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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지층

지층탐사-변성지점

by 윤담

대학을 졸업하던 봄,

세계는 이상하게 가벼웠다.

모든 것이 시작된 듯 보였지만,

사실 아무것도 아직 시작되지 않은 계절이었다.


축하와 작별의 말들이 공중에서 떠다녔고,

그 말들 사이로 스며든 햇빛이

내 마지막 학생 시절을 얇게 덮어두었다.

나는 그 빛 속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려 했지만

어른됨은 방향이 아니라

천천히 가라앉는 감각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졸업장을 손에 쥐고 나오는 길에

나는 처음으로 ‘퇴적’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지식의 먼지와 감정의 잔열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얇은 지층.

그 지층 위에서

나는 어른도 아니고, 학생도 아닌

어떤 전이 상태로 서 있었다.


그리고 몇 달 뒤,

입영통지서 한 장이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내 다음 지층의 시작을 알렸다.


군함에 오르던 날,

세상은 학생 시절과 전혀 다른 온도를 품고 있었다.

바다는 고요했지만

그 고요가 오히려 불안한 진동처럼 느껴졌다.


금속 흔들림, 디젤 냄새,

질서와 무질서가 공존하는 공기의 밀도

그 모든 것들이

이미 내 내부의 구조를

천천히 재배치하고 있었다.


그날의 나는

지성의 잔해를 접어 넣고,

규율이라는 얇은 껍질을 뒤집어쓴 채

미완의 채로 다시 퇴적되기 시작했다.


계급, 명령, 폭력, 침묵

이 세계의 요소들은

내 안에 새로운 단면을 만들고 있었다.


군함의 내부는

질서가 아니라 압력으로 작동하는 세계였다.

명령은 말이 아니라 무게로 떨어졌고,

그 무게는 어깨와 가슴에 오래 남았다.


어떤 날은 욕설이 하루의 시작이었고,

어떤 날은 침묵이 하루의 끝이 되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기묘하게 부드러운 것들이 피어났다.


야간 근무 교대 때 건네던

뜨거운 국물의 온기,

무전기 틈으로 새어 들어오던

낡은 기타 소리,

잠들기 직전 들리던

누군가의 짧은 한숨.


그 작고 온기 있는 순간들이야말로

열과 압력 속에서

가장 먼저 재결정되는 결정체들이었다.


어떤 밤엔 갑판에서 별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어둠처럼 깊었고,

하늘은 그 어둠보다 더 멀었다.

그럼에도 멀리서 온 별빛은

이상할 만큼 따뜻했다.


그 따뜻함은

불꽃이 아니라

오래 눌린 기억이 남긴 열처럼 느껴졌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단단함이란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견뎌낸 압력의 밀도일지도 모른다.


지질학에서는

퇴적층이 압력과 열로 변형되는 과정을

metamorphism—변성이라 부른다.

삶의 언어로는

그저 ‘살아남음’이라고 부른다.


어느 날,

동료의 침상이 비어 있었다.

그 자리에 남은 건

낡은 시계 하나와

흔들린 글씨로 적힌 메모 한 장이었다.


“엄마, 미안해.”


그 문장은 짧았지만

짧아서 더 무거웠다.

그 메모는

이 세계의 압력이

얼마나 과했는지

아무 말 없이 설명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강함’이라는 단어의 구조가

서서히 다시 쓰이고 있음을 느꼈다.


강하다는 것은

부서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서진 채로도 살아내는 일이었다.

그 깨달음은

광물이 열과 압력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재결정되는 과정과

닮아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내 안의 지층들은

조금씩 다른 결을 띠기 시작했다.


폭력 아래엔 피로가,

피로 아래엔 연민이,

연민 아래엔 설명되지 않는 평온이 있었다.


그 평온은 이해가 아니라

체념의 수용에서 온 것이었지만

그 수용이야말로

살아남음의 가장 인간적인 방식이었다.


돌아보면

군함에서의 시간은

내 인생의 변성대였다.


나는 그곳에서

하나의 광물처럼 굳어졌다가,

어느 순간엔

물처럼 다시 녹아내렸다.


그리고 열과 압력이 지나간 자리에

투명한 한 겹의 층이 남았다.

그 층은 고통이 아니라,

시간이 인간 안에서 결정화되는 소리였다.


지층을 탐사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내부의 암석을 파내는 일이다.

그 안에는

아직 식지 않은 얼굴들,

작은 온기,

어둠 속에서 들려오던 파도 소리,

그리고 이름 없는 감정들이

퇴적물처럼 남아 있다.


군함의 변성대를 지나오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열과 압력 속에서

자기만의 조직과 결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그 결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더 깊고,

투명하기 때문에 더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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