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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lighter Sep 26. 2021

도쿄 사는 한국인이 불금을 즐기는 법

적당히를 모르는 한국인의 불금 먹방




나는 적당히를 모르는 사람이다.



대학시절 적당히 놀 줄을 몰라서 화끈하게 놀고

2점대의 처참한 학점으로 겨우 대학을 졸업했다.


음식도 배부르면 적당히 먹고 치울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게 안돼서 아예 눈앞에 음식을 두지 않으려고 한다.


술도 마찬가지다.

혼자 있을 때는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술을 마실 때면

나도 모르게 너무 신이 나서

'높은 확률'로 과음을 하게 된다.


이 정도로 적당히를 모르고 살던 내가

이젠 정말 달라져야겠다고 뼈저리게 느낀 건

지난주 겪은 광란의 금요일 밤 덕분이다.




#1. 1차전 : 화려한 긴자에서 불금 즐기기



지난주 금요일,

오사카 지사에 근무 중인 직장 선배가 도쿄에 놀러 오셔서

친한 대학 친구를 불러 함께 만나기로 했다.

내가 부른 친구는 서핑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친구였다.

 

직장 선배와 친구는 서로 처음 보는 사이지만

바다까지 친구로 삼아버리는 내 친구의 친화력이라면

어색함 없이 재밌게 어울려 놀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곳은

도쿄에서 가장 밤이 화려한 '긴자'에 위치한 어느 이자카야였다.

화려한 긴자의 밤거리


코로나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불필요한 지출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거의 매일 혼밥만 해오다가

오랜만에 밖에서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게 되니

나도 모르게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들떴다.


서퍼의 소울이 충만한 이 친구는 내 직장 선배와

만난 지 단 1초만에 거리낌 없이 대화를 이어 나갔고 분위기는 점점 더 화기애애해졌다.

역시 내 예상이 적중했던 것이다.


좋은 사람들, 화기애애한 분위기,

신선한 생선회와 계절 채소, 그리고 술.

술이 술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최고의 조합이다.


긴자 이자카야에서 맛본 산해진미
긴자 이자카야에서 맛본 사시미


셋이서 사케를 작은 병으로 2병 마시고

나는 추가로 맥주 2잔을 마셨다.  

직장 선배는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 분이셔서

술을 좋아하는 내 친구와 나만 신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인한 단축 영업 탓인지

테이블 이용 시간이 2시간으로 제한되는 바람에  

저녁 7시에 만난 우리는 9시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돈 계산은 확실한 합리적인 90년대생답게 당연히 더치페이를 하려고 했는데

직장 선배가 연공서열대로 하자는 꼰대스러운 발언을 하시며

화끈하게 술값을 전부 내주셨다..


연공서열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도쿄에 놀러 오시면 저희가 꼭 사드리겠다고 약속하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직장 선배를 먼저 보내드렸다.


밤 9시에 얄짤없이 길거리로 쫓겨난 친구와 나는

이대로 밤이 끝나는 것은 너무 아쉬웠기 때문에

우리 집으로 가서 2차를 하기로 했다.




#2. 2차전 : 적당히를 모르는 우리의 불금



집 근처에 도착한 후

언제 어디서나 매일 만나는 행복 충전소, 세븐일레븐에 들려

2차전을 치르기 위한 전투 식량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도 만나볼 수 있는 행복 충전소, 세븐일레븐



친구가 자기 세븐일레븐에 파는 고등어구이가 기가 막히게 맛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길래 믿진 않았지만, 일단 장바구니에 넣었다.


고등어구이를 시작으로

마른오징어, 매운 나쵸칩, 치즈 과자, 타코 와사비, 멜론빵 쿠키 과자, 얼그레이 시폰 케이크...

걸신들린 듯 전투 식량을 장바구니에 마구잡이로 집어넣었다.


전투식량만 먹으면 목이 막힐 수 있기 때문에

목을 축일 만한 수분 공급원이 뭐가 있을지 둘러보았다.

맥주, 레몬 츄하이, 하이볼...

훌륭한 수분 공급원이다.


