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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es 아저씨 Jan 22. 2024

5. 김광석

- 내 영혼을 모두 털어간 가객

이 이야기 들에 나오는 분들은 내게 문화적 영향을 준 사람들입니다

좀 더 이야기하자면 내 코드가 맞는 사람들...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내 영혼의 팬? 

그냥 쉽게...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이 이야기들은 나의 십 대 말부터 지금까지 내 감성의 심연에 들어온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음악, 미술, 문학, 혁명가, 대중예술, 스포츠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글들입니다

그래서 깊이 없는 그저 내 감정, 내 마음대로 쓴 글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 둡니다.              

 

                    다섯 번째:김광석...

1964~1996

그와 동시대에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90년대 초, 나는 그를 거리에서 보았고 소극장에서 보았고 그리고 음반에서 만났다. 

이제는 다시 그의 생목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그의 노랠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고자 했던 

그의 꿈을 나는 잊지 못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그의 노랠 들으면 나는 우울한 행복감을 느낀다.


지난 1월 6일은 그가 떠난 지 28년이 되는 날이다. 

1996년 1월 6일, 아침에 전화가 왔다. " 형~ 김광석이 죽었데요..." 친한 후배의 전화였다.

그가 죽다니...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는 그렇게 우리 곁을, 내 곁을 떠났다 

그날 오후 나는 전화를 한 후배와 함께 늦도록 소주를 마셨다. 영화의 대사처럼

'그는 왜 그렇게 일찍 갔을까...'를 되뇌며...


 그가 떠난 후 각종 다시 부르기, 김광석 추모 음악회 등이 열렸지만 한동안 나는 일절가지 않았다.  

이유를 딱히 찾지 못했지만 어떤 목소리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그를 대신할 수 없다는 나만의 

고집 같은 게 있었다. 알 수 없는 고집이었다. 바보 같은...


김광석이 가수의 길에 들어선건 유명한 이야기지만 내가 알고 있는 신기한 연결 고리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 중에 '임지훈'이라는 가수가 있다. 오래전 임지훈의 소극장 콘서트에서 그가 한 이야긴데 자신이 업소에서 노랠 부를 때 후배 '김광석'이 학생이던 시절 업소에 놀러 왔을 때 노래 잘하는 후배가 왔는데 한번 노래 들어보라 하고 무대로 불러 노랠 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노랠 잘하니 반응도 좋고 하여 그 업소에서 알바처럼 노랠 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당시 그는 대학 생활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기였는데 이때 그는 통기타 밤무대 가수로 잠깐 활동을 했었다.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임지훈'과 '김광석'이 

렇게 연결이 되었는데 또 하나의 연결 고리는 '임지훈'의 가수 데뷔다. 

그는 혼성 보컬 그룹(?)처럼  여럿이 모여 노랠 부르는 '꾸러기'라는 노래 그룹에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 '꾸러기'라는 그룹을 만들고 음반을 만들고 데뷔를 시켜준 이가 바로 내가 좋아하는 '산울림'의 큰형인 

'김창완'(이 매거진의 1호 인물)  산울림   (brunch.co.kr)이었다. 

또한 '김광석'이 노래 활동을 하다 만난 친구들과 함께 '동물원'이라는 그룹으로 음반을 내고 만들어 활동했는데(1988)이 음반이 대박 히트를 치며 라디오, TV에도 나오게 되었고, 이 '동물원'의 성공으로 '김광석'은 

'동물원'에서 나와 본격적인 솔로가수로의 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또한 바로 산울림의 큰형 '김창완'이 이들이 만든 데모 테이프를 듣고 음반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이 음반은 이대생들만 공략해도 본전은 뽑겠다고 생각하고 만들었다고 하는 후일담이 있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산울림(김창완)과 임지훈과 김광석은 그렇게 연결이 되었다.


