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층탐사-압력
그 시절의 공기는 늘 뜨거웠다.
운동장엔 햇빛이 내려꽂히고,
교실 안에는 분필 냄새와 피곤이 섞여 있었다.
시간표는 거의 전쟁의 지도 같았다.
수학, 영어, 과학, 국어.
하루가 시험으로 나뉘고,
시험은 삶을 재단했다.
나는 마치 채굴 중인 광물처럼 눌려 있었다.
수능이라는 거대한 압력이
한 사람의 모양을 결정하는 지층이었다.
누군가는 금속처럼 단단해지고,
누군가는 가루처럼 부서졌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괜찮다”라는 말로
스스로를 덮었다.
교실 뒤편 창가 자리에서
나는 종종 바깥을 바라보았다.
운동장에서 누군가가 웃고 있었고,
다른 누군가는 졸고 있었다.
그 평범한 장면이 이상하게 멀었다.
내 시선은 유리창의 반사 위에 머물렀다.
거기엔 내 얼굴이,
그리고 내 안의 균열이 있었다.
그때 첫사랑이 있었다.
이름은 부르지 않겠다.
그 아이는 늘 앞자리에 앉았고,
공책 위의 글씨가 단정했다.
나는 수업 시간마다 그 글씨를 훔쳐봤다.
그 글씨는 내가 배우는 어떤 공식보다
더 정확하고 더 아름다웠다.
한 번은 우연히 손끝이 닿았다.
그 순간, 지층이 흔들렸다.
온기가 전해지는 데에는 0.5초가 걸렸고,
그 온도가 내 가슴 아래에 남는 데엔 몇 년이 걸렸다.
하지만 사랑은 늘 짧았다.
시험이 다가오면 모든 것이 정지했다.
감정도, 웃음도, 미래의 상상도.
“수능이 끝나면 이야기하자.”
그 말은 약속이 아니라
하나의 기도였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계절이 바뀌었다.
사랑의 퇴적층은,
말하지 못한 문장으로만 남았다.
그 무렵, 학교에는 폭력이 있었다.
복도 끝, 교실 뒤, 운동장 옆에서
누군가가 맞고 있었다.
폭력은 소리보다 먼저 공기를 찢었다.
그리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관찰자’였다.
그건 공포 때문이 아니라,
이미 너무 많은 규칙을 배워버렸기 때문이다.
“아무 말 하지 않기.”
그게 생존의 공식이었다.
폭력은 한 사람의 상처로 끝나지 않았다.
그건 우리 모두의 양심을 휘게 만들었다.
그날의 복도는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어두운 단층으로 남아 있다.
집에서는 늘 밥상 위에 뉴스가 켜져 있었다.
어머니는 말이 적었고,
아버지는 잠잠했다.
가끔씩, 그 둘 사이의 침묵이
TV 소리보다 더 크게 울렸다.
나는 그 사이에서 젓가락을 들었다.
밥은 뜨거웠고,
그 뜨거움은 이상하게 마음에 닿지 않았다.
가족이란 이름의 암반은 단단했지만,
그 안의 균열은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그건 오래된 암석 속 수분처럼,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폭발할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밤에는 책상 위에 앉았다.
전등 불빛 아래 교과서가 하얗게 번졌다.
문제를 풀다 보면,
문장과 숫자가 점점 녹아내렸다.
그 속에서 나는 가끔
이상한 환각을 보았다.
수식의 괄호 안에서,
삶의 공식이 빠져 있었다.
“이게 정말 나를 증명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은 지층의 밑바닥에서 올라왔다.
아무리 덮어도 사라지지 않는 불안이었다.
수능 날, 새벽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학교 앞에는 부모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커피,
입가에는 미소,
그러나 눈빛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손끝이 떨렸다.
그때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같은 땅속에 묻혀 있는 존재들이라는 걸.
누군가는 겉으로 반짝이지만,
누군가는 깊은 층에서 조용히 타고 있었다.
시험이란, 결국
그 불균등한 지층의 단면을 잠깐 보여주는 절개선이었다.
시험이 끝난 날,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정지한 듯했다.
친구들은 환호했고,
누군가는 울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공기 속에서
묘한 냄새를 맡았다.
그건 불안과 자유가 섞인 냄새였다.
이제 어른이 된다는 건
이제부터 다시 파내려간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지질학자는 말한다.
가장 단단한 돌은,
한 번쯤 녹아본 돌이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그 녹는 과정 속에 있었다.
사랑과 폭력, 가족과 시험,
모든 압력이 동시에 작용하던 시절.
그 열기 속에서 나는
나라는 광석을 발견했다.
부서지기 쉬운, 그러나 빛을 품은 물질.
그것이 내 청춘의 특이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