커다란 비닐봉지에 행복을 한 가득 충전해서 집으로 향했다.

역시 세븐일레븐은 행복 충전소가 틀림없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고등어가 먹고 싶으시다는 친구님의 분부에 따라

한국인의 국민 생선, 고등어구이를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대령했다.


세븐일레븐의 고등어구이


겉보기에 굉장히 비려 보여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지만

너무 맛있게 먹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나도 한 입 먹어보기로 했다.



아니 이런???!!


편의점 고등어구이를 맛본 내 모습 (출처 : 요리왕 비룡)


엄마..??

심금을 울리는 마미손맛(어머니의 손맛)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방금 바다에서 건져 올린 고등어를 막 구워서 내놓은 것 같다.


편의점에서 산 고등어구이가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다니..

어떻게 갓 구운 고등어구이 맛을 이렇게

그대로 재현해낼 수가 있지..??


일본 편의점 음식 클라쓰에는 정말이지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안주가 너무 맛있으니 술도 덩달아 술술 들어간다.

일본 맥주는 또 왜 이리 풍미가 깊고 맛있는 건지

적당히를 모르는 나한테는 정말로 난감한 상황이다.


순식간에 행복 충전소에서 사 왔던 전투식량을 다 먹어 치워 버렸다.


이때 적당히 하고 그만뒀어야 하는 건데...

우리의 전투는 끝나긴커녕 점점 더 무르익어갔다.




#3. 3차전 : 환상의 안주, 불닭게티의 발견



전투식량을 순식간에 다 먹어 치운 후

친구가 갑자기 매운 게 땡긴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일본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한국인이라면

매운 음식이 땡기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매운 음식 사랑은 한국인에게는 불가항력적인 일이다.

문득 일본 올 때 가져왔던 불닭볶음면이 생각났다.


친구가 내 라면 보물 창고를 살펴보더니  

불닭볶음면 짜파게티를 집어 든다.


불닭게티를 만들어주겠단다.


불닭게티???


영화 기생충을 통해 짜파구리가 유명해지기 10년 전인 대학 1학년 일본 유학 시절,

나에게 짜파구리 신세계를 알려준 이 친구는

10년 후 '불닭게티'라는 비장의 카드를 들고

한층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


친구는 면발이 살짝 설익은 상태에서 물을 조금 남기고 버린 후  

불닭 소스와 짜파게티 소스를 넣고 불에 볶으면서 면을 익히는

'꼬들꼬들 반반라면 전법'을 취했다.


친구의 능숙한 손놀림 몇 번에

환상적인 비주얼을 자랑하는 불닭게티가 완성됐다.



'앗 눈부셔!'


완성된 불닭게티 뚜껑을 여는 순간 (출처 : 요리왕 비룡)


환상의 비주얼을 자랑하는 '불닭게티'


기대 반 설렘 반으로

면발 한 젓갈을 집어서 입 속으로 넣는 순간,



불닭게티를 맛본 내 모습 (출처 : 요리왕 비룡)


저 죽은 건가요?

여기가 천국인가요?

맛의 천국...


고향에서도 맛본 적 없는 환상의 맛을 타향에서 맛보게 될 줄이야...

불닭의 과한 매콤함을 고소한 짜파게티가 살짝 잡아주면서

환상의 하모니를 이룬다.

입 안에서 오케스트라의 대향연이 펼쳐진다.


반반라면은 언제나 진리다.


이 레시피를 만든 한국인은 천재인 것이 분명하다.

이걸 또 맛깔나게 만들어준 내 친구도 천재가 분명하다.


불닭게티는 다른 어떤 훌륭한 안주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지상 최고의 안주였다.



그 덕분에 나의 이성은

안 그래도 얼마 없는 내 소중한

뉴런 세포 친구들을 데리고

안드로메다로 떠나버렸다.


'사요나라.....'

안드로메다로 가버린 나의 정신줄 (출처 : https://www.wallpaperflare.com)




이때부터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4. 최고의 해장 음식, 콩나물 국밥



다음날 늦은 아침.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눈을 떴다.