당시 80년대의 학내 분위기는 노래패들이 사회과학 공부등을 하며 우리 사회의 모순을 깨닫기 시작하는 때

였는데 '김광석'은 여기서 영향을 받았으나 그렇다고 소위 말하는 '운동권'으로 열렬한 활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그러다 서울지역 대학연합노래패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노래 활동을 하게 된다. 

방위 복무를 하고 복학 한 그는 본격적으로 노래패(메아리) 활동을 하며 나중에 유명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1기 멤버로 음반을 내고 활동을 했으며 그 시기 김민기를 만나 그의 곡을 받고 음반제작에도 참여했다는데 이 음반은 당국의 검열에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노래패에서 활동할 때 부른 '녹두꽃'은 김광석의 맑은 고음으로 불러 젖히는데  이 곡은 집회현장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민중후보의 선거유세등에서 자주 

불려 다녔고 이렇게 해서 김광석은 집회현장과 유세장에서 그의 뜨거운 목소리를 우리들에게 들려주었다.

그 후 솔로가수로 음반을 내고 맑은 보이스와 그의 선한 세계관과 사람을 끄는 독특한 마력으로 그는 TV를 

타지 않고도 음반과 소극장 공연만으로도 유명한 가수가 되었다.


나는 그를 샘터 파랑새 극장에서 보았고 학전에서 보았고 마당 세실에서 보았다.

공연 때 그는 노래중간중간에 자기 이야기들을 했다. 나지막이 이야기들을 했는데 때론 객석을 웃기게도 

했고 때론 숙연하게도 했고 그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며 사람들을 웃기게 했는데 대개는 단독 공연이었으며 밴드도 그의 통기타와 소규모의 센션맨들만 있는 소극장 공연이었으나 가끔 후배가수들이 나왔다. 

세실극장 공연에는 지금은 맨발의 디바라 불리며 가요계의 대모라 불리는 이은미도 그땐 촌스러운 신인 가수로 무대에서 김광석 오빠 감사해요~~라며 인사를 했다. 어느 핸가 대학로 소극장에서 그는 안치환과 공연을 함께 했는데 우리는 공연 관람 후 명륜동에 있던 막걸리 집에서 술을 마시며 노랠 부르고 있었는데 옆 방에 

있던 안치환이 와서 같이 술잔을 들고 건배를 외쳤는데 김광석까지 함께 했는지는 그때 함께 했던 우리들끼리 서로 기억이 달라 정확히는 알 수는 없지만 그때 아무튼 뒤풀이를 했었다. 

물론 같은 공간에서의 뒤풀이는 우연이긴 했지만 그땐 소극장 공연 후 대학로의 막걸리 집은 대학문화패와 

소극장 공연 문화 단체들의 단골 술집이었고 공연 후 뒷 풀이 때 다 같이 만나기도 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지금은 그런 분위기의 술집들이 남아 있을까.... 지금은 대학로에 없을 것 같다.

그 후 김광석의 소극장 공연은 1000회를 달성하여 당시 유일무이한 기록을 세웠고 그때 별명이 '또해'였다고 한다. 하도 자주 공연을 하다 보니 생긴 별명이라고 한다.

그렇게 소극장 학전 블루에서 1000회의 공연을 마치고 이번엔 남산 힐튼의 컨벤션에서 대대적인 공연을 했는데 감격한 김광석이 감정에 겨워 노랠 못하자 객석뒤에 있던 선배 임지훈이 재빨리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해서 위기를 넘긴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믿어지지가 않았고, 가슴이 뻥 뚫어진 것 같았고...  

그 상실감은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 발 빠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돌기 시작했다. 죽기 전날, 같이 술을 마시고 다음날 

만나서 공연 연습하자고, 스케줄을 잡던 그가 동료들과 그렇게 인사하고 헤어졌다는데 그가 죽다니... 

