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층탐사-전이대
도시의 공기가 이상하게 가벼웠다.
무언가가 시작된 것 같았지만,
사실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하던 날,
나는 그 공백의 냄새를 맡았다.
강의실의 의자는 낡았고,
칠판 위엔 어제의 흔적이 희미했다.
교수의 말은 어려웠지만,
그 어려움이 어쩐지 달콤했다.
누군가는 철학을,
누군가는 공학을,
누군가는 사랑을 배웠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표정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확신’이 스며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이성의 옷을 입고, 본능의 신발을 신고 있었다.
낮에는 토론했고, 밤에는 방황했다.
논문을 읽다 음악을 듣고 싶었고,
책을 덮으면 누군가의 체온이 그리워졌다.
지성은 나를 위로했지만,
야성만이 나를 숨 쉬게 했다.
술은 하나의 언어였다.
논리의 반대편에서 감정이 흘렀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담배를 피웠다.
우리는 상처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상처를 자랑처럼 드러냈다.
그것이 청춘의 문법이었다.
어느 밤, 친구와 바다를 보러 갔다.
해안의 바람은 차가웠다.
우리는 맥주 캔을 발로 차며 걸었다.
그 친구가 말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면 불안해.”
그 말이 내 안을 울렸다.
그건 한 세대의 고백이었다.
상실의 시대를 통과하는 자들의
본능적인 진동이었다.
도서관에서 읽은 하루키의 문장이 떠올랐다.
“완전히 상실된 시대.”
그 문장은 문학이 아니라 풍경 같았다.
창밖의 노을이 기숙사 건물 위로 번졌다.
빛은 붉었고,
그 붉음은 어딘가 슬펐다.
그건 해질녘의 색이 아니라,
한 세대가 천천히 침전하는 색이었다.
대학은 이상한 공간이었다.
지성은 쌓이지만,
삶은 점점 가벼워졌다.
사람들은 생각을 말하면서도
감정을 피했다.
논리로 세계를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정작 자기 마음은 해석되지 않았다.
나는 도서관의 공기 속에서 생각했다.
“지식이 쌓이면 마음의 지층은 투명해질까?”
그러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지식은 명료했지만,
삶은 여전히 탁했다.
사랑은 또 다른 수업이었다.
그녀는 문학을,
나는 공학을 전공했다.
그녀는 시를 읽었고,
나는 계산을 했다.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침묵의 진동만은 공유했다.
그건 사랑이라기보다
두 불안이 같은 주파수를 가진 일이었다.
결국 아무 말 없이 헤어졌다.
“졸업하면 또 보자.”
그건 약속이 아니라
이별의 관용구였다.
시간이 흘러 벚꽃이 피었다가 졌다.
졸업 앨범을 받던 날,
나는 내 사진을 오래 바라봤다.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엔 방향이 없었다.
대학이라는 지층은
그렇게 내 안에 얇게 퇴적되었다.
지성의 돌가루와
야성의 불씨가 뒤섞인 혼합층.
불안정했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인간다운 층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퇴적이 아닌 전이대(轉移帶)였다.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생물들이
각자의 형태로 변성되던 시기.
지질학자가 말하듯,
“퇴적은 끝났고, 융기는 시작되었다.”
배움보다 더 큰 일은,
자기 자신을 발굴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때의 나를 기억한다.
자주 멈추고, 자주 흔들리고, 자주 웃던 얼굴.
그 불안과 혼란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모든 세대는 자신만의 전이층을 통과해야 한다.
지식은 돌이 되지만,
감정은 여전히 물로 남는다.
그 물이 흐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금세 굳어버릴 것이다.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아직도 발굴 중인 기분이 든다.
그때의 모래, 그때의 바람,
그때의 웃음이 아직 내 안에 묻혀 있다.
지층탐사란 결국,
자신의 과거를 파내는 일이다.
그 흙 속엔 언제나
젊음의 온기와 미완의 문장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