀가했다.
표정은 잔잔했지만 어딘가 닳아 있었다.
아이와 놀이터에 갔다가,
같은 반 엄마들과 어색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중 한 사람이 더는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
집사람이 그녀가 싫어하는 사람과 친하다는 것이었다.

그 단순함이 오히려 잔인했다.
관계의 단층은 언제나 가장 얇은 곳에서 생긴다.
그날 밤, 집사람은 식탁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지 않은 밥그릇 위로, 조용한 압력이 내려앉았다.
나는 그 침묵을 오래 들었다.
그건 감정의 침식이 아니라, 윤리의 침묵이었다.

며칠 뒤, 단지의 놀이터는 여전히 붉은 흙빛으로 빛났다.
아이들은 뛰어놀았고,
그 사이를 오가는 엄마들의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흘렀다.
그러나 집사람은 그 무리 속에 없었다.
그녀의 자리는 얇은 모래층처럼 사라져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층의 단면처럼 떠올렸다.
관계의 결은 흙처럼 다져지지만,
말 한마디의 바람에도 쉽게 무너진다.
침식은 윤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압력과 방향의 문제였다.

사람은 서로의 도덕보다
서로의 온도에 더 쉽게 닳는다.
그리고 그 닳음이 관계의 형태를 바꾼다.

집사람은 어느 날 단지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커피잔을 손에 쥔 채, 멀리 놀이터를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은 싸움이 아니라, 퇴적이었다.
시간의 층이 한 겹 한 겹 쌓여
그녀의 침묵을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괜찮아?”
그녀는 짧게 웃었다.
“이젠 괜찮아요. 그냥, 조금 다른 결로 사는 거죠.”
그 말은 오래된 암석의 균열처럼,
무너짐이 아니라 새로운 층의 시작처럼 들렸다.

지층탐사를 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모든 암석은 압력과 시간의 산물이라고.
그 어떤 층도 도덕으로 생기지 않는다고.
인간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침식은 부정의 결과가 아니라,
형태의 재편성이다.

나는 집사람의 일상을 그 단면 위에 놓고 본다.
비가 오면 관계는 조금 녹고,
햇살이 들면 다시 굳는다.
그 반복 속에서
사람은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투명해진다.

어느 날, 딸아이가 물었다.
“엄마, ○○이 엄마랑 왜 안 놀아?”
집사람은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가끔은, 멀리 있어야 더 오래 볼 수 있단다.”
그 대답은 한 문장의 철학이었다.
인간의 지층은 거리를 통해 안정된다.
가깝다고 단단한 게 아니고,
멀다고 식은 것도 아니다.

나는 이제 안다.
침식은 윤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건 삶의 기압차로 인해 생긴 자연스러운 균열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균열을 부정하지 않고,
그 위에 새로운 결을 쌓아가는 것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닳게 하지만,
닳은 자리에는 새로이 반짝이는 표면이 생긴다.
그게 인간의 회복이고,
지층의 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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