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 위의 앨리스 Mar 01. 2024

비사회적 도비의 인간관계

보다 편안해졌지만 그래도 노력이 필요해


 도비가 되고나서 자동으로 디톡스되는 게 있다면 이 인간관계다. 먼저 밝히자면 나에게는 친구가 '거의' 없다. 하지만 회사생활을 하다보면 동료, 거래처 직원 등 일로 파생되는 인간관계가 어느정도는 있을 수 밖에 없다.  일로 엮여있을 때는 서로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갈등이 있더라도 최소한 기본은 지켜가며 우호적으로 지내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지인과 친구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생기곤 하는데 일이라는 공통분모가 빠져버리면 그 관계가 명확하게 정의된다. 나에게는 그 과정이 참으로 감동스러웠다. 


 그만둔다는 것이 알려지고나서 업무관계에 있는 지인들 일부에게는 짤막한 메시지와 함께 소소한 감사선물을 돌렸다.(내 생각보다는 대상자가 많아서 아주 좋은 선물은 하지 못했다) 사실 그만둔 관계사 직원에게 잘해야할 때는 그 직원이 동종업계로 이직할 가능성이 있을 때 뿐이다. 하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알려졌음에도 정말 진심을 담은 마음을 보내주신 분들이 많았다. 물질적인 것도 있었지만 진짜 고마웠던 것은 그들이 보내준 문자나 전화, 손편지였다. 잘해준 것도 잘 한 것도 없던 나에게 보내준 마음이 너무 감사해서 내 마음속에 그분들을 은인 카테고리에 저장해두었다. 


 반면, 이해관계가 끝나자마자 관계의 민낯이 드러나는 사람도 있다. 어떤 분은 축하는커녕 걱정을 빙자한 비아냥과 돌려까기를 시전하는 어르신도 있었다. 부디 그저 내가 꼬인 것이고 진심어린 걱정이셨길 바란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주로 가까이에 있던, 내가 그만두는 이유에 일부 포함되어 있던 사람들이었다. 별로 놀랍지는 않고 "그래, 넌 그럴 줄 알았어."의 재확인이랄까? 그래도, 동료들의 9할 이상은 어쩌면 볼일 한번 없을지도 모르는 나를 위해 시간도 내주고 밥도 먹자고 해주며 마지막까지 따뜻한 마음을 베풀어주셨다. 고마움을 서툴게 표현하던 내게 따뜻하고 근사한 말씀도 해주셨다. 내가 그래도 좋은사람이 훨씬 더 많은 직장에서 살았었구나...하는 생각이 들만큼.


 친구가 많지 않다는 건 내가 그닥 사교적이지 못하다는 뜻도 있고, 그만큼 친구라는 카테고리의 정의가 남들보다 조금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사람에 대한 경계가 많고 사람도 많이 가린다. "함부로 인연 맺지 마라"는 말이 인간관계에 있어 가장 공감가는 진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대외적으로 친하더라도 마음속에 사람은 친구라는 정의를 내리기까지 굉장히 오래 걸린다. 10년정도는 지켜보는 같다. 겉으로는 물론 지낸다.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지만 정작 이야기는 안한다. 사람이 되었다 싶을 때부터 차근차근 속마음도 이야기를 하고 진심을 다해 상대방을 많이 챙긴다. 


