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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lighter Sep 23. 2021

파이어족(FIRE) 영접 후유증

평범한 90년대생 직장인의 한 밤 중 넋두리





얼마 전,

직장 선배의 퇴사 소식을 접했다.


입사 초기 월 지출금액이 월 30만 원에 불과했다고 할 정도로 절약가였던 그분은

주식 투자와 비트코인, 그리고 초절약 지출 습관을 토대로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수십 억 대 자산을 모으는 데 성공하셨고,

말 그대로 경제적 자유를 이뤄 화려하게 조기 은퇴를 하셨다.


유튜브나 각종 미디어에서 접했던 '파이어(FIRE)족'이 현실 세계에 실제로 존재했다니...

충격 그 자체였다.


그분께서 회사를 떠날 때 이런 명언을 남겼다.


"앞으로는 제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일하고 싶은 만큼만 일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고, 하고 싶은 일만 하기 위해 회사를 떠납니다."


그 묵직한 한 마디가 잔잔한 호수 같던 내 직장생활에 큰 파도를 몰고 왔다.


내 마음속 일렁이는 빅 웨이브 (출처 : www.wallpaperflare.com)




 #1.  파이어족 영접 후유증



그분의 소식을 접한 후,

원인을 알 수 없는 우울감무기력함이 한동안 지속되어

원래도 일이 손에 잘 잡힌 건 아니었지만

평소보다 유독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혹시 나에게도 우울증이나 번아웃 증후군이 찾아왔나 싶어

걱정되는 마음에 지식백과에 우울증 증상을 검색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번아웃이 올 정도로 죽어라 일을 하진 않은 것 같다.

(빠른 자기 객관화는 언제나 중요하다.)


그렇다. 이건 우울증이나 번아웃 증후군이 아니다.


내가 앓고 있던 병은 '파이어족 영접 후유증'이었던 것이다.



직장인 건강 정보 포털 유사 의학정보

파이어족 영접 후유증

[ aftereffect of exposure to FIRE ]


< 정의 > 이른 나이에 경제적 자립을 이룬 직장 동료나 주변 사람접한 이후,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한 우울감, 무기력 등 다양한 인지 및 정신 신체적 증상을 일으켜 직장 생활의 의욕 저하를 가져오는 질환.  


[출처 : 뇌피셜]



나는 그동안 사회생활을 하면서

싫은 사람과도 잘 지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배웠고,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없는 게 이 세상의 순리라고 배웠다.


그런데 그 직장 선배는

그동안 내가 철석같이 믿고 있던 사회적 통념을 완전히 뒤엎어 놓고 회사를 떠났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친한 회사 동기에게 사내 메신저를 걸었다.


나 : 헤이 헤이~~ 사내 게시판에 OOO차장님 사직원 뜬 거 보심??

친한 동기 : 응응. 퇴사하셨더라.

나 : 그분이 그만두실 줄은 몰랐는데 완전 대박......
퇴사 사유가 더 이상 근로소득을 벌 필요가 없어서래... 크.... 개 부럽지 않냐ㅠㅠㅠㅠ

친한 동기 : 응... 부럽지.. 근데 그분은 원래도 머리가 엄청 좋으시잖아. 어차피 일반 사람들은 엄두도 못 냄...


이런 반응을 보인 건 회사 동기뿐만이 아니었다.

그분에 대해 말하면 하나 같이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 사람은 원래부터 '타고난' 사람이기 때문에 조기 은퇴가 가능했던 것일 뿐,

평범한 직장인에게 파이어족은 꿈에 불과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원래의 나였다면 바로 수긍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 살던 대로 살았을 텐데

이번만큼은 좀 달랐다.


만약 유튜브에서 파이어족의 이야기를 접했다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말았을 텐데

주변 사람, 그것도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회사 사람이 경제적 자유를 이루었다니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2.  잔혹한 현실



입사 초창기,

정년퇴직을 앞둔 직장 상사분들이 퇴직 후 일자리를 찾기 위해 불안에 떨며 전전긍긍하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종종 퇴직한 회사 OB로부터 대뜸 전화가 걸려와

구구절절 터무니없는 부탁을 늘어놓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게 미래의 내 모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회사를 다녔는데도 누구는 젊은 나이에 수십 억 자산을 모아 조기 은퇴 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누구는 30년 넘게 회사에 몸 바쳐 일해도 정년퇴직 후 갈 곳이 없어 후배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

이 잔혹한 현실이 문득 너무 두렵게 느껴졌다.


현재 회사 덕분에 누리고 있는

도쿄 주재원 생활만족스럽지만,

회사의 지원으로 거주하고 있는 도쿄 집도

회사 이름이 박힌 명함과 회사를 통해 얻은 인맥도

다달이 통장에 꽂히는 마약 같은 월급도

내가 회사에서 나오는 순간 전부 다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하니

세상 허무하다.



 #3.  평범하다는 것


평범하다는 것은
아침 6시에 일어나 붐비는 대중교통을 타고 출근한 후 여덟 시간 일하는 것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의 노예가 되는 것이며 월급의 10%를 저축하는 것이고 그 짓을 50년 간 반복하는 것이다.

또 평범하다는 것은 모든 물건을 신용카드로 구매하는 것이며 주식 시장에 투자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평범하다는 것은 빠른 차와 큰 집이 있으면 행복하다고 믿는 것이다.

-『부의 추월차선』中 -



나는 어릴 때부터 항상 평범한 삶을 동경해왔다.


내가 동경하던 평범한 삶의 이미지


만화 '짱구는 못말려'나 '아따맘마'에 나오는 가족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왜냐면 우리 집은 한 번도 평범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영업을 하시는 부모님은 항상 돈에 쫓기며 사셨다.

매일 밤늦게 들어오시는 부모님을 보며,  

나는 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는

안정적인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가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나름 좋은 대학에 합격했고,

졸업 후 나름 좋은 회사에 취업했다.

부모님은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나를 자랑스러워하셨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8시간 이상 열심히 일해서 월급의 10%를 저축하고

나머지 10%는 주식에 투자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실천해왔다.

그리고 내 소유의 자동차와 30평대 집이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조건만 놓고 보면(차와 집이 없다는 것만 빼면),

내가 바라던 평범한 삶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데

여전히 나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부터 멀리 떨어져 지내고 있다.

시간 70%를 회사에 갖다 바치고

30%만 온전히 나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돈은 부족하다.


평범하다는 것이 이런 삶을 의미하는 건 줄은

정말 몰랐다.


안정적인 급여와 복지 혜택에 대한 대가로

 삶에 대한 통제권을 송두리째 회사에 양도해야 하는 줄은 미처 몰랐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잊고 있었다.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다.


내가 그리던 평범한 삶은 내 인생에 대한 통제권을 회사에 양도하는 삶은 분명 아니었다.

일상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는 삶도 아니었다.


내가 바라던 삶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고, 금전적인 여유도 있는 '시간 부자'의 삶이었던 것이다.


이제껏 올바른 길로 잘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길이

알고 보니 막다른 길이었다니...


길 잃은 소녀 (출처 : pixabay)



인생의 종착점에 다다르기 전에

지금이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더 늦기 전에 그동안 의지해 온 고장 난 나침반을 버리고 삶의 통제권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야겠다.



새벽 2시 반 도쿄의 어느 방구석에서

'파이어족 영접 후유증'에 시달리던

평범한 서른 살 직장인은

그렇게 파이어족이 되기로 결심한다.


방구석에서 결의를 다지는 비장한 뒷모습 (출처 : 어느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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