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층탐사-빛을 반사하는 돌
마흔의 지층은 조용했다.
새벽의 공기처럼 묵직하고, 바위의 표면처럼 매끄러웠다.
이 나이가 되면, 모든 일은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다.
말보다 눈빛이, 계획보다 침묵이 먼저 앞선다.
나는 그것이 세월의 결과가 아니라,
압력의 누적이 만들어낸 결정이라는 것을 안다.
군대에서 보낸 시간은 10년을 훌쩍 넘겼다.
그곳에서 나는 인간의 폭력과 질서,
그리고 생존의 온도를 배웠다.
사람이 사람을 이기려는 구조 속에서도,
어떤 이는 남을 살리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온도가 윤리의 시작이라는 것을.
이제 나는 그때보다 훨씬 자유로운 세상에 있지만,
자유는 언제나 불편하다.
명령이 사라진 자리에
책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책임은 보이지 않지만,
매일의 판단과 선택에 눌어붙어 있다.
아이의 눈, 아내의 말,
동료의 침묵 속에서
나는 나의 윤리를 매번 다시 채굴한다.
어린 시절의 윤리는 단순했다.
옳은 일과 그른 일 사이엔 벽이 있었다.
그러나 마흔의 윤리는 경계가 흐릿하다.
무엇이 옳은지보다,
무엇이 상처를 덜 남기는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이해받는 것보다 이해하려 애쓰고,
이기는 것보다 관계를 남기려 한다.
그건 순종이 아니라, 지층의 조율이다.
나는 그 균열 속에서 나의 결을 다듬는다.
삶은 다시 지질학의 언어로 변했다.
청춘은 퇴적이었고,
군대는 변성이었으며,
마흔은 재활성대였다.
이미 굳은 암석이 다시 침식되고,
그 속에서 새로운 광물이 스며드는 시기.
이제 나는 내 안에서
신앙의 층, 인간의 층, 삶의 층을 구분할 수 있다.
신앙의 지층은 믿음과 회의 사이에서 움직인다.
나는 더 이상 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인간의 약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는다.
그 연약함은 죄가 아니라 구조다.
그걸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덜 미워하게 된다.
삶의 지층은 매일의 반복 속에서 쌓인다.
아침밥을 차리고,
아이의 숙제를 보고,
회사 메일을 확인하며,
나는 매일의 사소한 행동으로
하나의 광맥을 만들어간다.
그건 위대한 암석이 아니라,
작고 투명한 광물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연속이야말로
인간의 진짜 강도다.
가끔 거울을 본다.
피부의 결은 거칠어지고, 눈가는 조금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 표면의 흔적이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나는 이제야 안다.
인간의 얼굴은 세월이 새기는 지질 단면이라는 것을.
시간이 파낸 홈마다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가 윤리가 된다.
어린 시절엔 세상이 위에서 내려왔다.
청춘엔 내가 세상을 향해 올라갔다.
이제는 그 중간 어딘가에서
빛이 비스듬히 들어온다.
그 빛은 정면의 태양이 아니라,
타인의 얼굴에서 반사된 조용한 광선이다.
아이의 눈,
아내의 웃음,
동료의 침묵,
그 반사광들이 내 윤리를 비춘다.
그래서 나는 요즘,
무엇이 옳은가보다
무엇이 투명한가를 먼저 생각한다.
투명함이란 거짓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내면의 불순물을 품은 채로
빛을 통과시키는 능력이다.
그건 완전함이 아니라 정직한 불완전이다.
그 불완전 속에서 인간은
서로의 결을 알아보고,
함께 버텨낼 윤리를 배운다.
마흔의 지층은 그렇게 완성되어 간다.
돌처럼 굳어지지만,
그 내부는 여전히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나는 오늘도 그 미세한 진동 속에서
나의 윤리를 다시 조율한다.
이제 내 안의 광물들은
어릴 적의 빛보다 훨씬 차분하게 빛난다.
그건 열의 색이 아니라,
시간이 통과한 빛이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 지층이 완전히 굳는 날,
나는 더 이상 단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나는,
비로소 하나의 돌이 될 것이다 .
투명하고, 조용하며,
빛을 반사하는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