 깊고 좁은 인간관계는 장단점이 명확하다.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가 없다. 그만큼 나를 잘 알고 나역시도 검증이 된 친구들만 있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오는 충돌을 최소화할 수 있다. 반면, 그만큼 다채로운 인간관계가 없어 인생이 단조롭다. 살면서 나랑 좀 다르기도하고 여러 사람을 겪어 봐야 느는 삶의 지혜나 인간관계 노하우가 있는데 그게 부족하다. 그래서 사람도리를 나이에 맞게 잘 하기 위해선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얼마 전에 친구의 애사를 위로하러 간 적이 있는데 경험이 적다 보니 나이를 이만큼 먹고도 그런 슬픈 일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그저 안아주기만 했다. 이럴 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줄 줄 알았음 좋겠는데 도무지 말재주가 없어 혹시라도 말실수를 할까봐 들어가기 전에 "이상한 말 할 거 같으면 차라리 말을 아끼자"고 마음먹고 갔다. 친구가 별로 없다는 건 부끄럽지 않았는데 정작 그 몇없는 친구에게 내가 위로의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뭐 좀 어려야 엄마아빠한테 물어서 배우지. 또,  나를 믿고 힘든 일을 털어놓는 지인에게 마음편해질 말 한마디 할줄 몰라서 그저 멍청이처럼 들어주는 게 최선이었을 때도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남에게 상처주거나 피해주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쫄보인 탓도 있지만 이건 내가 부족한 탓이 크다. 인정한다. 나는 사회성이 부족한 도비다. 끊임없이 노력해야지 어쩌겠는가. 책도 보고 한번 생각할 거 두번세번 생각하고. 모르면 좀 물어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수가 된 후로 보기싫은 인간을 안 봐도 된다는 게 나의 행복감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지날수록 극명해진다. 어쩔수 없다. 이건 찐이니까. 나랑 안 맞아서 그렇든 그 인간 자체가 쓰레기든 그런 사람은 될 수 있음 안 엮이는게 좋다. 싸울 필요 없다. 불행한 자신의 인생한탄과 듣기 괴로울 정도의 남욕을 늘어놓던 사람의 감정쓰레기통 역할을 안 해도 되어 얼마나 좋던지. SNS에 소시오패스 동료를 퇴치하는 멘트나 행동강령에 대해서는 많이 나오지만, 직장동료에게 진짜 시전했다가 돌아올 뒷감당이 더 끔찍해 실생활에서 그런 퇴치법을 쓰기는 힘들었다. 생각보다도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심했다는 걸 그만두고 몇달이 지나서야 체감하고 있다. 제아무리 높은 상사라도 그만두면 그저 마주치면 재수없을 동네 아저씨 A 내지는 아줌마 B인 것을. 속이 다 후련하다.  


 비사회적 도비가 사회성을 늘리기 위해 억지로 빌런을 만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얼마전 동료들을 만났는데 그 빌런은 여전히 개새끼이고 그 상사도 여전히 그 상사이며, 내가 나가자마자 동료 여럿의 피눈물을 뺐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때는 나도 그가 불쌍하다고도 생각했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다. 지병, 성장환경, 자기 인생의 불행이 동료를 개무시하고 무례하게 구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그가 변명하는 그의 불행들이 사실일지도 미지수지만 설령 사실일지라도 그럼 그런 안타까운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그렇게 다 죄없는 주변사람들에게 악랄한가? 조금만 생각해봐도 말이 안된다) 불만도 생각도 본인의 자유지만 남에게 피해주는 건 자유가 아니다. 출근하면서 제일먼저 그의 얼굴표정과 인사를 받아주는지 유무에 따라 하루가 얼마나 고역일지를 미리 예감한다는 후배들의 푸념이 떠올랐다. 여전히 하지 않아도 될 마음고생 중인 동료들이 안타까웠고 미안하긴 하지만 솔직히 내가 그만둬서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했다. 심지어 내가 그만둘 만큼 별로인 사람들이 있어줘서 때려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거 같아 역설적으로 감사한 마음도 든다. (아, 거짓말이다ㅋㅋ) 


 사실은 전 직장동료에게서 그들의 얘기를 들으며 얼마나 내가 엿같은 기분으로 회사생활을 했었는지가 떠올라 반나절동안 기분이 안 좋았다. 그리고는 다시 각성했다. 그만둘 때 나는 더이상 그 세계에 갖히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떠올렸다. 아까운 내 시간에 좋은 사람들로만 최대한 내 하루하루를 채우면서 좋은 것만 보고 배우자는 마음. 도비는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단 것을. 매일 다니는 운동센터 선생님과 좋은 에너지를 주고 받고, 밖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과 의미있는 경험을 공유하며 즐겁게 살 수 있다. 사회적 능력이 떨어지면 그냥 떨어지는 대로 적게 만나자. 될 수 있음 인간관계도 엄선해서 편식해보자. 항상 좋은 사람만 만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고난을 사서 하며 피눈물과 마상으로 사회성을 늘리고 싶진 않다. 흙탕물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물컵에 더 많은 깨끗한 물을 들이붓는 것이라고 한다. 좋은 것만 보자. 더 강력한 좋은 사람들로 안좋은 기억은 흘려버리자고 새삼 다짐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