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 크래프팅]워크숍 도망친 내가 '프로'였다니

부제: 나는 왜 중요한 약속을 포기하고 나서야 에너지를 되찾았을까?

by 제이미

1. 나무에서 떨어지는 블롭


그날 아침, 나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블롭'이었다.

3일 연속으로 진행되는 몸 워크숍의 마지막 날. 분명 너무나 좋았고, 많은 것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잠을 충분히 잤음에도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마음은 이유 없이 찌뿌둥했다.

'가지 말까?' 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하지만 이미 참가비도 냈겠다, 배우는 것도 느끼는 것도 많은 워크숍이어서 고민이 됐다.

더구나 마지막 날인데, 유종의 미를 거두자하는 마음과 가지 말자는 마음이 줄다리기를 했는데,

우연찮게 블롭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수많은 캐릭터 중에서, 힘없이 가지에서 떨어지는 그 블롭이 꼭 내 모습 같았다.

이건 확실한 신호다.


나는 주최자에게 불참 문자를 보냈다.

놀라운 일은 그 직후에 일어났다. "문자 전송" 버튼을 꾹 누른 순간, 무거운 안개가 걷히고 거짓말처럼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에너지가 솟아났다. 워크숍이 바로 원인이었다.


브런치 블롭.png



출처: 'Blob Tree' by Pip Wilson & Ian Long (www.blobtree.com)



2. 어느 코치의 고민, 그리고 구원의 한마디


문득 전날 참여했던 코칭 슈퍼비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코치의 고민은 이랬다.


"고객이 지난 번에 하기로 한 계획을 70% 실행할 때도 있지만, 어떨 땐 0%로, 바빠서 '아무것도 못 했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래도 지난 번엔 잘 하셨잖아요'라고 격려하는데, 저 역시 고객이 실행하지 못했다는 것이 불편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때 슈퍼바이저가 건넨 말이 내 머리를 강하게 때렸다.

"바빴다고 했잖아요. 바쁠 때 과제를 못하는 건 당연합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우선순위를 챙겼으니, 그 과제를 '안 한 것'은 잘한 일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기계가 아닙니다. 어떤 때는 70%도 하고, 0%도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예요."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알고도 안 한 것은 잘한 일이다.'


나는 무릎을 쳤다.

어제 그 코치의 고객이 바로 오늘의 나였다. 그리고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바로고정된 '잣대'였다.



3. '도전'이 '방해'로 바뀌는 순간

내가 좋아서 하는 활동—업무, 취미, 워크숍—들이 나를 성장시키는 '도전적 직무요구(Challenging Demands)'라고만 믿었다. 하지만 맥락이 중요함을 잠시 까먹었다. 장면에 몰입되어 있으면 맥락이나 배경은 간과하기 쉽다. 예를 들어, 아무리 좋은 슈퍼푸드라도, 체했을 때 먹으면 독이 되는 법이다.

아무리 즐거운 취미활동이라도, 시간을 쪼개 쓰는 바쁜 상황에서는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 있다.


몸쓰기 워크숍은 분명 나에게 보약 같은 '도전'이었다.

하지만 밤사이 나의 ‘맥락'이 바뀌었다. 신체 에너지는 고갈되었고, 다음 주의 일을 준비하는 일이 우선순위를 꿰찼다.

그 순간, 재밌는 몸 워크숍은 내 목표 달성을 가로막는 '방해적 직무요구(Hindrance Demands)'로 변해버린 것이다.


우리는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에너지, 감정, 우선순위는 날씨처럼 시시각각 변한다.

'지금 나는 어때? 하는 점검은 생각보다 자주 필요하다'는 말의 의미를 또 한번 깨달았다.


"지금 어때?" 스스로 자주 물어봐야 한다.


4. 수시로 자율주행 모드를 꺼야 하는 이유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율주행 모드'로 살아간다. (잇점도 분명히 많다, 오해하지는 말아야한다.)

"시작한 일은 끝내야 한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와 같은 개인적 신념 & 사회적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자율 주행 시스템은 중요한 것을 놓친다. 바로 '지금, 여기'라는 맥락 속의 나를 모른다는 것이다.


“자율주행 모드를 꺼라. 그 시스템은 당신의 '맥락'을 모른다.”


몸이 보내는 피로감은 "경로 이탈 경고등"이었다.

NO! 워크숍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문자를 보낸 행위는 '수동 운전 모드'로 전환하는 스위치를 누른 것이었다.지금 이 순간, 내 몸의 데이터를 믿고 필요한 방향으로 운전대를 돌린 일이었다.



5. 진짜 '프로'는 회피를 전략적으로 사용한다.


흔히 프로액티브(Proactive)한 사람은 일을 더 만들고, 새로운 도전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접근 전략 뿐 아니라 회피 전략도 아주 잘, 가장 많이 사용한다는 점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스스로 업무를 디자인하는 잡 크래프터 유형을 연구한 바에 따르면,

다양한 잡 크래프팅 전략을 가장 많이 활용하며, 업무몰입과 직무적합성이 높은

"적극적 잡 크래프터 집단"은, 회피 전략인 방해적 직무요구 감소 또한 다른 크래프터 집단에 비해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 (김선영, 2025).


진짜 프로는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진짜 프로는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가 유한한 투자 자원임을 알기에, 목표에 방해되는 활동을 과감히 '회피(Avoidance)'한다.
진짜 프로는 그렇게 확보된 자원을 가장 중요한 곳에 재투자한다.


내가 워크숍을 '도망친' 행위는 실패나 포기가 아니었다.

가장 프로액티브하고 전략적인 ‘에너지 재분배'였던 셈이다.


오늘 아침, 나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블롭이었지만,

No라고 회피한 덕분에, 지금은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미소를 머금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참고 문헌]

김선영. (2025). 한국 직장인의 잡 크래프팅 잠재프로파일과 전이 분석: 조절초점, 시간적 및 직무특성의 영향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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