머리도 아픈데 속까지 울렁거려서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온몸의 에너지와 수분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한동안 못 일어나다가

속이 너무 안 좋아서 겨우 일어나 화장실에 갔는데

본의 아니게 어제 먹었던 불닭게티를 다시 만나게 됐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정말 죽을 것 같았다.

머리는 깨질 것 같은데 속도 쓰리고

몸도 너무 무거워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이게 바로 적당히를 모르는 자의 최후인가...


어제 흥청망청 마셔댔던 것이 너무나도 후회된다.



오후 4시가 됐는데도 좀처럼 숙취가 풀리지 않아서

숙취에 좋다는 음식을 검색해보니 '콩나물 국밥'이 좋다고 나온다.

콩나물 뿌리 부분에 숙취해소에 좋은 아스파라긴산이 듬뿍 들어있을 뿐 아니라

비타민까지 다량 함유돼 있어 몸에 좋단다.

 

만약 한국에 있었다면 집 근처 콩나물 국밥집으로 바로 달려갔을 텐데

여기는 일본이기 때문에 먹고 싶으면 내가 직접 만들어 먹는 선택지 밖에 없다.


몸을 겨우 일으켜 집 근처 슈퍼마켓에서 콩나물 해장국 재료를 사 왔다.

내 인생에 요리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급하니 또 하게 된다.

인간이란 참 간사한 법이다.


콩나물 국밥 재료

콩나물 국밥 재료로 콩나물, 대파, 마늘, 계란, 홍고추, (육수 대신 사용할)닭고기 육수 분말 수프를 사고

내가 먹고 싶은 한국 김과 한국 김치를 샀다.

재료를 보고만 있어도 한국이 그리워져 눈물이 찔끔 난다.

   

다진 마늘과 홍고추와 파


부끄럽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늘을 직접 다져본다.

인생 첫 다진 마늘.. 영광스러운 순간이다.


< 요리 초보도 할 수 있는 간단한 콩나물 해장국 끓이는 법 >

준비물 : 콩나물, 다진 마늘 1스푼, 대파, 홍고추, 계란, 소금, 육수(멸치육수/새우젓 또는 없으면 닭고기 육수 분말)

1) 마늘을 칼로 열심히 다져서 다진 마늘 상태로 만들어 둔다. (다진 마늘 1스푼)
2) 대파와 홍고추도 바로 넣기 좋게 미리 썰어 둔다.
3) 끓는 물에 육수 분말을 넣고 물이 팔팔 끓으면 다진 마늘과 콩나물을 넣는다.
4) 7~8분 정도 팔팔 끓인 후 준비해 둔 대파와 홍고추를 넣는다.
5) 마지막에 기호에 따라 계란을 푼다. (좀 싱거우면 소금 간을 추가한다.)  


인생 첫 콩나물 국밥 요리 완성!!!

일본에서 직접 해먹은 콩나물 해장국


아무 맛도 안 날까 봐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사실은 내가 요리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콩나물 국밥을 먹으니 드디어 숙취가 조금 풀리는 것 같다.

역시 한국인에게 최고의 해장음식은 콩나물 국밥이다.




#5. 반성의 시간



콩나물 국밥을 단숨에 해치우고

책상에 앉아 반성의 시간을 가지기로 한다.


◎ 술을 통해 얻은 것

- 친구와의 끈끈한 우애  

- 마시는 순간의 쾌락과 즐거움

- 불필요한 칼로리와 지방

- 콩나물 국밥 요리법


◎ 술을 통해 잃은 것

- 수분과 피부의 윤기

- 얼마 없는 내 뉴런 세포들

- 피 같은 내

- 소중한 주말 시간

- 건강


술을 통해 순간의 쾌락과 즐거움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돈과 시간 그리고 건강을 잃게 된다.

게다가 친구와의 끈끈한 관계는 술이 없어도 쌓을 수 있다.


돈을 주고 건강과 시간을 갖다 버리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정말 뼈저리게 반성하게 된다.


다음 주부터는 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술도 많이 줄이고, (끊겠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다.)

과음은 절대로 절대로 하지 말아야겠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적당히를 아는 사람이 되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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