그것도 자살이라니... 주변 사람들은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고 별별 이야기들이 들려왔고 여러 가지 정황이 

결국 부인을 의심하는 소리들이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한참 흘러가고 이상호 기자에 의해 김광석 죽음에 

대한 영화가 만들어졌고 때마침 SNS의 바람을 타고 이 이야기는 확산이 되었고 영화의 내용은 역시 그녀가 의심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 나는 그 영활 보았으나 역시 내가 이미 들었던  ~카더라 

이상의, 확실한 물증은 나오지 않았고 그렇게 끝이 났다.  결국 이상호 기자는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해 그의 

부인에게 손해배상까지 하게 되었고 그 일은 오히려 깨끗하게 정리되어 그의 부인은 더 자유로운 입장이 

되었다.  김광석의 모든 유산은 결국 그녀의 것이 되었고 마지막 남은 의혹인 그의 딸(엄마와 둘이 사는 

줄 알았더니 당시 연락두절, 행방불명등으로 횡횡한 소문이 있었다)마저 수년 전 사망했고 이미 화장하여 

장사를 다 치른 상태였다. 이제는 정말 더 김광석의 유산문제로 시끄러울 일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의혹은 찜찜하지만 역설적으로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그녀는 더욱 편해지고 당당하게 되었다.


그의 노랠 들으면 맑고 곱지만 서글픈 음색이기도 하다. 그 목소리로 군가풍의 사박자로 된 운동가요를 

부르는 게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그가 불러 청중을 열광케 한 '녹두꽃'은 노랫말이 김지하의 

시로 민중가요이긴 한데 가곡 같기도 하고 어쨌든 동학혁명에 대한 이야기인데 서사를 노랫말로 

담고 있는 장중하고도 비장한 느낌의 노래다.

이걸 처음 발표한 게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인데 그날 열린 공연에서 그가 부른 '녹두꽃'에 청중들은 

그야말로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로 앙코르를 받자 흔치 않게 같은 '녹두꽃'을 또 불렀다고 한다(이 공연은 

나중에 직관한 지인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동영상을 찾아보니 촌스런 복장에 거의 차렷자세로 부른 

이 노래는 녹음 상태가 좋지 않아 시중에 떠도는 그 동영상으로 들을 땐 그런 감흥은 없다) 한때 이곡은 

술집에서 노래가 가능한 시절, 술자리에서 부르던 내 최애곡이었는데 그땐 내가 이 고음이 되었다는 게 

신기한 일이다. 그 후 노래방 문화가 되었을 때 나는 '이등병의 편지'는 꼭 부르는 나의 최애창곡이고 한곡 

더 해야 할 때는 '서른 즈음에'를 불렀다. 이게 내가 노래방에서 부를 줄 아는 유일한 노래들이고 웃기게도 

앙코르가 나올까 봐 '사랑했지만'을 준비했었다. 

안타까운 건 다른 곡은 불러본 적이 없다 보니 어떤 땐 김광석노래를 비장하게 부르다 보니 그 흥 겨웠던 

노래방의 분위기가 일순간에 싹~ 사라지게 하는 악역(?)을 하기도 했었다.


그는 생전 4장의 정규 음반을 냈고 2장의 다시 부르기 음반을 냈는데 흔치 않게 동물원시절 부른 곡들까지 

다시 불러 발매한 다시 부르기 음반이 정규음반보다 더 많이 나가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 후  정규앨범처럼 5집이라고 나온 앨범은 사기성이 짙은 좀 이상한 앨범이고 그 후 기념 음반, 베스트 음반 무슨 기획 음반... 후배들의 추모음반등으로 기이하게도 사후에 더 많은 음반들이 나왔다.

이상하게도 그러면서도 그의 음반은 계속 구매를 했다. 

똑같은 곡을 여기저기 이렇게 저렇게 갈라놓고 편집하여 만들었음에도...


소주를 마시고, 불콰한 얼굴이 되어 목울대에 핏줄이 선채 얼굴을 찡그리며 그의 노랠 하고 싶다.

예전처럼, 탁자를 탁탁 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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