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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lighter Sep 15. 2021

월급을 현금으로 받으라구요?

일본의 은행 체험기 1편




일본에 온 지 한 달 반이 다 되어 가지만

나는 아직 사치스러운 캐시 라이프(현금 생활)를 만끽하고 있다.


사치스러운 현금 생활...(출처 : oishi-i.net/archives/9524)


한국에 있을 때는 현금을 마지막으로 쓴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현금을 거의 사용하지 않아서 현금 사용 방법을 까먹은 줄 알았는데

일본이라는 나라가 내 소중한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Thank you Japan...)


일본에 올 때 장지갑을 챙겨 오길 잘했다.

한국에선 평생 쓸 일 없을 것 같던 장지갑이

일본에서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이렇게 사치스러운 캐시 라이프를 계속 만끽할 수 있는 건

외국인에게 unfriendly 일본의 은행들 덕분이다.


내친김에 월급도 화끈하게 현금으로 받아서

행복한 비명을 지를 위기(?)에 처하게 된 경위에 대해 공유해보려 한다.


 



#1. 발단


사건의 발단은

지금으로부터 2주 전인 9월 3일 금요일이었다.


월급을 받기 위해서는 현지 급여 계좌를 만들어야 하는데

선배 과장님께서 급여 계좌를 개설하려면

신분증을 지참해 회사 지정 은행에 직접 방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주재원은 일본에서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에,

일본의 일반적인 신분증인 재류카드나 주민표는 만들 수 없고,

건강 보험증을 발급받아서 신분증 대신 쓸 수 있다고 알려주셨다.


(건강 보험증을 만들기 위해서는 현지 거주지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가 필요하기 때문에

부동산 임차 계약을 맺은 후, 부동산 계약서와 여권을 가지고 관할 구약소에 가면 된다.)


회사 주거래 은행인 일본 ㅁㅈㅎ은행(일명 파란 은행) 도쿄 중앙지점에서 계좌를 만들면 되는데

현재 코로나19 때문에 반드시 사전에 예약을 하고 창구를 방문해야 한단다.


그래서 9월 3일 금요일 오후, 해당 은행 홈페이지로 들어가 방문 예약을 했다.

일주일 후인 9월 9일 목요일에나 방문이 가능하다고 해서 살짝 당황하긴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파란 은행 사전 방문 예약 확인증


#2. 사건 당일



일주일 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은행 방문의 날이 밝았다.

급여 통장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건강보험증, 여권, 도장, 그리고 혹시나 몰라서 명함과 부동산 계약서까지 바리바리 챙겨서 파란 은행으로 달려갔다. 점심은 은행 업무를 보고 와서 근처 식당에서 먹으면 되겠다 싶었다.

파란 은행 본사 건물


은행 본사 지점이라서 그런지 건물이 아주 화려했다.


방문객 접수를 도와주시는 직원분들이 부담스러운 90도 인사와 함께 환한 미소로 맞아주신다.


'이랏샤이마세~'


나는 일주일 전에 사전 예약을 한 몸이기 때문에 가슴을 쫙 펴고

당당하게 "신규 계좌 개설을 하러 왔습니다."라고 자신감 있게 말했다.


안내 직원분께서 친절하게 번호표(?)를 뽑아서 건네주시면서 기다리시는 동안

신분증과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달라고 말씀하셨다.


일주일 전에 예약을 하고 왔는데 왜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야 하는지

살짝 의문이 들었지만 그 정도는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기다리는 동안 안내 직원분께 우선 신분증으로 건강 보험증여권을 같이 제시했는데

이 신분증은 유효한 신분증이 아니므로 '재류카드'나 '주민표'를 달라고 하신다.


외국인 주재원이 흔한 케이스는 아니니 안내 직원분이 잘 모르실 수도 있겠다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번호표가 불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후 내 번호가 대기판에 서 창구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 경고 : 속 터짐 주의)

창구 직원 1 :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나 : 회사 지정 지점으로 신규 계좌를 개설하러 왔습니다.

창구 직원 1 : 신분증, 도장, 재직 증명서를 제시해주시겠습니까?

나 : (주섬 주섬) 네, 여기 있습니다.

창구 직원 1 : 음.... 신분증 이거 말고 혹시 재류카드나 주민표는 없으신가요?

나 : 아, 네. 제 비자가 주재원 비자(비거주자)라서 현지에서 재류카드나 주민표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소에서 신분증으로 대신 사용할 수 있는 건강보험증을 발급해주셨습니다.

창구 직원 1 : 음... 죄송하지만 사진이 있는 신분증은 없으실까요? (건강보험증에는 사진이 없다.)

나 : (당황...) 아.. 그럼 여기 여권이 있습니다. 여권에 사진이 부착되어 있습니다.

창구 직원 1 : 최근 규정이 개정되어서 여권은 일본국 발행 여권이 아니면 유효하지 않습니다. 혹시 재류카드나 주민표는 없으신가요?

나 : 제 비자로는 재류카드나 주민표를 만들 수 없어서 건강보험증과 여권을 드리는 겁니다.

창구 직원 1 : 아.. 그러신가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 20분 후 -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창구 직원 1 : 고객님, 계좌 개설을 해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나 : 네..?? 이 지점이 저희 회사 급여계좌 지정 은행인데요? 저희 회사 직원분들도 이 지점에서 다 건강 보험증과 여권으로 계좌를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방문 전에 이 은행 지점 담당자분께 재차 확인 전화까지 드렸고요.

창구 직원 1 : 아 그러십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그 직원이 '확인하러' 갔다 오는 시간의 텀이 점점 길어졌다.

10분, 20분, 30분....

