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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Mar 18. 2021

한병사의 사과

내가 죽였소, 죄송합니다.


                                                        (중앙일보)


1980년5월23일, 박병현 씨는 농사일을 돕기위해서 고향인 보성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안 병장(가명)이 소속되었던 중대는 광주 외곽 도로를 차단 하고 있었다. 광주 시민은 다른 지역으로 나가면 안되었다. 부대원들은  박병현씨와 다른 한 사람에게 “서라, 도망가면 쏜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두사람은 죽어라고 뛰었다. 안병장은 억겁결에 방아쇠를 당겼고 박병현씨는 그 자리에서 사망 했다. 


안병장은 당시 계엄군이었던 7공수여단 소속 이었다. 41년 후 안병장은 고 박병현 씨의 형 박병수씨와  가족에게 사과 했다. 두 사람은 얼싸 안고 울었다. 박종수씨는 “늦게라도 사과해주어 고맙다. 죽은 동생을 다시 만났다고 생각했다. 용기를 내서 찾아줘서 고맙다.”라고 흔쾌히 사과를 받아 주었다. 


한국사람들은 광주 항쟁(5.18)을 민주화 운동으로 본다. 그러나 나는 광주 항쟁을 냉전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제주 4.3 사건, 여순 사건과 같은 맥락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 지역을 공산주의자들이 정부를 전복 하려는 반란군이 점령한 지역으로 간주하고 무차별 공격을 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다른 점은 전자는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이 간여 했고 후자는 정부가 공산주의 선동이 없었는 데도 있다고 국민들이 믿게 했다는 사실이다. 


반란군이 점령한 지역에 사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적군에게 점령한 지역을 탈환하는 작전을 벌린 것이다. 국군은 공군과 육군을 동원하여 무차별 폭격과 사격을 했다. 대의명분은 반공과 자유민주주의 수호 였다. 


냉전 구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사건은 아마 대구 10월항쟁 이었을 것이다. 1946년 일이다. 이것이 1980년에도 반복 되었다. 정말 가공할 만한 일이다. 


1980년5월 광주항쟁 소식을 로드 아일랜드에서 들었다. 뉴욕에서 수련을 마치고 개업한지 1년 되는 해이다. 교포들은 브라운 대학 강의실에 모여서 독일기자가 만든 비데오를 보고 신군부를 성토하며 울분을 터트렸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신군부(전두환)는 광주를 완전 봉쇄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주동이 되어 반란군이 광주를 점령 했다고 전국민에게 알렸다. 이 봉쇄된 광주 지역에서 일어난 비극의 한토막이 박병현씨와 안병장의 미담이다. 


광주(전라남도)는 박정희 암살 이후 가장 인기있는 김대중의 고향이었다. 신군부의 각본에 의하면 이 반란의 주모자는 김대중이 되었다. 김대중을 감옥에 넣은 신군부는 정권을 장악 했다. 


반대 정파에게 “너 빨갱이 아니야”라고 겁주어서 움추려 들게 하거나 아예 정치생명을 끈어 버리는 정략을 “Red Scare”라고 한다. 말하자면  빨갱이 누명 씌우기 이다. 맥카시 상원의원의 발명 품이다.  매카시 선풍이라고 한다.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 악습을 뿌리 뽑았다. 


그러나 남북이 공산국가와 민주국가로 갈라져 있는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자부하는 대한민국은 이 악습이 한국 정치판의 상투수단으로 오랜동안 계속 되었다. 


어제의 4.3사건 관련 325명 무죄 판결과 오늘 안병장의 사과는 아마 레드 스케어 정략에 한국민이 더 이상 속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가짜 뉴스(Propaganda)에 세뇌된 국민은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한다. 국가의 장래는 국민이 얼마나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야 올바른 지도자 에게 한표를 던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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