오후 12시에 은행에 왔는데 시계를 보니 벌써 1시가 넘었다.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이땟동안 나를 상대하던 직원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다른 직원이 창구로 왔다.


창구 직원 2 : 고객님, 확인해보니 말씀하신 그 직원은 인사이동으로 이제 이 지점에 없으므로 확인이 불가합니다. 계좌 개설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나 : (황당...) 이 지점이 회사 주거래 은행이라 급여 계좌를 여기서 개설하라고 안내받고 온 건데, 계좌를 못 만든다니 무슨 말씀이시죠?
저희 회사의 다른 직원분들은 다 급여 계좌를 개설했는데 그럼 저 혼자 월급을 현금으로 받아야 하는 건가요?

창구 직원 2 : 그땐 됐지만 지금은 법이 바뀌어서 계좌 개설이 불가합니다.


그동안 겨우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기는 순간이었다.


이성의 끈이 끊기는 순간 (출처 : www.wallpaperflare.com)


나 : 급여 계좌를 개설하려고 방문 예약을 하고, 여기 담당 직원 분에게 확인 전화도 드리고, 일주일을 기다려서 내방했는데 또 1시간 반이나 기다리게 해 놓고, 이제 와서 계좌 개설을 못 해준다는 건 너무 무책임하신 거 아닌가요?

창구 직원 2 : 무책임하다니요.

나 : 여기가 저희 회사 주거래 은행인 데다 회사에서 지정한 지점인데 급여 계좌도 못 만든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럼 전 영원히 급여 계좌를 못 만든다는 건가요?

창구 직원 2 : (묵묵부답)


그때는 됐지만 지금은 안된다는 무책임한 발언도 그렇고,

처음부터 안 되는 일을 1시간 반을 무의미하게 기다리게 해 놓고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게 너무 화가 났지만

더 이상 말해봤자 시간낭비일 것 같아서 잘 알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긴 했지만 그 와중에 내가 앉았던 의자는 제대로 집어넣고 나왔다. 혹시나 어글리 코리안으로 보일까 싶어...)


화가 나는데 하소연할 데는 없고 답답한 마음에 애꿎은 남자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화남을 주체하지 못한 모습 (TMI 카톡 배경 : 내 마음의 고향 성수동)


일단 은행을 나오긴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수치심과 분노스멀스멀 그라데이션처럼 번졌다.

사회인이 되고 처음 느끼는 순도 100% 분노였다.


저 은행을 부숴서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앞으로 파란 은행에는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신 발도 들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영화 '분노'는 명작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급여 계좌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불신

그리고 분노...



#3. 꿈과 희망의 디즈니 카드



파란 은행을 나와 길거리에서 갈 곳을 잃은 채 잠시 멍하게 서서 생각했다.


'주재원 3년 내내 설마 진짜 월급을 현금으로 받아서 생활해야 하는 건가?'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 못했는데...


길바닥에서 내 장지갑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혹시나 옛날에 일본 유학 시절이나 전 직장 다닐 때 사용하던 카드가 없을까..


그러다 문득

일본에 오기 전 장지갑이 무겁다는 이유로 옛날에 일본 살 때 쓰던 카드를 대부분 빼놓고 온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그때의 나에게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치고 싶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장지갑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다.

.

.

.

.

그러다 빨간색 카드가 하나 눈에 띄었다.


일본에서 전 직장에 다닐 때 사용하던

꿈과 희망의 나라, 디즈니의 미키♥미니 카드다..!!!


나의 구세주 미키 & 미니


참고로 이 디즈니 카드는 디즈니랜드 연간 회원권이 아니다.

일본의 3대 은행 중 하나인 미쓰비시 도쿄 UFJ은행(일명 빨간 은행)에서 발급해준 캐시 카드다.


세상 해맑게 웃고 있는 미키♥미니 커플에게 내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다.


카드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게 5년 전이었으니

휴면 상태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지만,

지금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기 때문에 일단 핸드폰으로 은행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계좌번호를 조회해보기로 한다.


앗, 그런데 통장이 없는데 카드만으로 어떻게 계좌 번호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열심히 구글링을 해보니 다행히 빨간 은행의 경우 캐시 카드 앞면에 찍힌 14자리 번호에 계좌번호가 나와있다고 한다...!!!

앞 4자리가 은행 코드, 다음 3자리가 지점 코드, 마지막 7자리가 계좌번호다.


떨리는 마음으로 은행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은행코드, 지점 코드, 마지막 계좌번호까지 입력하고

[조회] 버튼을 눌렀다.


계좌번호를 조회한 결과...

.

.

.

아직 계좌가 살아있다고 뜬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착하게 살겠습니다...

역시 사람이 쉽게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ㅠㅠ


일본에 오기 전,

장지갑에서 웬만한 카드는 다 빼놓고 왔지만,

꿈과 환상의 나라 디즈니의 미키♥미니 커플 카드귀엽기도 하고 디즈니에 대한 팬심으로 

장지갑에 그대로 넣어뒀던 것이 신의 한 였다.


내 생명의 은인 디즈니 친구들,

앞으로 디즈니를 더욱더 사랑하게 될 것 같다.


아무리 디즈니 주식이 떨어져도 내 절대 디즈니를 배신하지 않으리라...




#4.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내가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다.


일본의 캐시 카드는 ATM기에서 현금을 '인출'하는 기능만 가지고 있다.


즉, 캐시 카드만으로는 물건을 구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월급이 내 캐시 카드로 들어오긴 하겠지만,

그 돈을 쓰려면 여전히 '현금'으로 인출해서 사용해야 한다......



과연 나는 주재원 생활이 끝나기 전에 현금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 다음 편 -  

https://brunch.co.kr/@jamiee02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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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tartup-in-seongudong.tistory.com/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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